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70화 (270/649)

270화. 기이한 환각

태양이 다시 지평선 위로 떠올랐을 무렵, 타르난 쪽에서 한 로봇 경비대원이 보조형 전투 로봇들 여러 대와 함께 다가왔다.

이제 오늘 하루는 그들이 이곳을 지킬 차례였다.

교대를 마치고,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먼저 차에 올라 지프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성건우가 로봇 경비대원을 향해 말했다.

“봐봐. 넌 남자야. 나도 남자지. 너한테는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이 있고, 나한테도 그런 대상이 있어. 그러니까⋯⋯.”

‘하, 로봇한테 추리 광대 능력을 써서 뭐 하려고?’

용여홍이 막 이런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던 로봇 경비대원과 보조 로봇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음 순간, 그는 그가 몰던 지프가 타르난 쪽이 아닌 지뢰가 가장 많이 매설된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용여홍은 멍한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새카맸다. 팻말과 거울 쪽을 비추는 전구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환각이야.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게⋯⋯. 건우 저 녀석이 집착이 강한 편이라 망정이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용여홍은 죽음을 겨우 면했다는 생각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백새벽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장목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 환각은 특히 더 대단하네. 우리의 시간 감각까지 영향을 미쳤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성건우를 발견했다.

“왜? 무슨 생각해?”

성건우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그와 친구가 됐는지에 대해서요.”

장목화가 말했다.

“음, 나도 모르겠네. 그 고등 무심자가 조금 전 네가 추리 광대 능력을 사용한 대상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난 솔직히 방금 네 능력이 효과를 발휘해서 환각을 깨뜨렸다는 것도 뜻밖인데.”

환각의 호환은 의식이 있는 인공지능 메커니즘과 비슷했다. 성건우도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경험한 적이 없었고, 장목화 역시 추측만 할 뿐이라 한계가 있었다.

곧이어 용여홍이 말했다.

“친구가 될 필요는 없잖아. 우릴 노리지 못하게 하는 것만도 충분해.”

‘건우가 그렇게 강력한 고등 무심자랑 친구가 되면 어떻게 될까? 타르난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괴롭히고 싶은 사람들은 모조리 다 괴롭히고, 부리고 싶은 장난이란 장난은 다 부리고 다니는 거 아냐?’

조금 전 팀원들 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지린 사건은 용여홍에게 어느 정도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러기를 빌자고. 계속해서 경계하자.”

캄캄한 밤을 비추는 전구 불빛 아래, 장목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성건우는 그 말에 약간 실망한 듯 지프에 몸을 기댔다.

1분 1초, 시간이 흘러가던 도중,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좀 봐봐.”

구조팀은 계획대로 ‘세 번 생각한 뒤에 행동하기’라는 강령에 맞춰 백새벽이 감시하고 있던 구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어느새 그렇게 높지는 않은 빌딩 여러 채가 나타나 있었다. 구세계에선 클러스터, 혹은 블록이라고 불렸을 법한 빌딩 무리가 숲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사방이 어둑한 밤이라 그 모든 건물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유리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 하나하나가 다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것도, 환각이겠지?”

“환각이 아니라면 단 몇 초 사이에 이런 빌딩 단지가 세워질 리 없지.”

장목화가 단호하게 답했다.

“꿈일 수도 있죠.”

성건우가 그녀의 말을 보완해 주었다.

다들 전방에 자리한 빌딩 단지가 타르난에 속한 게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건물들은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장목화는 그 고요한 빌딩 단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고등 무심자는 왜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환각을 만든 걸까?”

성건우도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한테 인사하려는 걸까요? 절 이미 친구로 여기는 건 아닐까요?”

장목화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사이 백새벽이 성건우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럴지도.”

백새벽도 신묘한 추리 광대 능력을 직접 보고 경험한 적이 있었다.

성건우는 더더욱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그럼 어떻게 호응해야 하지?”

“일단 지켜보자.”

장목화가 일단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빌딩 단지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다. 고요한 호수 위의 돛단배처럼, 딱 하나의 유리창에선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얌전히 노란 불빛을 내는 유리창은 꼭 밤하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별 같았다.

장목화는 이 상황의 의미를 추측해 보려 애썼다.

“그 고등 무심자는 우리가 저 방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걸까?”

성건우가 바로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 우리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은가 봐요!”

“가만히 있어. 이렇게 간단한 환각에 끌려 지뢰를 밟는다면, 난 네 묘비에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쓸 거야.”

장목화가 즉각 나서서 성건우의 의욕을 꺾었다. 구조팀 주위론 상당한 지뢰와 함정이 설치돼 있었고, 환각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는 방향과 거리에 큰 오차가 생기기 쉬웠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대꾸한 성건우가 고개를 돌려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용여홍이 그를 잔뜩 경계하며 외쳤다.

“왜! 뭐! 정탐꾼이 필요한 거라면 네가 직접 해!”

“좋아!”

성건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지만 결국 장목화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하, 이런 수법도 있었다고?’

용여홍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는 와중, 까만 밤하늘 아래 빌딩 단지가 더욱 커지며 구조팀과의 거리를 대폭 좁히고, 어느새 네 사람은 빌딩 단지 안에 이르러 있었다. 유일하게 등불이 밝혀진, 그 방이 있는 건물 아래였다.

