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77화 (277/649)

277화. 유명인

“시합이라도 할까요?”

성건우도 거들었다.

그러자 주명희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중 어느 쪽이 성공을 거두든 모두 잘된 일이니 굳이 겨룰 필요는 없지요.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여러분이라면 애쉬랜드에서 식량으로 걱정하실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어느 대형 세력을 찾아가도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타르난도 있겠네요.”

이내 장목화가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무심병에 걸릴지 모르죠. 저한테도 그 순번이 돌아올 수도 있고요. 무심병은 예방도, 치료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다음번에 누가 걸리게 될지, 예측도 불가하고요.”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기본적으로 각 대형 세력 내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이들도 공개적, 비공개적인 교파의 신도가 되곤 했다.

말하자면, 이 애쉬랜드에서 진정한 안정감을 느끼는 집단은 없는 셈이었다. 정말 굳이 한 집단을 찾자면 반고 바이오 직원들을 들 순 있겠지만.

주명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여러분들의 실력에 대한 감탄을 표현하려는 것뿐입니다.”

“알아보셨습니까?”

성건우가 화들짝 놀란 듯 대꾸했다.

장목화 역시 웃으며 물었다.

“저희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산비둘기 술집에서 사람들을 기절시켜 환각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 것과 담당 방어 구역에서 하루를 무사히 견뎌내며 고등 무심자를 막아낸 것 외에 구조팀은 딱히 실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

곧이어 주명희가 답했다.

“저자에게 여러 번 영향받았으면서도 살아나셨잖습니까. 저자가 자발적으로 강소월의 심령 세계를 기반으로 한 환각을 만들어내게 하셨고, 그 배후에 숨겨진 정보도 해독해내셨고, 기꺼이 이 위험한 곳에 남아있겠다고도 하셨죠. 이 모든 건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실력입니다.”

‘저 자’는 당연히 바닥에 누워있는 고등 무심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정신머리가 없어서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죠.”

성건우가 살짝 방향을 틀자, 주명희가 웃으며 그를 훑어보았다.

“그렇게 멍청한 팀이었다면 여태까지 살아남긴 힘들었겠지요.”

남가관의 관주이자 신룡교의 꿈 우사인 주명희는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눈썰미는 꽤 있는 편이었다.

“그건 우리 이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성건우는 자신만의 논리로 대꾸했다.

순간 장목화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주명희가 과연 이 말을 어떻게 받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살짝 입꼬리를 뒤틀던 주명희는 잠시 고민하다 이쯤에서 성건우와의 논쟁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침묵으로 인한 공백과 대화가 반복되며 시간은 흐르고, 세 사람이 고등 무심자의 시체를 지키는 동안 하늘도 제 역할에 충실했다.

어스름히 태양이 떠오르고, 점차 뜨락의 가장자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장목화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 건너편에선 바로 게네바의 합성음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게네바 시장, 문제는 해결됐어. 후속 처리 인력을 보내줘도 될 것 같아. 음, 어쩌면 우리가 겪은 일이 그저 환각일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와. 거울 챙기는 것도 잊지 말고.”

2초간 침묵하던 게네바가 답했다.

- 알았다.

* * *

오전 9시.

강 서쪽으로 피신해 있던 현지 주민들과 외부 사냥꾼, 상인단원들의 대거 이동이 시작됐다. 고등 무심자가 정말로 사망했고, 타르난에 영향을 미치는 환각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강 동쪽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막 남가관에서 나온 성건우와 장목화를 보고, 다들 분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의를 표했다.

모두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 두 유적 사냥꾼은 어젯밤 내내 남가관 관주 주명희와 모두가 떠난 이곳을 지키며 고등 무심자를 처리했다. 또 그 이전엔 술집에 있던 손님들도 무사히 지켜낸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타르난의 유명인이 됐네요.”

장목화와 성건우가 지프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용여홍이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우리지.”

성건우의 묵직한 답에, 장목화도 금세 뜻을 알아듣고 동조했다.

“그래, 두 사람이 아니라 우리 전하얀 팀이 타르난의 유명인이 된 거지.”

그때, 운전석에 있던 백새벽이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전하얀 팀인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백새벽 자신은 팀에서 활약을 가장 적게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중에 중급 사냥꾼은 너뿐이잖아.”

뒤이어 그녀와 성건우는 동료들에게 감염된 의식과 503, 그리고 고등 무심자의 투신자살을 중심으로 어젯밤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설명을 마친 장목화가 살짝 한숨을 토해냈다.

“나도 어느 교파에 가입해 그들의 미사 의식을 경험하고, 각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인하고 싶어졌어. 분명 심령의 복도 503호에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텐데.”

현재 그곳을 탐색할 수 있는 건 성건우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성건우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다 함께 용광로 교파에 가입해 세례를 받을까요?”

‘그래, 사우나도 꽤 괜찮을 것 같긴 하단 말이지.’

장목화도 마음이 동했다. 사실 그녀가 어느 교파에 가입하려 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각성이었다. 작열하는 문에 대한 특별한 믿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도 방법이긴 하네⋯⋯.”

운전 중이던 백새벽도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조수석의 용여홍이 약간 겁이 난 듯 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회사에 보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하, 농담이야, 농담.”

