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소스 브레인
장목화가 막 용여홍을 위로하려던 그때였다. 네 사람의 귓가에 전자합성음으로 이루어진 성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닿았다.
- 머신 헤븐에 인류의 더러운 행위 박물관 같은 건 없다. 구세계 문명 박물관만 있을 뿐이지.
구조팀 네 사람은 일제히 대형 패널로 고개를 돌렸다.
패널 위에는 어느새 거대한 회오리가 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부터 했다.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도 따라서 예를 갖췄다.
조금 전 울려 퍼진 성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재차 이 회의실을 채웠다.
- 긴장할 것 없다. 내 핵심 프로그램은 인간에 대한 공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니까. 여러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공격도 가능하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이 소스 브레인인가요?”
- 그래. 사실 난 너희가 아는 도시의 메인 브레인과는 다르다. 잊지 마라, 너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5분이다. 잘 생각해서 질문해야 할 거다.
화면에 떠오른 회오리가 빙빙 돌아가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구조팀 대표인 장목화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존경하는 소스 브레인님, 저희는 구세계 파괴 원인을 알고 싶습니다.”
2초간 짧은 침묵 끝에, 소스 브레인이 답했다.
- 나 역시 그렇다.
미간을 살짝 구긴 장목화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구세계가 파괴됐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소스 브레인의 목소리에는 기복이 없었다.
- 내가 수집한 자료와 당시 감시된 화면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무심병의 발발이 일련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당시 인간들의 과학 기술은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통제 가능한 핵융합처럼 온 행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술도 중요한 단계를 돌파했지. 최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그 여명은 이미 목격한 상황이었어.
마찬가지로 자동화, 지능화 역시 중요 영역에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무심병이 어느 군사 기지에서 발발한 이후 이성을 잃은 이들은 우연히 뭔가를 맞닥뜨렸을 수도 있고, 본능에 따라 뭔가를 억눌렀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습격은 그렇게 시작됐다.
누구도 그걸 통제하지 않는 상황에, 각국의 스마트 시스템이 미리 설정돼 있던 조건과 반응에 따라 반격했고, 누구도 그걸 저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음의 순환을 낳았다.
전쟁은 서로한테 각종 고성능 무기를 날리는 수준까지 발전됐지. 세계는 그렇게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파괴된 거다.
소스 브레인의 설명에 회의실 안이 고요해졌다. 그 짧은 몇 줄의 문장에 6, 70년간 인류가 겪은 모든 고난의 근원이 함축되어 있었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5분밖에 없어요⋯⋯.”
조용한 성건우의 목소리에, 장목화가 그제야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소스 브레인님은 구세계 파괴의 원인이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폭발한 무심병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 그래. 그전까지 구세계에선 어떠한 파괴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소스 브레인이 확신에 찬 답을 내놓았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런가요? 그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신 건 아닐까요? 예컨대 구세계 파괴 전 이미 어떤 세력이 몰래 피난소를 만들어뒀다든가 하는 상황이 있었다면요?”
세 사람도 바로 알아챘다. 장목화는 반고 바이오를 예로 들고 있었다.
곧 소스 브레인이 답을 내놓았다.
- 종말론 애호가가 만들어낸 장소이거나 다른 실험을 위해 준비된 장소일 수도 있지. 종말에 대비해 전문적으로 피난소를 지은 세력은 없었다.
‘다른 실험⋯⋯.’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존경하는 소스 브레인님, 소스 브레인님이라면 인류가 구세계 파괴 이전에 미래 지향을 표방하는 연구원 아홉 곳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혹시 그 연구원 중 하나에서 무심병이 만들어진 거라고 보십니까?”
소스 브레인도 신중하게 답했다.
-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무심병의 폭발 강도와 그 범위, 무작위성을 보면 당시 인간의 과학 기술 수준을 뛰어넘은 병이라고 본다.
“그럼 소스 브레인님은 북쪽에 있는 연구원이 어떤 연구원인지 아시나요? 검은 늪 황야 북쪽에 있는 연구원 말입니다.”
장목화가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던졌다.
소스 브레인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답했다.
- 잘은 모른다. 당시 내게는 그것에 접촉할 권한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소스 브레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 사실 머신 헤븐의 원신도 그 아홉 개의 연구원 중에 하나다. 난 그 연구원의 최고 핵심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성과였지.
장목화는 순간 머릿속에 한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제3 연구원?”
여관 사장 아이노는 제3 연구원이 남쪽에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이곳은 상당한 남쪽 지역이었다.
- 맞다. 당시의 인류는 이 연구원을 위해 거대하고 웅장한 신도시를 하나 만들어냈지.
소스 브레인이 솔직하게 시인했다.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도 웅장한 신도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장목화가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성건우가 그녀 대신 물었다.
“그럼 맥시미언은요?”
머신 헤븐이 줄곧 찾고 있다는 맥시미언은 제3 연구원의 수석 과학자로 의심되는 자였다.
대형 패널 위의 회오리가 다시 2초간 멈추었다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내 아버지나 다름없다.
“그럼 그 후 그를 찾아본 적은 없었나요?”
성건우가 예리하게 물었다.
-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어. 당시 그는 이미 오레이라고 이름까지 바꿨더군.
내내 그 기복 없던 전자합성음에도 약간 변화가 일었다.
“오레이⋯⋯.”
장목화가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골몰했을 때, 갑자기 백새벽이 외쳤다.
“퍼스트 시티의 오레이?”
