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의식 감염
성건우가 재차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려던 그때, 남가관이 돌연 캄캄해졌다. 모든 전구에 흐르던 전류가 끊긴 것 같았다.
곧이어 장목화, 성건우, 주명희는 달라진 배경을 자각했다.
세 사람은 불빛과 나무 사이의 빌딩 단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빌딩들의 유리창 안쪽에선 부드럽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밤은 더 이상 적막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았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주명희가 물었다.
“강소월이 투신했던 그 빌딩 단지인가요?”
“아마도요.”
장목화가 확신에 찬 말투로 답했다.
세 사람 주변에 자리한 모든 게 지극히도 사실적이었다. 정말로 환상이 아닌, 실제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 고등 무심자가 주고 싶어 하는 정보도 이 환각에 숨어 있겠죠?”
주명희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어쩌면 저희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많은 일을 하면 실수도 자연스레 많아지는 법인데⋯⋯.”
주명희는 다시 한번 더 자신의 신념을 되뇌었다.
세 사람은 현재 빌딩 단지 가운데 자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방석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상태였다.
주명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경이 또 바뀌었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지난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강소월의 집에 이르렀다.
문 앞에 잔뜩 모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려고 앞을 다퉈가며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주명희의 귓가엔 두려움과 절망, 혼란에 휩싸인 목소리가 어렴풋이 맴돌았다.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뒤이어 주명희의 시야로 집 안의 구조와 통창에 다닥다닥 붙은 일그러진 얼굴들, 그리고 난간 위에 앉은 강소월이 들어왔다.
다음 순간, 강소월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묵직한 무엇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장목화와 성건우, 주명희의 생각은 회오리에 빨려들고 이성은 어둠에 잠겨 버렸다. 모든 의식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버들잎처럼 둘 곳 없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느낌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여전히 빌딩 단지 안에 자리해 있었다. 처음 환각에 빠져들었을 그때와 똑같았다.
그 이후의 과정도 이제는 익숙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고, 그곳에 모여 집 안을 염탐하려 하는 인파를 관통하고, 강소월의 집에 이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그녀를 목격하면 의식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사고가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고통이 반복해서 이들을 찾았다.
세 사람은 마치 한 단락의 시간 속에 갇힌 듯 그 안에서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자꾸만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장목화의 의식은 점차 흐릿해지고 정신은 갈수록 아득해졌다.
그러던 그때 그녀의 왼팔에 장착된 칩이 미리 설정된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상태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뭐지?’
순간 혼돈에서 살짝 벗어난 장목화는 자신이 한 문장을 계속 반복해 되뇌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이건⋯⋯’
퍼뜩 정신을 차린 장목화는 난간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전방에는 활짝 열린 유리창이, 아래쪽으로는 한참 작아진 지면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건물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락의 목적지에 뭉그러진 시체 같은 건 없었다.
‘내가 강소월이 된 건가? 이 환각 속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 건가? 만약 이 상황에서 저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꾸만 피어나는 의문 속에, 장목화도 점차 두려움에 침식되었다.
이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성건우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짙은 파란색 다운재킷을 입은 성건우는 난간 위에 앉아 장목화의 머리 쪽으로 한 손을 뻗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밤바람의 저항을 견뎌내며 시종일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뛰어내릴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성건우는 환각에 빠진 상태가 아니었다.
“난 깨어났어.”
장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성건우도 그제야 오른손을 거뒀다.
“넌 영향을 받지 않은 거야? 강소월로 안 변했어?”
장목화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감염된 성건우는 이미 끌려 나갔어요. 지금 저는 냉철한 성건우고요.”
성건우의 답은 한없이 침착했다.
‘그게 가능해? 정신질환에 그런 이점도 있나? 하긴, 이건 차으뜸의 강제 매혹과는 달라. 딱 한 번 마주쳤다고 영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순환으로 감염시키는 능력이니까. 그럼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인격을 바꾸는 작업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그녀의 머릿속에는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주명희!
마침 성건우도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 관주님한테도 자극을 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린 장목화는 이곳과 비슷한 다른 방에서 역시 난간 위에 앉아 있는 주명희를 발견했다. 창문에 기댄 그녀는 검은 머리를 어수선하게 헝클어뜨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주명희는 깊은 갈등에 빠져 차마 뛰어내릴 결심까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확인하고, 장목화는 상대의 실체 위치가 환각에 의해 왜곡되었든 어쨌든 상관치 않고 왼손을 쫙 펼쳐 주명희 쪽으로 뻗었다.
파직-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온 은백색 아크 한 줄기가 주위를 밝혔다.
눈 깜짝할 사이 떨어진 아크에 맞고 주명희는 온몸을 경련했다.
다음 순간, 활짝 열린 창, 유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얼굴들, 불을 밝힌 방, 나무 사이의 빌딩 단지는 허상으로 변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성건우와 장목화, 주명희는 여전히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 있는 감실과 기둥도 여전했다.