이내 백새벽이 화제를 전환했다.

“게네바한테도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하신 거예요?”

장목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주 관주하고 입을 맞춰서 대략적인 상황만 언급했어. 강소월의 심령 세계로 인한 의식 감염과 그 고등 무심자가 목숨을 걸고 전하려 했던 정보가 무엇인지까진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기로 했어.”

“그렇군요.”

용여홍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이는 신룡교의 비밀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용여홍의 귓가로 성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혹시 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죽으라고 협박당하진 않을까요?”

순간 용여홍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럴 가능성도 영 없지는 않았다.

장목화는 다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른 교파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신룡교잖아.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이야.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어?”

“하긴, 그렇죠.”

주명희를 한번 떠올려 본 용여홍은 허무할 정도로 금세 걱정이 가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입을 다물게 할 그런 인물은 못 될 것 같았다.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지프는 세린 드림 여관에 도착했다.

네 사람이 막 홀에 도착하자 프론트 데스크에 앉아있던 아이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오늘도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어젯밤에 그 고등 무심자를 처리했다면서요? 굉장히 강하던데⋯⋯.”

“그가 강하다는 건 어떻게 아시죠?”

아이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성건우가 의혹을 표했다.

“드, 들었어요! 다들 그 고등 무심자가 아주 강하다고 그러던데요? 이전에 본 다른 고등 무심자와는 다르다고요.”

아이노는 말을 살짝 더듬으며 변명했다.

‘왜 말까지 더듬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저희가 처리한 건 아니에요. 이번 사건은 신룡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죠. 아, 참. 혹시 전에 다른 고등 무심자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아이노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 그럴 리가요. 타르난에 오래 살면서 만난 이들밖에 없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이노는 네 사람이 다른 걸 묻기도 전에, 알아서 질문까지 덧붙였다.

‘사장님, 기껏해야 30대 후반 정도밖에 안 돼 보이시는 분이 왜 이렇게 가십거리를 좋아하시는 거죠?’

가십거리. 강소월에 관한 자료를 보며 장목화는 어느덧 구세계 용어들을 적잖게 습득했다. 물론 그녀도 가십을 좋아하는 것과 나이는 크게 상관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냥 여유 시간이 많으면 가십을 좋아하기 마련 아니겠는가.

“신룡교 꿈 보호자 한 명이 무심병에 걸려 사건을 벌인 거였어요.”

장목화는 몇 가지 비밀은 숨기고 얘기해줄 수 있는 것만 알려주었다.

아이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꼭 귀신 얘기 같네요. 특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는 마지막 부분은 더더욱.”

“그렇죠.”

성건우와 용여홍 모두 동시에 동의했다.

만약 그 고등 무심자가 다른 방식으로 자살했다면 이 정도 느낌까진 받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강소월처럼 건물 아래로 투신했다.

그의 결말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며, 특정한 연상을 하게 만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아이노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어쨌든 이 일을 해결한 공로의 절반은 여러분들 몫이죠. 돌아가 고 영감님께 잘 말씀드려봐요. 실질적인 보답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이노 부인, 고 회장님과 잘 아는 사이이신가요?”

용여홍이 물었다. 그는 아이노와 고부겸의 관계가 줄곧 궁금했었다.

“그럼요, 잘 알죠. 왜 모르겠어요? 같은 도시에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 잘 모르는 사이인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 노인네, 참 음흉하죠. 손해 보는 짓이라곤 조금도 안 해요. 담이 좀 작은 편이라 차라리 기회를 놓칠지언정 위험을 짊어지려 하지는 않는답니다.”

아이노가 웃으며 마무리했다.

한담이 몇 번 더 오간 뒤, 구조팀은 엘리베이터로 떠났다.

그리고 네 사람이 엘리베이터 문 뒤로 가려졌을 즈음, 아이노는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거두곤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방 안.

이곳은 온통 분홍색 세상이었다.

이 분홍빛 방엔 테디베어, 레이스 드레스, 각종 전자 제품이 가득했다.

그리고 놓인 침대 위엔 거대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어스름한 바다와 보일 듯 말 듯 한 여러 개의 섬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림 아래, 침대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아이노가 있었다. 그녀는 한창 의혹이 짙은 눈을 하고 주홍색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침대에서 폴짝 내려온 아이노가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황동색 문고리를 쥐고 살짝 비틀어 당기자, 주홍색 문이 뒤로 입을 벌렸다. 그 바깥 복도엔 어둡고 노란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복도 양옆으로는 방들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복도는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도 길었다.

그 긴 복도로 셀 수도 없는 방이 있었고, 문은 전부 주홍색, 자물쇠는 황동색이었다. 금색 문패에 새겨진 숫자만 제외하면 형태가 다 똑같았다.

아이노는 복도에 진입해 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패의 번호들을 불규칙적으로 훑고 있었다.

극도로 고요한 복도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노는 어느새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 몇 초 후, 돌연 홱, 몸을 튼 아이노가 방으로 돌아가더니 큰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쾅!

그녀가 들어간 주홍색 문 위, 금색 문패에 새겨진 호수가 선명히 비쳤다.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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