289화. 성실한 로봇
10여 초쯤 지나,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애쉬랜드엔 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 사람을 봤다고 모두 구할 순 없어. 우린 능력도, 가지고 있는 물자도 부족하니까. 무엇보다 일단 우리부터 살아남아야만 다른 것들도 걱정할 수 있어.
……난 애쉬랜드에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상한 거라고 생각해왔어.”
백새벽은 머뭇거리면서도 끝끝내 줄곧 해왔던 생각을 밝혔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다른 사람까지 도와준다는 건, 정말로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우리 작은 흰둥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네.’
장목화는 급하게 끼어드는 대신 얌전히 듣기만 했다.
이내 용여홍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지하 방주의 세력은 절대 작지 않아. 우리만으론 역부족이야. 심지어 거기 들어갈 수 있을지도 보장 못 하거든. 또, 구해야 할 인원도 너무 많아. 구해 낸 후에 어떻게 할지까지 다 생각해야 한다고.
앞으로 한두 달은 더 있어야 경작을 시작할 수 있고, 수확을 얻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해.
근데 우리가 가진 식량은 매우 한정돼 있어. 무턱대고 구해줬는데,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얼어 죽게 될까? 차라리 지하 방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쁜 결말을 맞게 될 수도 있어.”
‘훌륭해. 이제는 조리 있게 상황을 설명할 줄도 알고.’
장목화는 그제야 미리 생각해두었던 결론을 말했다.
“게다가 우리 주요 임무는 구세계 파괴의 원인을 조사하는 거야.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모두 관여한다면 작업도 지연되고 불필요한 부담도 늘어나.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거나 크게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겸사겸사 도울 수도 있겠지. 근데 지금 상황에선 주요 임무가 무엇이고 부차 임무가 뭔지도 구분하지 않고 팀원들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순 없어.
모든 사람의 능력엔 한계가 있어.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신경 쓸 순 없는 거야. 각자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지.”
곰곰이 고민하던 게네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난 원래 너희들 목표 중 하나가 인류의 구원인 줄 알았다.”
‘⋯⋯왜 갑자기 뼈를 때려?’
약간 굳은 표정을 드러낸 장목화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는 것도, 무심병의 기원을 밝혀내는 것도 전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어.”
게네바는 잠시 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만약 주요 임무 역시 위험을 부담해야 하는 거라면 팀원들의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할 생각인가?”
심오한 질문에, 장목화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분석하고 위험을 파악한 다음 결정해야겠지. 만약 약간의 위험만 견뎌내면 될 일이라면 시도는 해볼 거야. 어쨌든 내가 앞장설 테니까. 하지만 위험이 크다면 방식을 바꿔 다른 단서를 찾으려 하겠지. 무의미한 희생을 할 수는 없어. 목숨만 부지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잖아.”
게네바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재차 물었다.
“그럼 왜 지하 방주에 대적해 하인들을 구하는 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왜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지도 않고 바로 포기하는 거냐?”
거듭된 질문에 장목화는 약간 짜증이 났다. 꼭 또 다른 성건우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참 성실한 로봇이네. 앞으로는 물어도 되는 문제가 뭐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뭔지 가르쳐야겠어.’
짝짝짝!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성건우가 손뼉을 치며 나왔다. 그러고는 게네바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주 대견하네.”
뜬금없는 말에 한동안 반응이 없던 게네바가 자세한 분석 후에 물었다.
“내 질문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응.”
성건우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하……. 성건우가 하나 또 추가된 거야?’
동시에 장목화는 게네바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욕심낸 지난날을 후회했다.
이내 느릿하게 숨을 토해낸 그녀가 말했다.
“그건 이미 내가 충분히 고민하고 분석해봤기 때문이야. 방주는 지하에 있어. 거긴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이라, 무작정 들어가고 싶다고해서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야. 도중에 막다른 길을 만나면 죽을 때까지 거기 갇힐 수도 있다고.
거기다 방주에 경비대원이 정말로 많아. 무기도 엄청 강력하고. 디마르코 수하에 신형 군용 외골격 장치가 최소 두 대나 있어. 구형 군용 외골격 장치는 더 많겠지. 또 그를 위해 일하는 각성자도 한둘이 아니야.
방주엔 물자도 충분하고, 무기도 아주 많아. 포위돼서 그 안에만 갇혀 있어야 한다고 해도 1년 반은 끄떡없을걸. 무엇보다⋯⋯. 디마르코 그자 역시 만만하질 않아. 굉장히 잔인하면서도 기이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
디마르코는 분노의 호수와 염호 일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그 관심 정도는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르고. 그는 혼자서 우리랑 마주할 정도로 담도 큰 자였어. 그러니까 그 사람 역시도 엄청 강한 실력자라고 생각돼.
이렇게 다 종합하면 우리 능력으론 방주 하인들을 구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와. 모든 걸 희생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은 낮아. 그래, 구조 자체는 간단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뒤처리지. 우리한텐 물자가 풍부하지 않아.”
성건우를 줄곧 다뤄온 경력자라 그런지, 장목화는 게네바를 위해 아주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는 전술적인 기만도 아니고, 철저한 계산에 의한 분석이고, 결론이었다.
게네바도 장목화의 분석을 받아들였다.
“그럼 식량을 어떻게 모을지는 생각해봤나?”
“그럴 시간 여유는 없어.”
