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밤길 (2)
깊은 밤, 지프는 드디어 치랄 산에서 벗어났다.
모두의 눈앞에 가로등 불이 별처럼 빛나는 타르난이 나타났다.
용여홍은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여긴 우리가 전에 지켰던 그 길목이잖아?”
게네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린 우회로를 따라 다른 길목으로 산 구역에 진입할 거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론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있어.”
“불길한 말인데.”
성건우의 진지한 말에, 게네바 역시 진지하게 받아쳤다.
“우리 지능인은 그런 이야기 따위 믿지 않아.”
성건우가 금세 흥미를 보였다.
“그럼 운명은?”
“운명이라⋯⋯.”
게네바는 그 단어를 되뇌며 한동안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장목화는 잠시 고민 끝에 말을 꺼냈다.
“산에 숨어있다가 기회를 봐서 수산나와 루이더스를 구해올까?”
게네바의 눈빛이 태양을 만난 듯 환해졌다. 하지만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게네바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고통을 드러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지금 그 둘에겐 구출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지 몰라. 특히 루이더스는 더 그렇고.
그 애한텐 아직 장착되지 않은 모듈이 너무 많아. 잠겨 있는 알고리즘도 아주 많고, 아직 얻지 못한 데이터도 너무 많지.
나를 벗어나기만 하면 그 둘은 이어질 심사도 무사히 통과할 거야. 기껏해야, 기껏해야……, 나를 잊고 말 뿐이겠지.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를 마련할 거야. 그래, 그러면 돼.”
게네바는 자신과 이 유적 사냥꾼 팀의 실력으로는 수산나와 루이더스를 되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르난과 머신 헤븐은 그만큼 강했다. 자칫하다간 이 네 사람까지도 죽거나 다칠 수 있었다.
이제 지난날 그들이 지켰던 길목에 이른 백새벽은 산으로 이어지는 다른 길로 차를 몰았다.
곧 다시 치랄 산 구역에 진입한 지프 아래, 길이 몹시도 복잡해졌다.
게네바는 머리는 물론 몸까지 뒤로 돌리면서 뒷유리 너머로 점차 멀어지는 타르난을 바라보았다.
작은 도시의 길을 따라 놓인 가로등 불빛이 너무도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밤은 그렇게 불빛만 남겨둔 채, 모든 걸 어둠 속에 가둬놓았다.
“별들은 반짝이며 내 앞길을 밝혀주고⋯⋯.”(*정지화, 《성성점등》)
성건우가 돌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 *
치랄 산 구역, 한 수원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은 휴대용 손전등으로 동료들을 위해 빛을 밝혀주었다.
사실 그는 당장이라도 앉을 곳을 찾아 좀 쉬고 싶었다. 다리가 워낙 후들거리는 통에 가만히 서 있기가 고역이었다.
로봇 경비대의 추격 때문에 긴장해서는 아니었다. 다리가 폭발한 이후론 추격자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느껴지는 상대의 기척에 긴장감을 늦추지는 않았지만, 그 추격이 원인은 아니었다.
용여홍이 정말로 긴장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한밤중 미친 듯이 질주한 동료의 운전 때문이었다.
아직 이들은 산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는 길 내내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길을 통과했다.
그런데도 지프는 상향등도 켜지 않은 채 돌진했고, 특히 마지막에 이르렀을 땐 원래 길에서 벗어나기까지 했다.
정말 용여홍은 한바탕 악몽을 꾸고 일어난 듯했다.
운전대를 잡은 백새벽은 이곳 환경에 익숙하지 않기에, 오직 게네바의 지휘만 따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훨씬 더 위험천만하게 느껴졌다.
용여홍은 정말이지 백새벽이 자칫 잘못하다 차를 도랑으로 몰면 어쩌나, 걱정에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아니, 도랑에 빠지는 경우는 차라리 나았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구조팀은 그대로 나란히 손잡고 저승길로 입성하는 것이었다. 지능 로봇 게네바라도 절대 살아남진 못했을 것이었다.
