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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287화 (287/649)

287화. 재방문

교파도 많고, 각성자도 많은 타르난에 있었던 게네바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낯설어하지 않았다.

다만 타르난은 치안이 워낙 좋았던 터라, 그 각종 능력의 효과를 실제로 겪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있었던 고등 무심자 사건은 굉장히 예외인 경우에 속했다.

그래서 게네바는 각성자의 능력을 이해하는데 주로 머신 헤븐 인터넷에 업로드된 자료에 의지했다.

“그래?”

게네바가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묻자, 성건우가 웃었다.

“직접 물어봐도 돼, 우리 동료들한테.”

곧이어 게네바가 용여홍을 쳐다보자,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증언해줬다.

“마, 맞아.”

장목화도 곁에서 거들었다.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의식이나 기억, 자아 인지도 매우 나약하다고 할 수 있어.”

게네바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 당장 많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이미 살던 곳을 떠났으니 더는 미리 설정된 관점을 고집하지는 마. 마음으로 듣고, 보고, 체험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다 보면 네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때가 되면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이겠지.”

마지막 말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게네바도 그 앞부분만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답을 찾아보도록 노력하겠다.”

웃음을 짓던 장목화는 이제 팀원들에게 말했다.

“차 타자, 이제.”

장목화도 게네바의 혼란을 확인한 이때, 그가 당시 수산나와 루이더스를 구하기를 고집하지 않았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지프는 레드스톤 마켓과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이미 분노의 호수 구역에 이르렀으니 하루만 지나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용여홍은 언덕 표면과 바위 틈, 그리고 멀리 떨어진 길 위에 초록 새순이 자라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겨울이 지난 건가?”

그의 경험으로 볼 때 아직 봄은 아니었다.

운전 중이던 장목화가 웃으며 설명했다.

“여긴 남쪽이잖아. 검은 늪 황야와 다르게 날이 좀 더 일찍 따뜻해져.”

게네바도 지리적 관점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이 구역의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산들이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기 때문에 안쪽은 비교적 온화하지.”

잠시 생각하던 용여홍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이 구역 겨울은 이미 지나간 거야?”

애쉬랜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그 계절이 마침내 끝난 건가?

이번엔 조수석의 백새벽이 살짝 옆으로 치우쳐진 전방을 가리켰다.

“맞아. 유랑자들이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어.”

겨울은 끝났지만 봄은 시작되지 않은 이 무렵은 저장해둔 음식은 거의 바닥나도 아직 새로운 식량을 구할 순 없는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각 거점의 황야유랑자들은 밖으로 나와 산과 물에 기대 하루하루를 버텼다.

여태까지도 버틸 식량이 없었던 유랑자들은 일찍이 위드 시티 성문 바깥 난민의 일원이 됐을 것이다.

백새벽의 손가락을 따라간 용여홍은 픽업트럭 몇 대를 보았다. 그 낡고 오래된 차의 화물칸엔 총을 쥔 사람이 여럿 서 있었다.

얼굴은 꾀죄죄하고, 옷은 온통 기운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손에 든 무기라고 해봐야 자체 제작한 산탄총이 대부분이었으며, 소총과 권총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때, 지프를 발견한 그들이 곧장 방향을 꺾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약탈을 하려는 건가?”

용여홍이 우습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시기에는 사냥보다 약탈이 더 효과적이니까.”

백새벽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어느새 확성기를 꺼내 창문을 열었다. 뒤이어 그의 목소리가 전방으로 울려 퍼졌다.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여라. 지금 돌아가도 늦지 않다. 봐, 우리한텐 개인용 바주카포도 있다⋯⋯.”

레드리버어로도 이 말을 반복한 성건우가 옆쪽의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용여홍이 약속이나 한 듯 재빨리 움직였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는 편이었다.

사신 바주카포를 꺼낸 용여홍은 황야유랑자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자기 쪽 창문 밖으로 쑥 내밀었다.

그 사이 성건우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한텐 보조형 전투 로봇도 있어.”

전과 마찬가지로 두 언어로 반복한 성건우는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앉은 게네바를 향해 눈짓했다.

게네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가 저들을 위협하길 바라는 거냐?”

성건우는 고갯짓으로 그렇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자 게네바는 한쪽 손으로 등받이를 받치면서 성건우를 넘어간 뒤, 아예 창밖으로 머리를 들이밀려 했다.

이때 운전 중이던 장목화가 뭔가를 건넸다.

선글라스였다.

잠시간 분석한 끝에 그녀의 뜻을 읽은 게네바가 선글라스를 썼다.

덕분에 그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가려졌다. 자세히 살피지 않는 이상, 그가 지능 로봇이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한동안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게네바도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이 전하얀 팀의 실제 이름은 반고 바이오의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이며, 수장은 전하얀이 아닌, 서시월이라는 것.

애초에 그 서시월이란 이름도 가명이고, 실제 이름은 장목화였다.

장목화라는 사람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장목화는 지능 로봇 한 대쯤은 그대로 업어 메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때를 노려 습격한 덕분이긴 했지만,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네바가 몇 초간 선글라스를 쓴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자, 사람들을 실은 낡은 픽업트럭은 억지로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멀어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저 구릉 지대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제자리에 제대로 앉은 게네바가 선글라스를 벗고 성건우를 바라보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각성자 능력을 사용해 저들의 인지를 바꾼 거냐?”

