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원칙
잠시 후, 게네바가 다시 그 눈에 띄지 않는 창문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 붙은 흰 종이가 바뀌어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지 않아?」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약간 굳은 듯했다.
그는 소리 없이 한 단어를 반복해 되뇌었다.
‘인생, 인생⋯⋯.’
이때, 성건우가 종이를 한 번 더 바꿨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여기에 대한 답을 찾고 싶지 않아?」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순간 확 밝아졌다.
재차 목을 돌린 그는 감시자들의 의심을 피하고자 창문 쪽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이 집에 깊은 미련을 느끼는 척 연기를 이어갔다.
게네바가 다시 창을 바라봤을 때, 종이는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
은흑색의 지능 로봇 게네바는 가만히 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성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성건우는 빠르게 종이를 바꿨다.
「5분만 기다려.」
전의 종이와는 달리 ‘5분’이라는 글자는 좀 지저분했다. 그 옆에 좍좍 금이 그어진 ‘10분’이란 글자와 ‘5분’이란 글자가 다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다.
결국 말하는 건 ‘5분’인데, 5분이란 시간을 종이에 쓰기까지 꽤 고민이 있었던 듯했다.
재차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거둔 게네바는 더 이상 그 창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 * *
감시 구역에서 벗어난 장목화와 성건우는 지프 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5분 갖고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루트를 파악하고, 방안을 마련하고, 준비를 하는 데까진 15분도 모자란다고. 그래, 이런 일을 오래 끌 수는 없지.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성건우가 투덜거리는 장목화를 힐긋 바라보았다.
“거실을 침실로 삼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 그 기회를 틈타서 저희 몰래 구세계 드라마만 보신 거 아니에요?”
할 말을 잃은 장목화는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다가 곧 강하게 부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소스 브레인한테 정보를 그렇게 얻어놓고, 바로 태도를 바꿔버리는 게 좋은 모습이겠어? 거기다 게네바도 다른 지능 로봇을 해치고 싶어 하지 않아.
게네바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고, 다른 로봇들을 동료로 여겨. 우린 충돌 정도를 통제하면서 게네바를 구해야 해. 진짜 어려운 작업이라고.
아, 지능 로봇이랑 싸워보는 건 처음인데.”
장목화의 눈에서 기대감이 조금 엿보였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이상한 시선을 느낀 그녀가 성건우를 힐끔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이미 돕기로 했는데도 계속 전전긍긍하거나 우유부단하게 굴 순 없잖아.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고.”
솔직히 말해 장목화는 지능 로봇과 싸우는 게 절대 쉽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경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중요 인터페이스는 다 숨겨져 있거나 보호 처리가 되어 있었다.
거기다 상응하는 절연 조치도 취해져 있는 데다, 전원 시스템도 두 개 이상씩 갖춰져 있었다. 그러니 육체 자체만 놓고 보면 기계 승려보다 훨씬 더 나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로봇들은 성건우가 가진 각성자 능력에 이미 면역이 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지프로 돌아간 성건우와 장목화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과 완전 무장을 갖춘 백새벽을 마주했다.
* * *
게네바의 집 안.
두 율법 로봇과 게네바, 수산나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두 율법 로봇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 상응하는 프로세서에 한 인영이 떠올랐다. 각 부위는 서로 다른 붉은색, 금속을 의미하는 부분은 대응하는 표식이 나타났다.
[인간, 중무기 없음. 권총 네 자루와 총알만 소지.]
두 율법 로봇은 서로를 보며 방문객의 위험도가 아주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내 한 로봇이 일어나 초인종이 울리는 대문을 열었다.
밖엔 짙은 파란색 다운재킷을 걸친 성건우가 서 있었다.
“안녕, 게네바는 집에 있나?”
성건우가 아주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놀란 건 바로 게네바였다. 그의 프로세서로는 현재 상황을 분석할 수가 없었다.