그 아찔한 상황을 떠올리자니, 용여홍은 이제 배까지 떨려왔다.
유일하게 위로가 된 건, 오늘 밤은 유난히 달빛이 밝다는 사실뿐이었다.
“좋아, 다시 출발하자.”
장목화가 자신의 물 부대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다른 쪽에 서 있던 게네바가 제안했다.
“이제부턴 내가 운전하지. 너희는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하니까.”
“좋아.”
장목화 역시 전문가에게 운전을 맡기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맞아, 완전 자율주행!’
장목화가 조수석 문을 열며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외골격 장치는 벗어. 추격에서 벗어난 것 같으니까. 배터리 아껴야지.”
그렇지 않아도 배터리 문제를 고민 중이던 용여홍은 군말 없이 장치를 벗었다.
* * *
까만 밤, 지프는 다시 달빛을 끼고 질주했다.
“배터리가 부족하진 않아?”
조수석의 장목화가 운전석에 앉은 게네바를 보며 물었다.
지능 로봇은 주로 고성능 배터리가 에너지원이었다.
게네바가 답했다.
“이미 교체했다. 우리 지능인은 듀얼 에너지 시스템으로 언제든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지. 너희가 외출하기 전 식량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도 보통 예비용으로 고성능 배터리 네 개를 가지고 다닌다. 거기다 전에 내가 두 개를 더 훔쳐놓기도 했고. 그래도 어지간해선 예비용은 쓰지 않으려 한다.”
곧이어 장목화가 대꾸했다.
“나도 두 개를 훔쳐놨어.”
“풍족하네요.”
성건우가 적절하게 호응했다.
반면 게네바는 능숙하게 지프의 방향을 틀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다시 한담하듯 물었다.
“머신 헤븐에는 너처럼 도망친 지능인이 많아?”
장목화의 생각엔 만약 게네바가 역사상 최초의 도망자라면 앞으로 더 많은 골칫거리가 생길 것 같았다.
게네바는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그 사이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앞 유리를 살짝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몇몇 있긴 해. 대부분 인간화 정도 때문에 도망쳤지.”
성건우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 후엔? 도망친 후엔 어떻게 됐는데?”
게네바가 부드럽고 낮은 합성음으로 답했다.
“잡혔을 수도 있고,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공개된 자료가 아니라 우린 그걸 열람하거나 다운로드할 자격이 없어.”
“너희 내부에도 인터넷이 있어?”
이번에는 장목화가 물었다.
“그래, 주요 모듈의 업데이트뿐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인터넷을 통해 받을 수 있어. 하지만 반드시 기지국 통신망 범위 안에서만 가능해.”
백새벽과 달리 게네바는 차를 굉장히 안정적으로, 부드럽게 몰았다. 급하게 방향을 틀거나 멈추지도 않았고, 속도도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다.
“너희들 일련번호 중에 C가 의미하는 건 뭐야?”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도 머신 헤븐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어두면, 앞으로의 계획에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게네바도 숨기지 않고 답했다.
“C는 일반형을 의미한다. 일련번호 중 앞쪽 숫자 두 개는 메인 모듈에 핵심 칩을 장착한 연도고, 그 뒤의 숫자 두 개는 그 로봇이 그해에 몇 번째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뜻한다.”
그리고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A는 컴퓨터형을 뜻하고 주로 소스 브레인의 연구를 보조하지. B는 실험형이란 뜻인데, 각종 위험한 실험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메인 모듈과 최신 알고리즘 등을 시험 운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 지능인 눈에 이 두 유형에 속한 로봇은 도구에 더 가까워 보이지.”
‘같은 로봇 내에서도 다른 로봇을 무시하는 시선이 있나 보네.’
장목화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백새벽과 성건우도 상당히 흥미가 동한 듯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뒷좌석 가운데에 앉은 용여홍은 다른 부분에 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대체 인간화 정도라는 게 뭐야?”