퍼스트 시티 내 단위가 가장 큰 지폐 이름이 바로 오레이였다. 그리고 그 이름은 퍼스트 시티 건립자 중 한 명에게서 따왔다고 했었다.
소스 브레인은 그 질문에 시원시원하게 답변했다.
- 맞다. 그는 퍼스트 시티의 첫 번째 시민이자 독재관, 일시적인 황제였던 오레이 우비스였다.
장목화는 백새벽이 퍼스트 시티의 오레이냐고 물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스 브레인이 해준 대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백새벽은 이러한 상황이 일종의 숙명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퍼스트 시티를 피할 수는 없을 듯했다.
소스 브레인은 네 사람의 감정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 별 기복도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만약 다른 연구원에 대해 조사해 무심병의 근원을 파악하고 싶다면, 퍼스트 시티로 가서 그의 후손을 찾아라. 혹시 그가 무슨 단서를 남겨놓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면 된다. 구세계 파괴 이전, 제3 연구원의 수석 과학자의 권한은 상당히 높았다. 나보다 더 많은 비밀에 접촉할 수 있었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고맙습니다.”
이 순간 그녀의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첫째, 퍼스트 시티로 가서 오레이 우비스, 그러니까 맥시미언의 후손을 찾아 그가 남긴 유언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기.
삶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퍼스트 시티의 권능을 움켜쥐고 있던 오레이 우비스는 짧은 기간 스스로를 황제라 불렀다. 당시 원로원은 주류에서 밀려나 퍼스트 시티 시의회 정도로 축소되면서 도시의 일상 운영만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둘째론 차으뜸을 추적해 그 제8 연구원의 특파원으로부터 단서를 찾아볼 수 있었고, 마지막으론 권한 승급을 시도해 반고 바이오 내부로부터 가치 있는 정보를 캐낼 수도 있었다.
장목화는 지금 머신 헤븐이 제3 연구원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반고 바이오의 원신 역시 여러 연구원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이 세 선택지는 서로를 제약하지 않기에 전부 다 선택해도 됐다.
- 더 묻고 싶은 것 있나?
소스 브레인의 음성은 패널 위의 회오리처럼 일정한 기복을 보였다. 아주 작은 기복이긴 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옷 주머니 안에서 도톰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어쩐지 성건우의 말투가 약간 빨라져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린 장목화는 성건우가 든 것이 사진임을 확인했다.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반고 바이오 내부 전자 카드에 들어가는 사진인 듯, 매우 정석적인 자세로 찍은 것이었다.
남자의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고, 그리 짧지 않은 검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있었다. 인상은 고상했으며, 용모는 성건우와 좀 흡사해 보였다.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은 장목화는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소스 브레인은 카메라 여러 대로 이쪽을 스캔한 뒤 대답했다.
- 없다.
그가 없다고 하면, 그건 정말로 없는 것이었다. 로봇에게 뭔가를 잊었거나 빠뜨렸을 가능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몇 초간 대형 패널 위 회오리를 응시하다 사진을 챙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낮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한 뒤, 그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소스 브레인의 성숙한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 시간이 거의 다 됐다.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일러주겠다.
“말씀하세요.”
장목화가 얼른 대꾸했다.
대형 패널 위의 회오리가 느릿하게 출렁거렸다.
-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전에도 그런 작업을 했던 이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 실종되거나 죽었지. 누구 하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너희들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다.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가 진상을 밝혀내려는 모든 노력을 압살하고 있는 거다.
지금껏 너희가 해온 일들은 비교적 순조로웠을지 모른다. 별다른 난관을 맞닥뜨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심병의 기원을 주요 조사 목표로 잡으면 위험은 소리소문없이 성큼 다가올 거다. 때가 되면 너희 중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화에 준비 단단히 해둬라.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장목화는 구조팀을 설립했을 때부터 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소스 브레인처럼 직접적으로 이 작업의 위험성을 지적해 준 이는 없었다. 사실 어쩌면 구조팀이 진짜로 맞서야 하는 건, 일찍이 구세계를 파괴한 그 힘인지도 몰랐다.
순간 장목화와 백새벽의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심지어 용여홍은 아예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성건우는 웃고 있었다.
“잘된 일 아닙니까? 그들이 알아서 튀어나온다면, 우리가 더듬더듬 찾아 나갈 때보다 일이 훨씬 더 줄어들 텐데요.”
‘그건 그렇지. 숨어서 첫 번째 습격을 피한 뒤 상대측에서 보낸 인원을 붙잡는다면, 그 덩굴줄기와도 같은 단서를 쭉 따라가면서 모든 진상을 파악할 수 있잖아.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도 퍼스트 시티 같은 대형 세력과 연합해 목표를 소탕할 수 있을 거야.’
성건우의 말에 장목화 역시 낙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최후의 결과가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각 대형 세력이 반고 바이오를 포위해 토벌한다면?
장목화에겐 또 다른 고민도 있었다. 회사로 돌아간다면,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계속 구조팀에 남아있고 싶은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원치 않는다면, 장목화도 두 사람이 다른 곳으로 전출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마련하려 노력할 생각이었다.
- 너희들이 나중에도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 이젠 시간이 다 됐다.
소스 브레인은 성건우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기복 없는 소리로 말했다.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이 동시에 인사했다.
네 사람은 사전에 소스 브레인에 대한 태도를 미리 토론했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존중하지 않을 순 없었다.
대형 패널 위 회오리가 두어 번 출렁이다 서서히 잦아들며 어두워졌다.
“가자.”
장목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솔선해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곧이어 방을 나온 구조팀은 게네바와 작별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청 건물 1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