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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269화 (269/649)

269화. 치명적인 체험 (2)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둠은 서서히 한 줄기 틈을 내며 갈라졌다.

그 틈새로 찬란한 빛이 쏟아지며, 성건우도 눈을 번쩍 떴다.

성건우의 시야로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의 걱정 어린 얼굴이 비쳤다.

“무슨 일 있었어?”

장목화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건우는 조금 전 전신 경련이 일어났었다. 동시에 그의 생물 전기 신호마저 혼란스러워져서, 지금 성건우의 이마는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환각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가위 말이 그립네요. 녀석의 실제적인 꿈이 환각으로 경험한 죽음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는데.”

진지하게 답한 성건우가 아쉽다는 얼굴로 마무리 지었다.

“어떻게 죽었는데?”

용여홍이 어렴풋하게 추측하며 물었다.

성건우는 조금 전 체험을 설명하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 고등 무심자는 실제로 죽어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죽는 느낌까지 흉내 내진 못하나 봐.”

장목화가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 실제적인 꿈은 네 의식과 직접 연관된 것이라 그 영향이 더 클 수밖에 없지. 음, 어쨌든 이렇게 환각을 이용하는 것과 실제적인 꿈은 상당히 흡사해. 에이돌른 영역의 두려움과도 매우 비슷하고. 쇼크사하지 않도록 단단히 대비해야겠어.”

용여홍은 재차 불안해졌다. 그 고등 무심자는 여태 마주했던 적 중 가장 강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은 그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계속 이렇게 수동적으로 나갈 수는 없어요.”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래. 5번 방안.”

“네.”

성건우는 곧장 지프차 위에 올려둔 확성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코를 킁킁거리며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네가 오줌 싼 건 환각이 아니었네.”

“⋯⋯꺼지라고!”

용여홍이 발칵 화를 냈다. 물론 그 덕분에 두려움도 적잖게 달아났다.

피식 웃던 성건우가 확성기를 들고 치랄 산으로 이어진 길을 향해 섰다.

레드스톤 마켓의 도제훈이 그랬듯, 확성기를 이용해 추리 광대 능력의 영향 범위를 넓히는 것. 이는 그들이 세워둔 여러 방안 중 하나였다.

그 고등 무심자가 야수에 더 가까운 존재라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추리 광대 능력은 결국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환각으로 만난 백용명 팀과 대화를 나눈 경험으로, 적이 어느 정도는, 혹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선 지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성건우의 능력에도 영향을 받게 될 터였다.

진짜 백용명 팀이 이곳을 떠난 후, 구조팀 네 사람은 한 차례 상의 끝에 이 방안을 마련했다. 물론, 이 방법이 과연 최종적으로 효과를 발휘할지는 장목화도 확신할 순 없었다.

‘건우가 고등 무심자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좀 평이한 말을 잘 골라서 했으면 좋겠는데.’

장목화는 기대를 안고, 자신도 성건우를 위해 적절한 말을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때, 입 앞에 확성기를 가져다 댄 성건우가 목청을 높였다.

“아우우우!”

‘이 울부짖는 소리가 과연 고등 무심자에게 영향을 미칠까?’

용여홍도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멍청한 얼굴로 친구 성건우만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쟤 지금 무심자랑 야생 동물 언어로 소통하려는 건가? 아니……. 그래서 다음은 어떡할 건데? 네가 야생 동물 언어를 알아?’

장목화도 몇 초 공을 들인 끝에 겨우 경련하던 입꼬리를 멈췄다.

성건우는 처음부터 지금껏 그녀의 예상 범위에 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이론적으로 보면 성건우의 행동도 나름 타당했다. 야생 동물이라고 아예 지능도 없이 오직 본능만 따라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포효나 행동, 꼬리 상태 등으로 비슷한 생물과 일정 정도 소통을 했다.

