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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272화 (272/649)

272화. 또 다른 가능성

철강공장에서 찾아낸 그 병력은 용여홍이 처음으로 폐허를 수색했을 때 주운 것이었다. 어느 정도 연구 가치도 있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던 터라 용여홍은 단박에 그 기억을 떠올렸다. 용여홍은 약간 흥분해서 호응했다.

“맞아요! 진짜 비슷하네요! 전부 특정 사건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후, 지원 합의서에 서명하고 실험적 치료를 받기 위해 북방으로 이송됐으니까요.”

이 두 사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설명 방식이었지만, 그건 사건의 본질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그 병원, 아니 그 장소에 뭔가 비밀이 있을까요?”

백새벽은 그곳이 병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말을 고쳤다. 병원이라는 건 애초에 눈속임을 위한 수단일지도 몰랐다.

이내 장목화가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여태 함께 지내며, 그녀는 성건우의 기발하고 혁신적인 생각에 새로운 영감을 받을 때가 있었다. 물론 90퍼센트 이상은 이렇다 할 가치도 없고, 어이없는 웃음만 나오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나머지 10퍼센트는 분명 묘한 방식으로 부연 안개를 꿰뚫고, 문제의 핵심을 가리키곤 했다.

“전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어요.”

성건우는 명탐정 같은 태도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 용여홍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뭐, 거기다 파이프까지 물려주면 진상을 더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냐?’

용여홍 역시 성건우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어떤 가능성?”

말을 내뱉자마자 뭔가를 떠올린 장목화가 성건우와 동시에 외쳤다.

“연구원!”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말했다.

“여관 사장이 그랬잖아.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최대 애쉬랜드인 국가와 최강의 레드리버인 국가가 연합해 미래를 지향하는 연구원 아홉 곳을 건립했다고.”

“두 식물인간이 사실은 어느 연구소의 실험을 받았을 거란 거야?”

용여홍은 금세 친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그는 지금처럼 진지하고, 엄숙하고, 정신이 말짱한 성건우가 몹시도 어색했다. 물론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정신질환의 증상 중 하나이긴 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성건우가 허리를 굽혀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도 금세 연결됐다. 그가 연락한 곳은 바로 프론트였다.

“여보세요, 주인아주머니?”

전화 건너편에서 아이노의 목소리가 한층 크게 울려 퍼졌다.

- 아이노 부인이라고 불러요! 예의 없긴!

성건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그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까지 차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아이노가 코웃음을 쳤다.

-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하룻밤 같이 보내자고 제의받은 사이죠⋯⋯.’

용여홍이 성건우의 답을 추측했다. 물론 아이노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성건우라면 여태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귀신 영화를 같이 본 사이죠.”

하지만 성건우의 답은 용여홍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범상치 않았다.

성건우는 아이노에게 다시 무슨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물었다.

“말씀하셨던 연구원 아홉 곳 중에 북방에 있는 건 어떤 연구소인가요?”

아이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아는 거라곤 제3 연구원은 남쪽에, 제2 연구원은 서쪽에 있다는 것밖에 없어요. 다음번에 또 드라마 시청을 방해하면 그때는 비용을 청구할 거예요!

뚜뚜뚜-

전화는 그대로 끊겨버렸다.

“더 이상의 단서는 없네요.”

성건우가 동료들을 향해 손을 펼쳐 보였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혹이 어린 눈초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게 그 고등 무심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성건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강소월의 아들일 수도 있죠.”

이번에는 누구도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실험이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덕분에 깨어난 강소월이 구세계가 파괴된 이후 누군가와 결합해 아이를 낳았다는 거야?”

‘……뭐, 뭐, 결합? 결혼이라는 점잖은 표현을 두고 왜 굳이…….’

하지만 용여홍도 이러한 제 생각과 달리, 애쉬랜드 여러 지역에 사는 남녀 관계 대부분이 결혼이라고 표현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백새벽의 말대로 그들의 관계는 결합에 가까웠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그것도 고등 무심자가 타르난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진 못해. 방금 우리가 봤던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강소월의 고향과 그녀가 투신했던 장소는 모두 분노의 호수 북쪽이고, 이곳은 분노의 호수 남쪽에서도 더 남쪽인 치랄 산 남쪽이잖아.”

용여홍이 자신의 추측을 밝혔다.

“그 고등 무심자는 강소월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비밀스러운 연구원 출신인 거 아닐까요? 그가 그곳에서 접한 식물인간 강소월에, 그리고 그녀와 관련된 프로젝트 자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요?”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장목화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근데 난 그보다 더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소월이 투신자살하는 장면을 우리한테 보여줬을까? 그 고등 무심자에게 아무리 야수 수준의 지능만 남았다 한들,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을 했을 리는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야수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목적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아예 머리에 손가락을 얹고 생각을 빠르게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이 팀의 장으로서 체면을 지키고자 애써 충동을 참았다.

“머릿속으로 당시 광경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죠.”