장목화가 무기력하게 답했다. 그러다 매우 의욕적인 모습의 성건우가 곁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재차 진이 빠졌다. 가짜 성건우를 상대했으니, 이제 진짜 성건우를 마주할 차례였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건우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빙긋 웃었다.
“몇 가지 사실만 말씀드릴게요.”
‘몇 가지⋯⋯.’
용여홍은 순간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성건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첫째, 지하 방주 내부에 저장된 물자가 상당할 거예요. 한동안 아주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릴 정도겠죠. 둘째, 디마르코는 레드스톤 마켓 밀수 시장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요. 그러니 지하 방주엔 고성능 에너지도 상당하겠죠? 셋째, 괜찮은 루트만 장악하고 충분한 무력만 갖춘다면 이런 사업은 누가 맡더라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장목화도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대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디마르코를 처리해버린 후에 지하 방주를 점령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도 손에 넣고, 그곳 하인들도 구할 수 있고, 그 하인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도, 안전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거야?”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우리 지지를 받고 우리의 영향을 받은 세력이 생기면 그를 통해 레드스톤 마켓 상황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애쉬랜드인과 레드리버인, 어인, 산 요괴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해나갈 수도 있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가 순간 성건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결국 이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빙빙 돌아온 거냐?”
‘지독한 놈!’
성건우는 대답 대신, 정색하고 조금 전 장목화가 한 말을 부드럽게 지적했다.
“디마르코를 처리하고 지하 방주를 점령하다뇨. 강도처럼 들리잖아요.”
장목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성건우의 표정이 더욱더 진지해졌다.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한다!”
‘⋯⋯애초에 쟤한테 왜 구세계 드라마를 보여줬을까?’
한순간 장목화의 마음은 후회로 가득 찼다.
용여홍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성건우는 거의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반면, 백새벽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성건우의 말에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장목화가 성건우를 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만약 네가 가능성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고려해볼게. 근데 그러지 못하면 이 일은 없던 일로 하는 거다.”
* * *
여관 구역 다른 한쪽, 노예 상인 호지승의 방.
유리창을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금 접근했던 녀석들, 로봇을 한 대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실력을 얕잡아보면 안 되겠어.”
그렇게 몇 초간 고민하던 호지승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말했다.
“강희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 녀석들 내력을 좀 알아 와. 조심하고.”
키는 작지만 튼실해 보이는 강희도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워낙 신중한 분이시니 그들이 뭔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염탐했을까 걱정하시는 건 알겠는데, 레드스톤 마켓도 문을 닫은 시간에 어디 가서 그들을 찾습니까? 여기는 다들 귀신도 모르는 곳에 숨어있지 않습니까.”
호지승도 그의 말이 변명이 아님을 알았다.
잠시 고민하던 호지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경계 교회당에 가서 알고 있는 경비한테 물어봐.”
그들은 수시로 노예들을 지하 방주 밖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경계 교회당에 자주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 사장님.”
사장의 명이 떨어지자 강희도는 즉각 밖으로 나가 폐허 도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호지승은 다시 자리에 앉아, 심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 * *
산 너머로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대지를 뒤덮었을 무렵, 강희도가 드디어 여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에서 내린 그는 호지승의 방으로 돌아가 신중하게 좌우를 살폈다.
“사장님, 그 녀석들, 만만치 않은 놈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호지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희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설명했다.
“교회당의 한 경비가 말하길, 그들은 전에 매우 강력한 각성자 하나를 처리하고 아류인 연합군으로부터 레드스톤 마켓을 구했답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그들은 경계 교파가 없는 레드스톤 마켓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중요한 건, 당시 그들에게는 로봇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대체⋯⋯.”
호지승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한동안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그가 아는 바론, 레드스톤 마켓은 내부 갈등이 심하긴 해도 경계 교파의 보호를 제하고도 꽤 강력한 화력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분노의 호수에서 절대적인 최강 세력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호지승 같은 상인단쯤은 어렵지 않게 깨부술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네 명뿐인 팀이 이런 거점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라니?
말을 잊었던 호지승이 재차 확인을 거듭했다.
“지하 방주의 힘까지 합쳤을 때 이야기냐?”
“아닐 겁니다. 교회당 사람도 지하 방주의 실제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니까요.”
강희도가 솔직하게 답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호지승이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쓰읍, 교회당 경비가 과장하는 것이든 아니든, 어쨌건 그 팀과 대적하긴 쉽지 않을 것 같군. 겨우 네다섯이 한 거점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자들은 모두 베테랑 사냥꾼 급일 거다. 우리가 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유적 사냥꾼 팀들이랑 비교한다고 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정도 급의 팀에게 노예 수십 명은 눈에 차지 않으리란 거다. 디마르코 선생이 제시한 가격은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물자로 바꿀 수는 없겠지. 분명 그들은 바깥이 소란스러워져서 그냥 습관적으로 확인하러 접근한 것뿐일 거야.”
금세 호지승에게 설득당한 강희도가 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내일 아침 예정된 야외 노예 훈련은 그대로 진행하는 겁니까?”
호지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직접 그들 방으로 들어가 한 명씩 훈련 시킬 거다. 괜히 밖에서 시끄럽게 굴면서 그 팀의 신경을 거스를 수는 없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둘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강희도를 보고, 호지승이 웃으며 물었다.
“그 정도 급에 이른 팀이 겨우 노예 수십 명을 위해 우리를 치겠어? 그만한 위치에 이르렀는데 노예가 부족하겠냐고.”
“사장님, 그럼 야간 순찰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희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