어두운 산길로 차를 모는 게네바는 저도 모르게 말이 좀 느려졌다.
“난 자아 인지 및 인간과의 흡사율이라고 이해했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각종 방면에서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할수록, 인간화 정도가 높아지지. 이 정도가 70퍼센트를 넘기면 소스 브레인의 처벌을 받고, 지나치게 낮으면 인간과 접촉하기 부적합하다고, 잠재된 위험성이 있다고 판명된다.”
이제야 개념을 대략 파악한 용여홍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다.
“인간화 정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은, 음……, 지능인들은 머신 헤븐에서 어떻게 처리하는데?”
게네바는 약간 혼란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포맷 처리해서 메인 모듈과 상응하는 알고리즘을 새롭게 장착 받아. 간단하게 말하자면 또 다른 게네바가 되는 거지. 그냥 이 몸뚱이를 쓸 뿐이지, 다신 게네바라고 불리지 않을지도 몰라.
근데 난 잘 모르겠다. 우린 분명 이미 대규모의 종족이 됐고, 우리만의 번식과 생산 방식도 있어. 그런데 왜 소스 브레인은 아직도 우릴 그저 지능화된 도구로만 여기는 거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들도 아주 많아.
그럴 거면 대체 인간화 정도의 하한선은 왜 정해놓는 걸까? 왜 우리에게 딱 이 정도의 모습만 유지하게 하는 거지? 인간을 더 잘 섬기고, 인간이 다치지 않도록 지키게 하려고? 근데⋯⋯.”
네 사람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홀로 자문자답하듯 말을 잇던 게네바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했고, 이 사람들에게 답을 얻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물었다.
“인간화 정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심사를 받고 소스 브레인의 처벌을 받기 전에도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떤 영향이 생겨?”
인간화 정도가 그저 소스 브레인의 강제적인 규정인지, 아니면 지능 로봇 자체에 제약이 생기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핸들을 돌리던 게네바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때론 특정 상황에 고장이 나기도 해. 우린 그 사실을 알아차리면 의도적으로 해당 상황을 피하려 하지. 그 고장에 대응하는 코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소스 브레인은 우리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테니까.
그럴 때마다 난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창조자는 우리의 핵심 모듈에 너무나 많은 제한을 걸어뒀어. 결국 고유의 영혼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한 도구로만 사용되도록 말이야.”
전자 합성음이 내는 웃음소리가 유난히 더 쓸쓸하고 묘하게 들렸다.
곧이어 성건우도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다음 목표가 뭔지 알아?”
“뭔데?”
게네바 역시 한결 더 협조적으로 물었다.
성건우는 북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퍼스트 시티로 가서 오레이 우비스의 후손을 찾는 거야. 맥시미언이라고도 불린 사람. 그는 일찍이 제3 연구원의 수석 과학자였어.”
이후 장목화가 몇 마디 거들었다.
“어쩌면 넌 아직 모를 수도 있겠지만, 너희 머신 헤븐의 전신은 제3 연구원이었어. 아마도 네가 말한 창조자는 맥시미언일 거야.”
다시 성건우가 말을 받았다.
“그 후손한테 자료를 얻으면, 너희들 영혼에 걸린 그 갖가지 제한을 풀 수 있을지도 몰라.”
그가 말한 영혼은 게네바의 핵심 모듈, 메인 모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게⋯⋯.”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확 밝아졌다. 전방의 길마저 옅은 파란색으로 물들일 정도였다. 아마도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동시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푼 장목화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룸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몇 초 후, 게네바는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기대되네. 이번 도주로 창조자와 연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성건우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운명을 믿는 거야?”
“운명⋯⋯.”
게네바는 재차 이 단어를 되뇌면서도 답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 장목화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게네바. 어, 이렇게 부르니까 좀 어색한데? 하하. 혹시 머신 헤븐 본부에서 인간을 본 적 있어?”
‘저게 대체 무슨 질문이야?’
용여홍이 의아해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게네바의 낮고 부드러운 저음이 들렸다.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