어느새 진지한 표정을 드러낸 성건우가 제안했다. 재차 명탐정 연기라도 하려는 모양새였다.

“좋은 생각.”

장목화는 그를 칭찬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곤 빌딩 단지가 나타났을 때부터 강소월이 건물 밖으로 몸을 내던졌을 때까지 목격했던 모든 광경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다른 단서는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눈을 뜬 장목화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가치 있는 단서를 하나 찾았어.”

“뭔데요?”

백새벽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장목화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환각 자체의 시각, 혹은 상응하는 느낌의 근원. 창문과 문틈에 붙은 얼굴들은 파파라치의 염탐과 대중들의 호기심, 그리고 팬들의 증오를 뜻하는 거야.”

조금 전 대량의 자료를 읽고 살피는 동안, 네 사람은 파파라치라는 단어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용여홍은 순간 밀려드는 두려움을 안고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실제가 아니라 강소월이 받은 느낌이에요!”

그 환각에는 투신하기 전 강소월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장목화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던졌다.

“그 고등 무심자는 강소월이 당시 느꼈던 마음과 그녀가 했던 행동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짝!

성건우가 두 손을 맞부딪혔다.

“답은 아주 간단하네.”

용여홍과 백새벽의 시선이 쏟아지자, 그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고등 무심자가 바로 강소월인 거야.”

용여홍은 한숨도 아깝다는 듯 그냥 눈썹만 살짝 찡그렸다.

“⋯⋯성별이 다르잖아.”

“성전환 수술이라는 게 있잖아. 장기 이식, 신경 건립술 등등.”

성건우는 굴하지 않고 유창하게 답했다.

그러자 용여홍은 외려 더 자신감을 잃었다.

“하, 그럴 필요까지 있나?”

장목화는 맹목적으로 성건우의 생각을 부정하는 대신 포용력을 발휘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영생인 기술엔 인간 의식의 전이, 그리고 업로드 기술도 있잖아. 음, 또 다른 가능성도 있어.

강소월과 철강공장에서 발견된 병력 기록 주인의 아들은 모두 식물인간이 됐고, 의식을 차릴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치료, 혹은 실험을 받기로 했지.

그 실험 과정 중에 피실험자의 뇌 속 기억을 끄집어내는 장치가 사용된 건 아닐까? 피실험자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말인 영역 각성자처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그 장치를 사용한 거야.”

이는 당사자의 상태와 실험 가능한 전개에 근거를 둔 추리였다.

백새벽은 그러한 가능성에 기반을 둔 추측을 해보았다.

“그 고등 무심자는 연구자 중 한 명이었을까요? 그가 모종의 방식을 통해 강소월이 투신하기 전의 느낌을 체험했던 걸까요?”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굉장히 그럴듯한데, 그럼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무심자는 왜 그렇게 타르난에 집착할까? 우리한테 그 환각을 보여준 이유는 뭐지?”

성건우가 신중하게 답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강소월을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르죠. 그녀를 깨우고 싶다는 마음이 집착으로 변한 거예요. 그러다 무심병에 걸리면서 그 갈망을 영원히 실현할 수 없게 되자, 환각을 통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고요.”

‘참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네⋯⋯.’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그럼 타르난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곳은 로봇을 연구하는 지역이었다.

그 순간, 성건우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알았다! 강소월에게서 얻어낸 기억을 한 지능 로봇의 메인 모듈에 넣어서, 그 로봇이 강소월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예요.”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복잡해. 고등 무심자가 생각해낼 법한 방법이 아니야.”

용여홍과 백새벽 역시 나름의 추측을 제시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구조팀의 브레인스토밍은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지만, 여전히 전체를 관통하는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장목화가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30분만 토론하고 뭐 좀 먹자. 모든 중요 정보를 정리해 모아 두고 무슨 생각이 나나 보자. 내가 먼저 쓸게. 너희들이 보충해.”

타닥타닥-

장목화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짧은 문장과 단어를 입력했다.

「강소월의 투신. 방민서 아들의 교통사고. 식물인간. 북방의 모처. 실험적인 치료. 연구원. 고등 무심자, 환각에 능하고 강력함, 기원의 바다 끝에 이르렀거나 이미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뒤에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됨. 용이 등장하는 환각을 제조했고 타르난에 집착하고 있음⋯⋯.」

한창 입력하던 때, 성건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생각났어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용여홍과 백새벽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컴퓨터 옆에 선 성건우는 막 지는 노을에 뒤덮여 표정까지도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뭔데?”

장목화도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성건우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성건우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운을 뗐다.

“심령의 복도의 본질에 대한 송 경고자의 설명, 기억하고 계시죠?”

용여홍은 책을 읽듯 줄줄 답했다.

“심령의 복도에는 모든 각성자의 심령이 연결돼있다고 했어. 그곳에 자리한 각각의 문은 한 사람의 심령 세계에 대응한다고⋯⋯.”

장목화는 용여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성건우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고등 무심자가 병에 걸리기 전에 이미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고, 어느 날 강소월의 심령 세계와 연결된 문을 열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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