“방금 전 환각, 좀 이상하네요. 아직도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주명희가 살짝 마비된 손을 툴툴 털며 말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을까요?”
성건우가 대꾸했다.
하지만 장목화는 주명희의 한탄에 바로 동조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어째서 의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가 강소월로 변하게 된 걸까요?”
‘그 고등 무심자의 환각 능력은 환경 정보를 왜곡하고 목표의 상태를 복제하는 등, 외재적인 부분에 집중된 거 아니었나? 언제부터 목표의 의식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거지?’
연이어, 주명희의 눈도 커다래졌다.
“맞아요! 우리 영역의 환각으로는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심령의 복도 등급에서는⋯⋯.”
주명희는 순간 말을 멈추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다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흘린 탓이었다.
예의 바르게 그냥 모른 척 넘긴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심령의 복도에서 다른 영역의 신기한 물건을 손에 넣은 걸까요?”
“그럴 수도 있죠.”
주명희가 동조했다.
“음,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우리 의식에 영향을 미친 건 그 고등 무심자가 아니라 이 환각 자체일 가능성이요.”
장목화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했다.
“환각 자체?”
주명희는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이런 환각을 만든 걸 거예요. 상황에 딸려, 복제된 강소월의 심령 세계 중에 기이한 부분이 이런 효과를 발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연이어, 성건우가 장목화를 도와 정리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의식에 영향을 미친 건 그 고등 무심자가 아니라 강소월의 심령 세계라는 뜻이죠.”
주명희가 몸을 살짝 웅크렸다.
“좀 무서운데요⋯⋯. 이론상으로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강소월의 심령 세계는 정말 기이한 곳인 것 같습니다⋯⋯.”
성건우가 덧붙여 중얼거렸다. 나머지 두 사람도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주명희는 직접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어쩐지 그 고등 무심자가 집착할 만해요. 그가 남가관에 들어오려는 건 우리한테 중요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일 거라고 말씀하셨죠? 근데 왜 여태까지 들어오지도 않고 환각만 일으킨 걸까요?”
순간 말문이 막힌 장목화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 그건 그냥 추측일 뿐이었어요.”
곁에서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분이 충분한 예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명희가 좀 황당한 눈으로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네?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인가요?”
성건우는 가만히 전방의 거울을 가리켰다.
“이곳에 거울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네요!”
주명희는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장목화 역시 문제의 관건을 파악했다. 잠시 주명희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몸에 걸쳤던, 또 주위에 놓인 거울을 하나씩 돌려놓았다.
휘휘-
불어오는 거친 바람 속, 도관 뜨락 안의 나무들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2, 3분이 더 흐르고, 세 사람은 동시에 대전 입구를 주목했다.
저 어둠 끝에,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환갑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중구난방인 옷차림에, 잔뜩 충혈된 혼탁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회색으로 변해버린 긴 머리칼도 엉망으로 헝클어진 상태였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허공에서 몹시 일그러진, 동시에 눈이 빨간 얼굴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걸음을 재촉하던 이 고등 무심자는 나중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주위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얼굴들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점차 남자의 앞에 허리 정도 오는 난간과 활짝 열린 유리창이 나타났다.
무심자는 그 난간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혼란에 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공허한 음성은 그의 것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여자의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고등 무심자의 눈동자에 남가관의 감실이, 깨진 거울 파편으로 상감된 용의 상징이 들어왔다.
“꺽……, 꺽…….”
곧장 손을 뻗은 그에게서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꼭 죽음을 앞두고 발버둥 치는 야수의 신음 같은 소리였다.
성건우, 장목화, 주명희는 이 환각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서야 무심자가 가슴 깊은 곳에서 짜낸 듯한 그 소리를 들었다.
“오, 영, 삼.”
장목화는 순간 멈칫했다. 고등 무심자가 뭔가 게시를 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듣게 된 말이 숫자일 줄은 몰랐다.
‘오, 영, 삼? 그게 무슨 뜻이지? 뭘 대표하는 건가? 신룡교 내부 암호?’
그리고 고등 무심자는 이제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듯 혼탁했던 눈동자에 어렴풋이 맑고 짙은 갈색빛을 드리웠다.
하지만 갈색빛은 눈 깜짝할 사이 가라앉는 풀잎처럼 혼탁함에 잠식됐다.
“크르릉⋯⋯.”
고등 무심자는 사람을 위협하는 야수 같은 소리를 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일상적인 말을 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잡념을 내려놓은 그는 일반적인 고등 무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를 보고 장목화가 오른손을 들었다. 거울로 목표를 비추기 위해서였다. 저 위험한 존재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게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주명희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의 시야에 키가 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성건우였다.
그는 무심자 앞으로 다가가 침착하게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심자의 목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고도로 긴장하고 있던 그 몸도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