본래 게네바는 구조팀이 전기 공급을 끊고 그 혼란을 틈타 습격하며 도망칠 틈을 만들어 주거나, 적어도 그 비슷한 일을 벌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성건우는 너무나 일상적인 방문처럼 대놓고 이곳을 찾아왔다.
‘설마 논리적으로 대화하면 율법청에서 날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율법청에서 행동에 나섰다는 건, 이미 소스 브레인의 동의를 얻었다는 뜻인데. 그건 그렇고 저 팀은 총 네 명인 걸로 아는데 왜 한 사람만 찾아온 거지? 저 남자는 미끼고, 나머지는 주위에 잠복해서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가?’
게네바는 빠르게 각종 가능성을 정리하며, 자신이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았다. 동시에 그는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대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율법 로봇은 사무적인 말투로 성건우를 응대했다.
“게네바는 집에 있다. 하지만 지금 율법청의 심사를 받는 중이라 어떤 사람과도 만날 수 없다.”
성건우는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율법청은 사람이 아닌 거야?”
율법 로봇은 2초간 침묵하다 답했다.
“지능인이지.”
“지능인은 사람이 아닌 거야?”
성건우가 캐물었다.
그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던 게네바는 한 가지 의혹을 떠올렸다.
‘논리에 허점을 만들어 율법청 로봇의 재부팅을 야기하려는 건가? 소용없어. 우리 지능 로봇은 다운되지 않아. 보조 로봇들만 그런 고장을 일으키지, 우리의 메인 모듈은 인간의 의식과 거의 같다고.’
“지능인과 인간은 다르다.”
율법 로봇이 다시금 대꾸했다.
“아아.”
성건우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율법 로봇의 시선은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집 안에 있던 율법 로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로등 불빛 아래, 또 하나의 인영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회색 제복을 입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여자, 바로 장목화였다.
새로운 접근자 역시 중무기나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문 앞의 율법 로봇이 성건우에게 말했다.
“이만 가봐도 좋다. 나중에 다시 와라. 우리 일 방해하지 말고.”
집 안의 율법 로봇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성건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뭉그적거리는 사이, 어느덧 가까이 온 장목화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모르는 사이인 척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게네바는 다시금 혼란스러워졌다.
‘저 사람도 전하얀 팀이잖아. 왜 또 당당하게 대문 앞으로 온 거지? 미끼인 저 남자를 이용해 주의를 돌리고 돌발적인 기습을 하려던 게 아니었나?’
지금 주어진 정보론 게네바는 도저히 이들의 속셈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안녕, 게네바 선생은 집에 있나?”
장목화가 옆의 성건우는 완전히 무시한 채 생긋 웃으며 물었다.
확실히 로봇은 로봇이었다. 조금 전과 완벽하게 반복되는 상황이었지만, 율법 로봇은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율법 로봇 역시도 조금 전의 상황을 되풀이하듯 사무적인 말투로 응대할 뿐이었다.
“집에 있다. 하지만 조사 중이라 손님을 맞을 수 없다.”
“그렇군⋯⋯.”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갑자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대로 왼손을 뻗어 율법 로봇의 팔을 덥석 쥐었다.
율법 로봇도 매우 빠르게 반응하면서 그녀의 팔을 움켜쥐려 했다. 이는 로봇에겐 손쉽게 해결 가능한, 아주 작은 사고에 불과했다.
여태껏 힘이나 기술로 지능인과 겨룰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게다가 인간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반면, 지능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능인은 근거리 격투에선 태생적인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율법 로봇 역시도 자신감이 있기에 같은 수준의 대응 방식을 택했다.
다음 순간, 장목화는 몸을 돌리고, 붙이고, 굽히면서 왼팔을 위주로 문 앞에 선 율법 로봇을 그대로 뽑아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괴력이었다.
쿵!
장목화는 결국 단번에 업어치기에 성공했다.
