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구세계의 빅데이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하늘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길고 긴 환각 끝에, 드디어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10여 분 후, 타르난 쪽에서 한 로봇 경비대원과 두 사람이 보조 로봇 여러 대와 함께 다가왔다. 구조팀과 교대할 시간이었다.
그들이 곧 이곳에 이르자, 장목화는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해.”
성큼 앞으로 나아간 성건우가 교대하러 온 로봇 경비대원을 향해 말했다.
“봐봐. 넌 인간이야. 나도 인간이지⋯⋯.”
그런데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 로봇 경비대원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더 밝아졌다. 동시에 성건우는 돌연 침묵했다. 할 말을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로봇 경비대원이 약간 감격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여태 만난 이들 중에 기꺼이 우리 지능인을 인간으로 인정해준 첫 번째 탄소 기반인이다.”
로봇이 성건우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구조팀 세 사람은 일순 멍한 얼굴을 했지만, 성건우는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상대의 차가운 은흑색 금속 손바닥을 맞잡았다.
지능 로봇은 움켜쥔 성건우의 손을 위아래로 몇 차례 흔들며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찾아. 내 이름은 알파 스튜어트야.”
“좋아! 이제부터 우린 친구야.”
성건우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답했다.
“그래, 그래, 친구!”
알파는 성건우의 말에 굉장히 기뻐했다.
‘추리 광대를 쓰지 않고도 친구를 만든 거야?’
장목화는 순간 이게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됐습니다. 문제없어요.”
그 사이, 돌아선 성건우가 당당하게 결론을 내렸다.
장목화는 조금 더 신중하게 알파를 따라온 두 사람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신분을 검증했다.
작업을 마친 후, 네 사람은 알파 일행에게 설치된 지뢰와 함정을 표시한 지도를 건네고 차에 올랐다.
구조팀은 끊임없이 길 상황을 확인하며 천천히 타르난으로 이동했다.
* * *
오전 8시 반, 시청 건물.
제법 규모가 되는 한 회의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주명희, 이철, 마이크를 비롯한 각 대형 교파의 현지 담당자들과 사냥꾼 길드 회장 고부겸, 로봇 경비대 대장 게네바, 백용명 팀, 그리고 전하얀 팀까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등 무심자에 관련한 경험을 공유하고 그를 처리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모두가 이곳에 모였다.
머리 절반이 번득이는 금속으로 이뤄진 백용명은 팀을 대표해 산에 들어간 후에 있었던 일들과 그들이 발견한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미 그 소식을 들었던 게네바는 재차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편히 잠들었으면 좋겠군.”
조용히 중얼거린 그가 곧 구조팀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너희들도 환각에 여러 차례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맞아.”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게네바의 슬픔과 침통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기론 지능 로봇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지 않았다. 그들의 메인 프로그램, 혹은 핵심 모듈엔 분명 백업이 있을 테니 나중에라도 부품을 찾아 다시 조립만 하면 됐다. 다시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이 그런 질문을 하기 알맞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간단히 설명할게.”
장목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이미 열려 있던 전술 배낭에서 확성기를 꺼내 팀장에게 내밀었다.
“⋯⋯.”
장목화는 뜬금없는 상황에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여기 음향 효과는 상당히 좋아. 그런 건 필요 없어.”
게네바도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회의실 테이블에 마이크도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게 장목화의 자리에선 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성건우가 확성기를 다시 집어넣자, 장목화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짜 백용명 팀, 사망 체험, 강소월의 투신 등의 환각을 묘사했다.
용여홍 혼자 겪은 환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그저 비슷한 사례를 꾸며내서 말했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그에 대한 방안을 세우는 것이지, 굳이 있던 일을 그대로, 상세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 사례가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강소월⋯⋯.”
백용명, 임단아, 레이, 장세붕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장목화는 주명희에게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그 고등 무심자가 강소월의 투신을 환각으로 보여준 이유는 잘 모르는 듯했다.
붉은 가운을 입은 이철과 앞치마를 매지 않은 마이크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게네바가 대본을 읽는 듯한 투로 이야기했다.
“강소월, 구세계 유명 아이돌, 중년 유부남 부호 채명덕과 데이트했다는 이유로 커리어에 큰 타격을 받고 본인 집에서 투신하여 자살⋯⋯.”
‘이게 대체⋯⋯.’
모두가 줄줄 이어지는 게네바의 말에 혼란스러워했다.
이내 게네바가 ‘아이돌’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설명했다.
성건우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이번엔 그도 손뼉을 치는 대신, 두 손을 깍지껴 쥐고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비극이었네요.”
장목화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머신 헤븐엔 구세계의 데이터가 적잖게 보존돼있는 모양이었다. 게네바는 내부에 장착된, 혹은 무선으로 연결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강소월과 관련된 자료를 찾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아는 정보가 되게 많겠는데?’
장목화는 소스 브레인과의 대화에 더욱 큰 기대가 생겼다.
이어, 주명희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게 정말로 있던 일이군요⋯⋯. 저는 구세계 어느 드라마의 내용일 줄 알았어요. 그 고등 무심자가 병을 앓기 전에 가장 즐겨봤던 드라마요.”
‘드라마⋯⋯. 주 관주님, 여관 사장님과 꽤 잘 통하실 것 같네요. 진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돌아서자마자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겠지만.’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임단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그 고등 무심자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모르겠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
게네바가 솔직하게 답했다.