“진짜 열정적이네⋯⋯. 참 안타까워. 그 무고한 사람들, 그 수많은 사람만 안 해쳤다면 정말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감탄하던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텐 진짜 한계라는 것도 없는 거냐?’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직접 경고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마. 우리가 저기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알아서 들여보내 줄 거고, 우리가 봐야 할 게 있다면 나서서 보여주려 할 테니까.”

“네.”

용여홍도 팀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 * *

장목화의 말은 빠르게 실현됐다. 네 사람은 곧장 그 건물로 전송되었다. 꼭 투명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건물 꼭대기 층, 11층에 이르렀다.

이 층에 자리한 집은 하나뿐이었는데, 그 집으로 통하는 주홍색 문은 넓고도 길었다.

그리고 저기, 복도 높은 곳에 난 창문에선 미약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 아래, 알 수 없는 인영들이 비췄다. 전부 인간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람들. 차림은 각기 달라도 그들은 전부 구세계 옷을 입고 있었다.

다들 미친 사람들 같았다. 주홍색 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틈을 통해 집 안의 광경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용여홍이 멍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뭐 하는 거죠?”

“그 고등 무심자의 잠재의식 속에 광기 어린 본능을 표현하는 건가?”

장목화는 최대한 심리학적 각도에서 이 상황을 해석해보려 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색했다.

“아니에요, 이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죠.”

스르륵-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사람은 주홍 문을 관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한 쌍, 한 쌍의 눈이 문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구조팀 네 사람은 이제 더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엄청나게 넓은 이 거실 너머 통창에, 수많은 얼굴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통창에도 그 얼굴들은 선명히 비쳤다.

왜곡된 표정과 동시에, 그들의 눈에선 미지의 빛이 번득였다. 창밖에 꼭 단상이라도 설치된 모양이었다. 그곳에 가득 모인 이들은 창문을 통해 집 안의 광경을 훔쳐보려 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 활짝 열린 창문 난간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녀린 여자였다. 그러나 헝클어진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까닭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그녀는 흐느끼며 같은 말만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야.”

성건우가 답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 답을 듣지 못하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성건우는 황급히 다가가 손을 뻗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허공으로 몸을 던진 여자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 사이 이것이 환각임을 알고 있던 장목화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야에는 곧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태블릿 PC가 들어왔다.

켜져 있는 태블릿 PC에는 사진과 글이 떠 있었다.

모자를 쓴 여자가 차에 오르는 사진이었다.

「인기 아이돌 강소월, 중년 부호와 여행」

팍!

창밖으로 뛰어내린 여자는 바닥과 세차게 충돌했다.

순간 이 환각은 왜곡되기 시작했고, 구조팀 네 사람은 동시에 회오리에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곧이어 네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생명을 집어삼킬 어둠을 마주한 것 같았다.

그들의 의식 역시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 * *

“헉⋯⋯!”

몸부림을 치듯 깨어난 장목화가 여전히 지프 옆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위는 캄캄했다. 팻말과 거울의 전구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성건우를 바라본 그녀는 막 자신을 흔들려고 했던 그의 두 손을 발견했다.

“환각에서 벗어난 거야?”

장목화가 질문하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새벽을 깨우려 다가갔다.

“네.”

성건우 역시 몸을 들어 용여홍을 흔들기 시작했다.

금세 정신을 차린 용여홍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로부터 몇 초 후에야 그 현기증의 근원을 파악했다.

“야야야, 그만! 그만 흔들어!”

“깼어?”

성건우가 퍽 아쉽다는 듯 물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방법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눈치였다.

용여홍은 아찔한 머리를 손으로 잡고서 답했다.

“그래.”

다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한 장목화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방금 그 환각이 의미하는 건 뭘까?”

“구세계의 장면일 거예요. 그 고등 무심자와 인기 아이돌이라나 뭐라나 하는 강소월이 무슨 관계일까요?”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너도 컴퓨터에 뜬 기사 본 거야? 근데 그 고등 무심자, 한 8~90살 정도 됐으려나?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음, 여태까지 고등 무심자가 그렇게까지 장수한 전례는 없었잖아. 기껏해야 일반적인 무심자보다 조금 더 오래 살 뿐이지. 어, 수종이는 빼고.”

장목화가 답했다.

인간이 무심자가 되면 생존 환경과 몸 상태 등 각 방면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에 수명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가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자,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어쩌면 강소월의 아들인지도 몰라요.”

“⋯⋯그럼 그자가 타르난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지?”

장목화가 물었다.

성건우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여긴 강소월의 고향이자, 그가 자랐던 곳이죠.”

“⋯⋯하마터면 믿을 뻔했네. 어인과 산 요괴, 늪 1호 폐허의 무심자들한테 영감을 얻은 거냐?”

장목화가 웃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용여홍이 웬일로 성건우의 의견을 지지했다.

하지만 장목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공교롭잖아.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 대부분이 다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을 리는 없을 거 아냐, 안 그래?”

워낙 단서가 부족한 상황이라 용여홍과 백새벽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격렬한 토론을 거친 뒤, 구조팀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고 각 대형 교파와 머신 헤븐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기로 했다.

남가관의 관주 주명희라면 뭔가를 분석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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