그때였다. 동시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응한 게네바가 집 안에 있는 율법 로봇을 향해 달려들었다.
집 안의 율법 로봇은 지금 막 문 앞에서 일어난 변고에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콰당!
갑자기 또 거실 맞은편 유리창이 깨지고,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이 뛰어들었다.
용여홍은 장목화에게 두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받았다.
하나는 수산나를 저지하는 것, 강제로 게네바와 부부의 연이 끊어진 수산나가 현재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판단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게네바에게 협력해 그가 최대한 빨리, 아무런 기척도 없이 집 안의 율법 로봇을 처리하게 돕는 것이었다.
“적습이다!”
합성음으로 외친 수산나가 손을 펼치며 레이저 발사기를 드러냈다. 거기다 그 흰색 드레스 안쪽에선 무기가 하나씩 들어 올려지고, 가림막을 거뒀다. 단 1초 만에 게네바의 아내는 무시무시한 살상 무기로 변해 있었다.
다행히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던 터라, 용여홍은 종합 경보 시스템의 도움으로 빠르게 반응하며 붉은 레이저 공격을 피했다.
한편, 장목화에게 업어치기를 당한 율법 로봇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조금도 어지러워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었으니 통증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에너지를 축적하듯 눈에서 번득이는 파란빛만 더 밝아질 뿐이었다.
뒤이어 율법 로봇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장착된 무기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목표는 장목화였다.
바로 그때, 율법 로봇의 시선에 한 인영이 잡혔다. 호기심 어린 표정의 성건우였다. 그는 꼭 구경꾼처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자 율법 로봇의 메인 모듈이 하나하나, 그를 심판하기 시작했다.
[적의 없음.]
[습격자와의 관계 불명, 모르는 사이로 추정.]
[소지한 중무기 없음.]
[나도, 내 동료도 공격하지 않음.]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한 결과가 도출됐다. 결국 바닥에 쓰러져 있던 율법 로봇은 공격을 포기했다. 이 상황에서 공격을 가한다면 장목화가 아닌 성건우를 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틈을 타 바닥에 납죽 엎드린 장목화는 옆으로 손을 뻗어 왼팔의 힘으로 목표의 몸에 붙은 금속판을 확 열어젖혀 메인 인터페이스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파직-
순간 일어난 은백색 전광이 성건우의 얼굴을 밝혔다.
[전원 과부하, 보호 프로그램 가동⋯⋯]
율법 로봇의 메인 모듈에 상응하는 명령이 떠올랐다.
그가 보호 상태에 접어든 사이, 장목화는 전기 신호에 대한 감응을 바탕으로 상응하는 슬롯을 빠르게 열고, 율법 로봇에 꽂혀 있던 고성능 배터리 두 개를 다 뽑아버렸다.
이내 바닥에 쓰러진 율법 로봇은 그대로 정지했다.
장목화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세운 이번 습격 계획의 핵심은 그녀 자신의 전기 뱀장어 형 생체 공학 의수의 괴력도, 고강도의 전류도 아니었다.
성건우의 행동이 바로 핵심이었다.
이는 소스 브레인이 했던 말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긴장할 것 없다. 내 핵심 프로그램은 인간에 대한 공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니까. 여러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공격도 가능하다.’
소스 브레인이 그럴진대, 지능 로봇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게다가 율법 로봇팀을 이끌던 수장도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지능인이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건 인간을 더 잘 모시고, 인간과 더 친근해지고,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겨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건 우리의 창조자가 우리의 핵심 모듈에 새겨놓은 규칙이다. 소스 브레인도 그 규칙을 위배하진 못해.’
서로를 증명하는 이러한 말들 속에, 장목화는 지능 로봇이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며, 상응하는 규칙을 위배하지 않은 인간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걸 파악했다.
이러한 규정이 그들의 메인 프로그램 중에서도 상당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것도 확신했다.
그래서 장목화도, 성건우도 이렇게 따로 방문하며 서로를 모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