곧이어, 장목화가 바로 대꾸했다.
“게네바 시장, 혹시 강소월에 관한 모든 자료를 복사해서 줄 수 있어? 그 안에 혹시 유용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보고 싶어서. 만약 그 고등 무심자의 집념을 해소한다면 그자도 타르난을 포기할지 몰라.”
게네바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목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러지. 우리도 상응하는 데이터 분석을 진행할 거다.”
“우리한테도 복사본을 줘.”
백용명이 요구했다.
주명희를 비롯해 나머지도 이에 가담했다. 방금 교류를 통해 그 고등 무심자가 타르난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가 만들어낸 환각 속 각종 상황을 통해 단서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게네바도 이들의 요구에 빠짐없이 응했다.
이윽고 주명희와 이철을 비롯한 이들까지 각자가 겪은 상황에 대한 설명을 다 마치자, 게네바가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지금으로서는 방어 위주의 책략으로 목표가 타르난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지. 이젠 신룡교의 전문가, 혹은 우리 머신 헤븐의 지원군이 와서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꿈 보호자⋯⋯.”
주명희가 작은 목소리로 게네바의 말을 바로잡았다. 꿈 보호자는 무슨 전문가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네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래, 환각과 꿈을 처리하는 전문가.”
“네, 길어도 사흘 안에 도착할 겁니다.”
주명희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어디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겠는가?
* * *
세린 드림 여관.
점심나절까지 자고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나니, 보조 로봇 여러 대가 구조팀을 찾아왔다. 두 다리를 바퀴로 바꾼 로봇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를 221호로 직접 옮겨주었다.
장목화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 많다고?”
“예. 게네바 시장님께서 중복되는 데이터는 이미 다 제거하셨습니다.”
대열을 이끄는 수장 보조 로봇이 또렷한 전자합성음으로 답했다.
‘거실이 다 찰 것 같은데.’
용여홍은 구세계 아이돌과 관련한 자료가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대한 것보다, 종이 낭비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다.
애쉬랜드에서는 타르난과 같은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면 종이 역시 사치스러운 자원이었다. 생산을 위해 필요한 중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게네바에게 우리한테도 컴퓨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걸 잊었네.”
보조 로봇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일찍 말씀해주시지⋯⋯.”
“아니, 아무리 말을 안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 수고를 하느니 차라리 우리한테 작업용 컴퓨터 몇 대를 빌려주는 게 더 쉽지 않았을까?”
장목화가 대꾸했다.
보조 로봇의 수장은 곧장 또 말을 받았다.
“복사해 달라고 요구하셔서 그 요구에 따른 것뿐입니다.”
“그거야 관용적인 표현이지. 우리한테 확인이라도 한 번 했다면⋯⋯.”
장목화는 순간 말을 하다가 도중에 멈춰버렸다.
‘내가 왜 로봇이랑 말다툼하고 있는 거지?’
뒤이어, 수장 로봇이 말했다.
“저희에게 그런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전자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좋아.”
장목화도 컴퓨터로 자료를 다루는 게 더 편할 거라 생각했다.
그 후 구조팀은 종이로 인쇄된 자료를 뒤적거리거나, 전자 데이터를 검색하며 구세계 아이돌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치 있는 내용을 찾으려 애썼다.
“강소월, 죽은 게 아니네요.”
자료를 읽던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의 시선은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세 사람은 아직 강소월의 초기 경력을 살피던 단계였다.
“건물에서 투신한 후 현장에서 사망한 게 아니라,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수술을 받았어요. 그렇게 목숨은 건졌지만, 식물인간이 됐고요.”
백새벽이 확인한 기사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장목화는 바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검색을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에, 곧 해당 내용이 떠올랐다.
「강소월 응급 수술 실패, 식물인간이 될 수도」
「주치의, 강소월이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밝혀⋯⋯」
「강소월의 부모는 외국 의료 기구에 도움을 요청⋯⋯」
「3년 동안 잠들어있던 국민 연인, 과연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장목화가 기사들을 살피는 동안,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식물인간이 되다니.”
식물인간⋯⋯. 묘한 기시감을 느낀 듯, 장목화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됐대요?”
돌연 성건우가 던진 질문에, 장목화가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네가 찾아보면 되잖아.”
거의 반사적으로 대꾸한 그녀는 계속 강소월 사건의 결말을 검색했다. 강소월이 결국 깨어났는지, 아니면 그대로 천천히 죽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자료를 찾던 장목화는 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개인의 의견을 교류하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업로드된 글이었다.
「믿을 만한 소식인데, 강소월 부모가 지원 합의서에 서명했대. 북방의 한 병원으로 옮겨서 실험적인 치료를 받게 한다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깨어나게 하려고⋯⋯」
‘지원 합의서⋯⋯. 병원⋯⋯, 식물인간⋯⋯. 실험적인 치료⋯⋯.’
장목화의 눈은 계속 중요 단어를 반복해서 훑었다.
그때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 그 병력 기억해? 철강공장 폐허에서 발견했던 그거!”
그 병력은 방민서라는 한 여성의 것이었다. 문서엔 그녀가 최근 아들의 인영을 목격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들은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후 지원자로 북쪽 모처에서 실험적인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나와 있었다.
강소월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둘이 연관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목화의 몸이 약하게 떨려왔다. 머리도 조금씩 저릿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