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아직도 스스로를 인간이라 여기는 거야?”
성건우가 물었다.
그는 주명희를 등지고 있었기에, 현재 장목화 쪽에선 그의 옆모습만 보였다. 거기다 무심자에게서 드리워진 그늘로 그의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목화도, 주명희도 성건우의 낮은 목소리만은 똑똑하게 들었다.
고등 무심자의 몸은 살짝 굽고, 혼탁한 눈동자를 담은 눈도 잔뜩 충혈돼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성건우에게 대응하지도, 곧장 떠나지도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전에 만들어낸 환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주명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몇 발짝 뗀 뒤 성건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한동안 무심자를 응시하던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반 보호자님이십니까?”
회백색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가 야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입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주명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보호자님이 실종되신 이후 보호자님 부인은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깊은 걱정으로 중병을 얻었습니다. 보호자님의 자식분들과 손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쉬랜드를 유랑하며 보호자님께서 갈만한 곳은 다 뒤졌습니다. 교파에서도 모든 도관에 보호자님의 종적을 신경 써서 살펴보라는 명령을 내렸고요.”
무심자는 알아듣고 있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연신 낮게 포효하던 신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주명희가 말을 다 끝낸 듯 보이자, 무심자가 돌연 구슬픈 소리를 내며 홱, 돌아섰다. 그러곤 원숭이처럼 남가관 밖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장목화는 위험성을 고려해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또 혹여나 환각에 영향을 받을까, 문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휴, 전하려 했던 정보는 5, 0, 3. 이 숫자 세 개였네. 이게 뜻하는 게 뭘까⋯⋯. 심령의 복도 안, 강소월의 심령 세계로 연결된 그 문의 번호?”
계속 추측하던 그녀가 뭔가를 짚었다.
주명희는 천천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심령의 복도 안에 자리한 문 하나하나엔 각기 다른 번호가 붙어있으니까요. 어떻게 붙게 된 번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자 아니, 신분 번호일까요?”
성건우는 본능적으로 전자 카드 번호라고 말하려 했다가 억지로 구세계의 비슷한 개념을 떠올려 냈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데요.”
주명희는 그 추측을 부정했다.
다시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 고등 무심자가 이 교파의 다른 꿈 보호자들에게 심령의 복도 503호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는 건가요?”
어쩌면 사람들을 모아 달지기의 비호 아래 그 문을 철저히 정리하고 제거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요.”
주명희는 그에 대해 잘 아는 게 없어, 모호한 답만 내놓았다.
그때, 또 갑자기 남가관 밖에서 야수의 포효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날카롭고도 거친 소리였다.
눈을 맞춘 세 사람은 각자 거울 하나씩을 들고 사방을 이리저리 비추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 * *
그렇게 막 뜨락을 지나 거리에 이르렀을 무렵, 세 사람은 맞은편 건물 꼭대기에 선 고등 무심자를 목격했다.
셀 수 없는 별들이 박힌 하늘 아래, 그 무심자가 앞쪽으로 힘껏 몸을 던졌다.
빠른 추락에 회백색 긴 머리도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팍!
결국 거리에 떨어진 고등 무심자는 남루한 포대 자루처럼 뭉그러졌다.
그의 몸 아래로 새빨간 피가 쏟아지며 짙고 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성건우, 장목화, 주명희 모두 이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황급히 그 앞으로 달려갔지만, 무심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더 이상 살아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순간, 장목화는 강소월이 투신자살을 하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절로 한숨이 터졌다.
주명희 역시 한동안 시체를 응시하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고, 몸을 반쯤 틀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살짝 벌렸다.
“신세계는 꿈 밖에 자리해 있나니. 신령을 즐겁게 하기를.”
공허하고도 장엄한 축복이 끝나고, 주명희는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계속해서 시체를 주시하고 있는 성건우가 있었다.
뒤이어 그는 짙은 파란색 다운재킷을 벗고 천천히 쪼그려 앉아선, 무심자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멍하니 하늘을 눈에 담던 그 혼탁한 눈동자도 파란 옷으로 가려졌다.
장목화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 * *
남가관 안.
장목화와 성건우는 함께 고등 무심자의 시체를 이곳으로 옮긴 뒤, 신룡교의 교리에 따라 다운자켓 대신 흰 수건으로 사망자의 얼굴을 덮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꿈에 빠져들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이윽고 장목화와 성건우, 주명희는 다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시체를 지키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장목화가 한담하듯 묵직한 공기를 갈랐다.
“주 관주님, 이 무심자는 최후의 이성을 붙잡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무심자로서의 삶을 마감한 것일까요, 아니면 강소월의 심령 세계에 영향을 받아 투신하는 행위를 반복한 걸까요?”
주명희는 흰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시체를 응시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읽을 수는 없었다.
“전 전자이기를 바랍니다. 그건 그가 인간의 신분으로 이 꿈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니까요.”
한동안 침묵하던 장목화가 화제를 전환했다.
“주 관주님, 관주님은 어떻게 신룡교에 가입하게 되셨나요?”
주명희는 무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옅게 웃었다.