“맞아. 쟤는 확성기를 이용해 능력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어. 근데 지금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노릴 수 있고.”

답은 용여홍이 대신했다. 자신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성건우 대신 설명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친구와 게네바를 번갈아 바라보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언제부터 내가 능력을 썼다고 착각한 거야?”

“어⋯⋯.”

용여홍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성건우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냥 겁준 것뿐이야. 생각해봐. 전투형 보조 로봇 한 대랑 개인용 바주카포 한 대면 저 사람들쯤 가볍게 해치울 수 있어. 무심자에게 어디 뇌라도 먹힌 게 아니고서야, 이걸 보고도 덤벼들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을걸.”

야수의 본능만 남은 무심자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극도로 굶주린 게 아닌 이상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게네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능력을 따로 사용할 필요는 없겠군.”

위협과 위력 자랑의 효과는 상당했다.

그러다 게네바가 조금 전 성건우의 실수를 지적했다.

“넌 아까 보조형 전투 로봇이라고 말했다.”

“하하, 그런 세부적인 것까지 개의치는 마. 자고로 사람은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지.”

성건우가 웃으며 게네바의 왼쪽 어깨를 감쌌다. 정말로 친한 친구에게 어깨동무하는 듯한 자세였다.

“사람이라면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게네바는 학습을 하듯 그의 말을 되뇌었다.

운전 중이던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건우 쟤 지능 로봇한테 나쁜 물 들이는 거 아냐?’

옛말에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지능 로봇은 특수한 학습 알고리즘에 의거해 주위 지식을 흡수하며 스스로 인지 체계를 건립했다.

목을 가다듬은 장목화가 말했다.

“크흠. 게네바, 인간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해. 단독 개체만 보거나 한 관점만 받아들이면 안 돼. 다른 인간이랑도 접촉해야 한다고.”

“나도 알아. 타르난에 있을 때 여러 주민이나 외부인과 교류하려고 했었어. 근데 다들 모두 조심스러워하면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

게네바가 다시 선글라스를 돌려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제안했다.

“이제 날 겐이라 불러줘.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게 좀 어색하네.”

“응? 별명 짓는 건 누가 가르쳐준 거야?”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너희들 별명을 분석한 끝에 규칙을 찾았다. 근데 이 친구 별명은 그다지 유사성이 없어서 일단 배제했어.”

게네바가 말한 유사성 없이 겉도는 별명의 주인공은 바로 성건우였다.

그가 진지하게 밝힌 성건우의 별명은 무려 ‘야’였다.

순간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백새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목화 역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들 사이에도 다 차이가 있어. 특히 쟤 사고방식은 우리랑 달라. 그러니까 깊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래, 우리 지능인의 각도에서 보면 별명을 지을 때 꼭 일정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습관이나 특정 배경의 영향을 따라 짓기도 하지. 아마 내가 이 친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아직 제대로 분석이 안 된 것 같군.”

게네바가 자문자답하듯 말하며 파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특수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를 보강하려는 것 같았다.

성건우는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어깨동무했던 왼손을 거두며 게네바와 악수를 했다.

“교류는 언제나 환영이지. 이따 같이 춤이나 추자고.”

게네바는 춤에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 무리에 속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상대의 제안에 응했다.

“좋아.”

“⋯⋯.”

장목화는 말없이 전방의 길을 응시하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 * *

레드스톤 마켓이 자리한 폐허 도시는 여전히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런데 지하 시장, 그러니까 레드스톤 마켓 입구에 이르자 바위 안과 동굴 안에 숨겨져 있던 총구와 포구들이 하나하나 튀어나왔다.

“내가 나서야 하나?”

현재 상황을 분석한 끝에 게네바는 자신이 나서야 가장 안전하고 온당하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성건우가 망설임 없이 얼른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성건우는 레드스톤 마켓 입구 안쪽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양팔을 휘휘, 흔들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돌아왔어!”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입구에 숨어있던 경비들은 거의 동시에 그 가면을, 그리고 그 지프를 알아보았다.

2초간 굳어있던 그들은 경계 교파의 규칙에 따라 무기를 거두고 더 꽁꽁 숨어 버렸다.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성건우도 그들의 반응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다시 차에 오른 뒤, 게네바에게 이곳을 소개해 주었다.

“이게 여기 풍습이야. 너도 가면 쓸래?”

게네바는 가면 쓰는 것의 장단점을 분석할 수 없어, 모호하게 답했다.

“생각 좀 해보지.”

“선글라스만 껴도 돼. 옷도 갈아입고.”

장목화가 레드스톤 마켓 안쪽으로 지프를 몰며 말했다. 게네바는 지금도 검푸른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는 타르난 로봇 경비대의 제복이었다.

구조팀 네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게네바도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여기서 옷도 팔던가?”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 필요는 없지. 외투 벗고 셔츠만 입고 다녀도 돼.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옷을 더 사면 되지.”

말을 맺자마자 그녀는 기이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게네바가 바지도 입어야 하느냐고 묻진 않겠지?’

다행히 게네바는 아무 질문 없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목을 움직였다.

“알겠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외투를 벗었다.

‘음, 역시 지능 로봇은 일반 로봇이랑 다르네. 하나하나 질문하거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아.’

장목화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익숙한 곳에 차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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