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잔류
장목화는 이 틈에 구조팀의 계획도 밝혔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했다.
“날이 밝으면 타르난의 모든 사람을 강 서쪽으로 이주시키고, 거기 새 방어진을 치게 하는 겁니다.
지금은 겨울이니 중요한 물자만 챙기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등 무심자가 주민들 집을 파괴하고, 논밭을 못 쓰게 만들고, 기물을 파손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거기다 강 서쪽에는 보존이 잘 된 빈집들도 많죠.
강 동쪽에는 관찰자 두세 명만 남겨두고 고등 무심자의 목표가 타르난의 특정 장소인지, 타르난의 특정 인물인지를 확인합니다. 거울이 보호하고 있으니, 관찰자들도 안전할 겁니다.
또 이 검증이 끝내 실패한다 해도 타르난의 안위에 영향이 가진 않습니다. 동시에 계속 신룡교의 꿈 보호자가 도착하길 기다릴 수도 있고요.”
장목화는 무심자가 반드시 남가관을 향해 돌진하리라 보장할 순 없었다.
만약 강소월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리고 타르난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의 얼굴도 많이 변했을 테니 정상적인 상황에선 정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얌전히 장목화의 말을 듣던 주명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방법을 쓰려면 게네바 시장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장목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저희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연이어 성건우도 덧붙였다.
“게네바는 저희 친구거든요.”
“친구?”
의아하다는 듯 그 단어를 반복하던 주명희는 직접 그 의문을 표하진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본부에 보고해서 상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부탁드릴게요.”
장목화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이어 성건우도 강조했다.
“전보 내용이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전보 내용이 왜곡된다면 신룡교는 구조팀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주명희가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교파엔 진위를 검증하는 방법이 있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더니 대전 옆쪽의 문으로 들어갔다.
구조팀 네 사람은 인내심 있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후, 성건우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정말 예의 없네.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꿀물 한 잔이랑 조그만 비스킷 몇 개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군침을 삼키던 용여홍은 순간 번뜩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모든 게 다 허상이고 꿈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임해?”
‘오, 작은 빨강이가 반격을 다 하네.’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곁눈으로도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백새벽의 모습이 들어왔다.
성건우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전에 고지용이란 이름을 대고 너 대신 영광의 저울의 닭 날개 튀김을 먹은 적이 있거든. 나중에 그 교파에 가입해서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
“잠깐, 내가 왜? 닭 날개 튀김은 네가 먹었잖아!”
놀란 용여홍이 반문했다.
성건우는 웃으며 그를 훑어보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어디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을까?”
‘……하, 진짜. 그냥 한번을 넘어가는 법이 없지.’
용여홍은 다신 성건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부터 몇 분 더 지났을 때, 주명희가 대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상부에서도 한번 시도해보라고 하시네요.”
‘신룡교의 꿈 보호자들도 그 고등 무심자가 어떤 정보를 전하려 하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목화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함께 게네바 시장을 찾아가실까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이는 장목화의 이상인 동시에 구조팀의 주요 임무와도 관련돼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무심병의 발병 원인과 전파 방식을 밝혀내는 것.
이것만 알아내도, 현재 인류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파멸의 검을 제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토대로 고등 무심자로부터 기인하는 잠재된 위험을 처리하면, 게네바의 의뢰도 완수하고 소스 브레인과의 통화도 가능했다.
그 소스 브레인과의 통화로, 구조팀의 구세계 파멸 원인 조사도 한발 더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주명희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강 동쪽에 남아 관찰하는 역할은 누가 맡죠?”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웃으며 답했다.
“저요.”
‘자신감이 넘쳐 보이네.’
주명희가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두렵지 않으세요?”
성건우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는 제 친구인데요.”
주명희가 의아함에 눈을 치켜떴다.
“예? 전에 알던 사이인가요?”
“아니요, 친구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의혹은 더 늘어났다. 주명희는 결국 질문을 포기하고 말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는가.
주명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도 남겠어요. 남가관에는 달지기의 비호도 있고 거울의 보호도 있으니, 사망 체험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던 장목화도 입을 열었다.
“저도요.”
그러고는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말했다.
“너희는 보충대 역할을 맡아. 언제든 지원할 수 있게.”
사실 이는 용여홍을 위로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고등 무심자가 제작한 거대 환각 속에서 그녀가 세운 이념은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일을 하면 실수도 많아지고, 적은 일을 하면 실수도 적어진다는 주명희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신조였다.
* * *
강 서쪽, 게네바의 집.
장목화는 주명희와 함께 여러 이유를 대며 게네바에게 관찰 계획을 설명했다.
오늘도 군복 차림인 게네바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서성거렸다.
“그래, 오래 끌수록 뜻밖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이들을 조직해 강 서쪽으로 물리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사이에도 변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이 은흑색 지능 로봇은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 말을 이었다.