“저는 신룡교에 거둬 들여진 고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파 내에서 자랐어요. 가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죠.”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쩐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신룡교 교리를 자연스럽고 철저하게 따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그녀의 곁에서 여전히 시체를 응시하고 있는 성건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착 가라앉은 눈빛 속엔 지금 무슨 생각이 흐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주명희가 자조하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예전의 저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예?”
장목화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고개를 살짝 든 주명희는 남가관의 대들보를 응시하는지, 허공의 달지기를 보는지, 모호한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저한텐 아주 좋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애 역시 교파에서 거둬들인 고아였죠. 우리는 같은 방에서 몇 년 동안 함께 지냈답니다. 누구든 꿈 인도자가, 심지어는 꿈 우사가 되면, 자기가 있는 도관으로 데려와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도 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순간 말을 멈춘 주명희는 눈빛이 약간 공허해졌다.
“그 애는 무심병에 걸리고 말았죠.”
장목화는 입을 뗐지만, 이 상황에 적합한 말을 찾지는 못했다.
다시 주명희가 말을 이었다.
“전 성인이 된 후 한 동문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아주 좋은 사람이었죠. 키가 크고, 수줍음이 많았어요. 저를 비롯해 여자애들을 보면 우물쭈물해서 별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요.
참 착한 사람이라, 언젠가 교파 사람들을 따라 홍수가 난 황야유랑자 거점으로 갔었어요. 그곳 재난민들을 구하고, 아이들도 거둬주려고요.”
이때 주명희의 얼굴엔 처음처럼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멍해졌다.
“그 후⋯⋯. 그와 함께 갔던 교파 사람들이, 그 거점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끝내 돌아올 수 없게 됐다고 했어요.”
몇 초 후, 주명희가 장목화를 보며 언제나처럼 미소를 보였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습니까?”
장목화는 주명희의 웃는 얼굴을 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노르스름한 전구 불빛 아래, 그녀가 다시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가 일찍이 접한 여러 자료 중에 개인의 일기, 생산 기록, 배급 목록 등 황야유랑자 거점에서 나온 것도 있었어요. 전 그것들을 통해 정세가 혼란하고 악랄한 환경에 놓인 시대를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죠.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수원지, 생산 효율도 높지 못한 논밭, 버려진 도시나 마을에 의지해 다들 아주 힘겹게 살아갔어요.
그러다 마침내 깨끗한 수원지나 정수 칩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을, 갖은 고생 끝에 괜찮은 도랑을 만들어내서 다음 해 농사 기반을 다졌을 때의 자부심을, 얻은 수확이나 잡아 온 사냥감이 충만할 때의 행복을, 희생을 겪을 때마다 밀려드는 안타까움과 거점을 지켰을 때 느끼는 안도감…….
정말 자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감정을 느꼈어요. 맨땅에서 하나씩 성과를 이뤄갈 때의 성취감을 함께 경험하는 것 같았죠.”
계속 장목화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주명희가 물었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장목화는 잠시 고개를 숙여 주검이 된 무심자를 보며 옅게 웃었다.
“이후, 한 차례 무심병이 발발해 하룻밤 새 수많은 이들이 이성을 잃었어요. 야수로 변해 여태껏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동료들을 습격했죠.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초라한 장비를 기반으로 조금씩 지어 올렸던 거점이 눈 깜짝할 사이에 파괴됐어요. 결국 그들이 그간 얼마나 노력하고 투쟁했는지는 일부 자료에만 남게 된 겁니다. 만약 저희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발견했다면 그 자료들 역시 바람과 세월에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라요.
음, 전염병의 창궐을 겪은 거점도, 기후 변화로 인한 기아를 경험한 거점도, 전력을 다해 그 모든 재난을 버텨내고도 강도단이나 특정 대형 세력의 공격을 받은 거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심병의 발발은 그 어떤 것보다 급작스러워요. 대처할 방안도 없고요.”
주명희는 한숨을 쉬고 싶은 건지, 예의 그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이란 말을 반복하고 싶은 건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때, 그녀의 귀에 전보다 공허해진 장목화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래서 전 줄곧 무심병의 발병 원인과 전파 기제를, 구세계 파괴 원인을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까지 해온 그 모든 노력이 끝내 허사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설령 이게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고 해도 깨어나기 전까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잖아요. 질서를 재건하고, 생산력을 회복시키고, 환경을 바꾸는 것도 세계 구원의 중요 요소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대형 세력이 할 일이죠. 저희까지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듣기에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세우는 것뿐이에요.”
끝내 장목화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때, 드디어 고개를 든 성건우가 주명희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희와 함께 인류를 구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허상이라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없다는 이념을 따른다면, 망설임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저희 역시 인류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저희 목표는 모두가 깨진 거울을 믿고, 신봉하고, 즐겁게 해주고, 끝내 그분의 도움 아래 꿈에서 벗어나 무심병도, 전쟁도, 전염병도, 기아도 없는 신세계에 진입하도록 하는 겁니다.”
비웃음 대신 진지하게 대꾸하는 주명희의 모습에, 장목화 역시 자력갱생, 허항된 달지기에 희망을 걸지 말자는 등의 말 대신 미소를 보였다.
“그럼 어느 쪽이 더 먼저 성공을 거둘지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