협동은 야생 동물들 집단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현상이었다. 야생 동물도 그럴진대, 무심병에 걸려 지능만 낮아졌을 뿐인 인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무심자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방식으로 소통해야, 추리 광대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까지 무심자 집단의 교류와 협동을 깊이 연구하고, 그들의 각기 다른 포효와 몸짓 언어의 의미를 파악한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출현한 지도 얼마 안 된 그런 집단이 자체적인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늪 1호 폐허에 있었을 당시 그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다곤 하지만, 그건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수종이라는 아이의 영향 아래 형성된, 절대 보편화될 수 없는 특별한 일례일 뿐이었다.

또한 그 고등 무심자가 병을 앓게 된 후 줄곧 홀로 지내왔다면, 자체적으로 본인만의 야수어와 몸짓 언어를 형성했을 리도 없었다.

즉, 성건우가 무심어를 파악했든 파악하지 못했든, 상대가 방금 내지른 포효를 알아들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소용없어, 소용없는 짓이야.’

장목화가 막 이러한 생각을 떠올린 순간, 성건우가 말을 이었다.

“저항하면 엄하게 처리하고, 자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할 것이다. 망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여라.”

그는 확성기를 쥔 채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여러 번 이 말을 반복했지만, 자수하러 나오는 생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에 잠겼나 싶던 성건우는 이만하면 다 놀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확성기를 들었다.

이내 성건우가 재차 노리고 있는 상대에게 말했다.

“봐봐. 넌 남자야. 나도 남자지. 너한테는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이 있고, 나한테도 그런 대상이 있어. 그러니까⋯⋯.”

성건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이후, 산골짜기는 다시 적막해졌다. 성건우는 방향을 바꿔가며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안 되는 모양이네⋯⋯.”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죠. 이것 또한 허상이고 꿈일 뿐이니까요.”

성건우는 능숙하게 신룡교 교도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로 대꾸하더니 마지막으로 신룡교의 이념까지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욱 효과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런 짓이 효과가 있었다면 우린 벌써 환각에서 깨어났을걸.”

장목화의 반박은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제 말은, 제가 방금 했던 말들이 전부 팀장님의 환각이라는 거예요. 사실 저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요.”

성건우가 팽팽하게 맞섰다.

그냥 장목화는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용여홍, 백새벽과 다른 방안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가짜 백용명과 이야기할 때 그를 놀릴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그 말에 흠칫 놀란 장목화는 문득 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직접 확인하려는 듯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랑 대화한 가짜 백용명을 연기했던 건 누굴까?”

“당연히 그 고등 무심자겠죠.”

용여홍은 팀장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이에 관해 이야기도 나눈 바 있었다. 환각에 놀라 경계심을 잔뜩 드높이고 있던 그는 과거 재현 환각에 빠진 건 아닌가,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

이내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 가짜 백용명 팀은 전부 고등 무심자가 흉내 낸 거야. 근데 그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할지, 무슨 얘기를 할지까진 예상치 못했지. 특히 건우처럼 공인된 정신질환자의 존재에 대해선 더더욱.

고등 무심자가 당시 만들어낸 환각은 묻는 말에 답도 잘했고, 표정도, 반응도 지극히 정상적이었어. 사적인 부분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점만 제하면 실제랑 다를 것도 없었지. 이게 과연 지능이라고는 없이, 오직 야수로서의 본능만 남아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일까?”

환각을 구현하는 건 일종의 기술이었다.

곧이어 용여홍이 장목화가 했던 이야기를 언급했다.

“팀장님, 팀장님은 그때 그 고등 무심자의 잠재의식이 인공지능 상태와 비슷하다고 판단하셨죠. 외부로부터 신호를 수집하고 거대한 메모리 창고에서 필요한 반응을 뽑아내는 것 같다고요.”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환각 속의 그는 더 인간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라고요.”

장목화가 웃었다.

“그래.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와 환각 속 가짜 인물의 대화가 그 고등 무심자와의 교류와 다르지 않다는 거지.”