“소스 브레인에 한 번 보고해보도록 하지.”
그 후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1, 2분 정도 지났을 무렵, 게네바의 낮고 부드러운 전자 합성음이 울렸다.
“소스 브레인은 시도해봐도 될 것 같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 책임은 온전히 내가 져야 한다는군.”
장목화는 상대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시에 성건우를 힐긋 살폈지만, 그 역시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게네바 스스로가 결정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게네바는 창밖으로 펼쳐진 밤하늘 아래 잔디밭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후, 그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해봐.”
순간 구조팀 네 사람은 이 지능 로봇에게 듬직한 신뢰감을 느꼈다.
성건우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 * *
다음날 이른 아침.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 타르난 현지 주민, 외부 사냥꾼, 상인단이 수많은 로봇의 조직 아래 짐을 꾸려 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임시 거처를 배정받기까지, 거의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후, 각 방어 구역 책임자들은 일정 시간 끝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남가관 입구.
주명희는 아무도 없이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과 비교하면 지금이 꼭 환각 같네요.”
원래 타르난의 강 동쪽도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구역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요하다 한들 이 거리만큼은 시끌벅적했으며, 사람들의 왕래도 끊인 적이 없었다.
그때가 꼭 머나먼 시절 같았다. 이제 모두가 떠난 지금,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만이 이곳의 유일한 소란이 되어 있었다.
“전에 목격했던 광경이 환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어쩌면 지금 이 광경이야말로 진짜일지도 모르는데요.”
성건우의 말에, 주명희가 미간을 팩 구겼다.
“그것도 그렇네요. 모든 게 환각이고 꿈이죠.”
이내 장목화가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기다리죠.”
태양이 뜬 대낮이 되자 타르난의 여러 건물이 알아서 거울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자 주명희도 상대가 더 좋은 기회가 오기만 기다릴 것이라 여겼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고등 무심자가 올 것이었다.
* * *
남가관 대전.
이곳에 한 줄씩 놓여있던 검은색 등받이 의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 때문에 장목화와 성건우는 각자 방석을 찾아 앉았다.
“주 관주, 이편이 훨씬 나은데요? 왜 굳이 환각을 만들어 이곳이랑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스타일로 꾸미셨던 건가요?”
장목화가 웃으며 한담을 건넸다.
지금 남가관엔 기둥과 감실, 방석과 세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극도의 공허함 속에선 오히려 신성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주명희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 능력을 연습하기 위해서였죠. 음, 요즘은 신도들이 그렇게 신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광경을 연출한 것이기도 했고요. 신룡교의 신도가 많은 것처럼 꾸며, 더 많이 가입하길 유도한 것도 있어요.”
주명희는 평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제 생각에는 성찬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꿀물과 조그만 비스킷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건 디저트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주명희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영광의 저울이 거리에서 닭 날개를 튀겨댈 때마다 저도 가서 줄을 서고 싶어진답니다.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그러진 못하지만요.”
“가면을 쓰면 됩니다.”
성건우가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주명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그건 너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잖아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바람도 서서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장목화와 성건우, 주명희는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멈추고 집중했다.
* * *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하늘은 완전히 캄캄해졌고 바람은 더 거세졌다. 이젠 담이 큰 장목화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룡은 높으시다!”
돌연 주명희가 몸을 뒤로 젖히고 허공을 향해 양팔을 약간 벌렸다.
기도를 마친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이에 주명희가 눈짓으로 묻자, 성건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노래를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죠. 하지만⋯⋯.”
주명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성건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본인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귓가에 닿는 소리에, 장목화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가 웃는다. 도도한 파도가 몰아친다⋯⋯.” (*황점 《창해일성소》)
새카만 밤하늘 아래, 거친 바람을 타고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노랫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캄캄한 밤, 아무도 없는 강 동쪽에 울려 퍼지는 호탕한 노랫소리는 모든 위험과 어려움을 저 바람결에 떠나보낼 듯했다.
장목화도 성건우를 따라 노래를 가볍게 흥얼거렸다.
노래 한 단락을 다 마치고, 장목화가 웃으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스피커는 왜 안 써?”
“지금 같은 환경에선 직접 불러야 느낌이 나죠. 노래하면서 허벅지를 두드리면 훨씬 더 느낌 있어요.”
한 발 더 앞서는 그는 완벽한 노래 장인 모드의 성건우인 듯했다.
장목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나중에 한 번 해볼게.”
감실 앞쪽에서 머리, 허리, 손까지 거울을 장착한 주명희가 그들의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자신은 도저히 저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이 정말 노래 부르기에 적합한 때인가? 됐다, 됐어.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어?’
주명희는 결국 이 상황에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대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