용여홍이 고심 끝에 답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죠.”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환각 속 가짜 인물은 그의 의식 중 일부랑 같아. 게다가 그것과는 소통도 가능하고. 말하자면 이건 대형 데이터베이스에 기반을 둔 소통인 거야. 어쨌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백새벽이 모종의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팀장님, 그러니까 팀장님 말씀은 건우가 가짜 인물과 대화를 통해 고등 무심자에게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가요?”

연이어, 용여홍이 성건우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인공지능에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요? 건우가 그랬잖아요. 게네바를 비롯한 지능 로봇에게선 의식을 느낄 수 없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요.”

장목화가 다시 웃었다.

“근데 네가 그랬잖아. 게네바 같은 지능 로봇에는 의식이 없지만, 그 고등 무심자한테는 있다고. 대부분 조건은 이미 다 갖춰져 있어. 고등 무심자가 건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느냐, 그 조건만 빠졌지. 내 생각에 이 방법은 가능성이 좀 큰 것 같아. 그러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

줄곧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성건우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제 뜻이에요.”

“얼씨구, 네가 팀장 하셔도 되겠네요.”

장목화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성건우는 곧장 고개를 틀어 용여홍을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너 아직 바지 안 갈아입었냐?”

용여홍의 얼굴이 불타듯 달아오른 것을 보고, 장목화가 나섰다.

“그냥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다, 내가 바지를 갈아입지 않은 것도 네 환각이야, 라고 받아쳐야지.”

‘근데 정말로 축축하고 기분이 안 좋은데요⋯⋯.’

황급히 전술 배낭에서 다른 바지를 꺼낸 용여홍은 지프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금방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 고등 무심자는 왜 자꾸 우리만 노리는 걸까요? 주 관주가 있는 곳으로는 가지도 않고, 계속 우리한테만 능력을 발휘하고 있잖아요.”

장목화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그 사이 백새벽은 본인 관점에 비춰 그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우리를 가장 약한 존재로 평가했는지도 모르지. 이곳이 가장 뚫기에 적합한 길목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장목화가 자조하듯 웃었다.

“거참 슬픈데. 다른 곳에선 교파 사람들과 로봇이 힘을 합쳤잖아. 깨진 거울, 작열하는 문, 황금 저울 등의 달지기가 그를 위협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구나.”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다 큼지막한 흰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더니 지프차 차창에 대고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용여홍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쪽을 몇 번 힐끔거렸으나 성건우의 몸에 가려진 탓에 내용이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뒤 펜을 거둔 성건우가 종이를 치랄 산과 마주한 차 문에 끼웠다.

흰 종이엔 간략화된 갓난아이, 이목구비가 없는 사람의 얼굴, 첨탑, 한 쌍의 눈 같은 태양, 문짝이 달린 용광로, 문 뒤의 그늘 속에 숨은 여자, 용, 그리고 저울이 그려져 있었다.

“이러면 안전할 겁니다.”

성건우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용여홍은 묵묵히 그 그림들 수를 세어 보았다. 흰 종이를 채운 달지기의 성휘는 무려 여덟 개나 되었다.

장목화는 당연히 이런 방법이 효력을 발휘하리라 믿지 않았지만,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내 백새벽은 합리적인 각도에서 성건우가 그린 그림을 평가했다.

“어떤 달지기와 교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용납하지 않고 첨예하게 갈등한다던데.”

“상황이 상황이니 달지기님들도 이해해 주실 거야.”

성건우는 몹시도 신실한 얼굴로 달지기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 그림이 정말 효과가 있던 것인지, 아니면 고등 무심자가 이미 다른 돌파구를 노리러 간 것인지, 하루의 말미까지 구조팀은 더 이상 그 어떤 환각도 경험하지 않았다.

용여홍은 정말로 기뻤다. 자신이라면 사망 체험과 같은 그 끔찍한 환각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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