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재등장
각자 정해진 자리에 이른 네 사람은 수시로 한담을 나눴다.
한담에는 좀 이상한 질문과 답도 출몰했다.
“마지막으로 이불에 지도를 그린 게 언제야?”
“다섯 살⋯⋯.”
하지만 이러한 문답은 꼭 용여홍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가 진짜 친구인지 확인하려는 성건우만의 방법이었다.
장목화는 이전의 경험과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통해, 그 고등 무심자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목표의 기억이나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니 만약 동료가 환각으로 변한다면 개인적인 질문은 전혀 답하지 못할 것이었다. 설령 질문자가 상대의 답을 환청으로 듣더라도 그 답은 정확하지 않을 터였다.
악의적인 접근을 막으려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성건우는 용여홍에게 할 질문을 무려 백 개나 준비해뒀다.
* * *
태양이 뉘엿뉘엿 서쪽으로 떠나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시간이 되자 장목화는 저녁에 하려고 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산 쪽에서 온 한 차가 구조팀이 지키는 길목에 이르렀다. 강철판을 댄 짙은 남색 자동차는 섀시도 높은데다 바퀴도 컸다.
성건우는 바로 확성기를 들어 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데?”
차 안에 있던 이들은 흠칫 놀라며 상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몇 초 후, 열린 차 문으로 네 사람이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이는 오른쪽 머리 절반이 은백색 금속으로 번득이는 한 남자였다. 이마엔 불규칙한 파편도 박혀 있었다.
또 온화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여자 구성원도 있었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기른 그녀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나머지 두 남자 중, 성건우와 키가 비슷한 한 사람은 구세계의 검은 사제복을 입고서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남자는 황토색 군복을 입고, 같은 디자인의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평범하게 생긴 애쉬랜드인이었지만 얼굴선은 꽤 또렷한 편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들은 바로 치랄 산 수원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유적 사냥꾼 팀이었다.
“여기론 갈 수 없는 건가?”
얼굴 절반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남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다른 확성기를 집어 들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 진위 여부를 판별하고 신분을 검증하기 위해서야. 그 고등 무심자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까 봐 설명도 덧붙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네 명의 유적 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다들 자신의 모습을 몇 초간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와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이 틈에 머리를 정리하기도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성건우가 확성기에 대고 물었다.
“백용명.”
머리 절반이 금속인,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이 난 남자가 목청을 높였다.
“임단아. 생물을 연구하고 있지.”
여자도 연이어 답했다.
‘공교롭네. 우리 회사 이름이 마침 반고 ‘바이오’인데.’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온화한 웃음의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도 이름을 밝혔다.
“레이.”
군복 차림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장세붕이다.”
다들 거울 앞에 당당히 선 것을 보고, 성건우가 장목화보다 앞서 물었다.
“치랄 산 구역 마지막 수원지에서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네 사람 중 백용명이 입을 열었다.
“타르난 주위 폐허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순간 용여홍의 눈빛이 굳었다.
구조팀은 애초에 저들과 대화한 적이 없었다. 저 팀에겐 그저 산 서남쪽 구역에 고등 무심자가 나타났다는, 짧은 경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용여홍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돌격 소총을 들고, 맞은편 유적 사냥꾼 팀을 겨눴다.
“진정해.”
장목화가 즉각 용여홍의 과잉 반응을 저지했다.
그 사이 성건우는 확성기에 대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때 어느 폐허 도시에 대해 얘기했더라? 어떤 자세였지? 물구나무선 상태? 아니면 옆으로 누운 상태?”
산악 자동차 옆에 선 네 명의 유적 사냥꾼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적 사냥꾼들의 인영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자동차 역시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진짜 환각이었어!”
용여홍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유적 사냥꾼팀의 환영은 생동감이 넘쳤다. 동작, 말, 표정, 반응, 할 것 없이 실제와 다른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구조팀이 사전에 중요 정보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양쪽 모두가 잘 아는 사실로 상대의 신분을 검증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깜박 속아 넘어갔을 게 분명했다.
이때,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물 전기 신호가 있어⋯⋯.”
“설마 저게 실제라는 거에요?”
용여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동시에 그는 비로소 장목화가 자신을 저지한 이유를 깨달았다. 저 유적 사냥꾼팀은 정말 실제 있는 존재인데, 환청으로 잘못된 답을 듣고 오해한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곧바로 총을 쐈더라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발발한 갈등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을 터였다. 생각만 해도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분 검증으론 그 답만 참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사람이 진짜 존재하는 사람인지까진 판단할 수 없었다. 정답을 말했다면 당연히 실제 존재겠지만, 오답을 말했다 해도 허상이라 단언할 수는 없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없어.”
용여홍의 얼굴에 떠오른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성건우는 그를 위해 확성기에다 대고 직접 설명해주었다. 성건우의 얼굴은 매우 침통했다.
“정보가 샌 거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용여홍이 화들짝 놀랐다.
‘그 고등 무심자는 야수에 더 가깝다고 하지 않았나? 그자가 아직도 진화 중이라는 건가?’
“팀장님, 그러니까 그 고등 무심자가 어젯밤 사건을 겪고 생물 전기 신호까지 환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는 건가요?”
용여홍의 물음에, 장목화가 잠시 고민 끝에 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아주 적어. 난 어젯밤 그 능력을 그자를 위협하는 게 아니고 경계하는 데에만 썼거든. 내가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 리는 없을 거야.”
이때 백새벽이 의견을 제시했다.
“어쩌면 그 고등 무심자는 환각을 만들어낼 때 원판을 참고로 하는 건지도 몰라요.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환각도 인간의 의식을 갖고, 생물 전기 신호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환각 역시 전기 신호를 갖는 거죠.”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성건우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는 건 거의 처음이라, 백새벽은 왠지 좀 불편해졌다. 동시에 평소 팀장이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왜 그렇게 짜증스러워했던 건지도 이해가 갔다.
곧이어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훌륭해. 참고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커. 그 의미는 모르고 외형만 흉내 낸 거지. 어쨌든 환각에 있어 그의 능력은 주 관주보다 훨씬 강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 연유는, 주명희의 환각엔 인간의 의식도, 전기 신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장목화가 덧붙였다.
“앞으로는 그가 자기 흔적을 숨길 때 의도적으로 생물 전기 신호를 왜곡시킬지 살펴야겠어.”
장목화는 조금 전의 상황으로, 미약한 전기 신호 감지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산 쪽에서 다시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났다.
짙은 남색에 방탄 철판을 덧댄, 높은 섀시와 커다란 바퀴…….
백용명 팀이 모는 산악 자동차, 그 차가 재등장한 것이었다.
진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등장에 용여홍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는 야간 투시경을 쓰고 있지만, 아무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은 저녁 무렵이긴 해도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야간 투시경은 필요 없었다. 용여홍도 보조 설비의 특정 기능만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멋들어진 산악 자동차는 알아서 두 개의 전신 거울 앞에 멈춰 섰다.
성건우는 바로 확성기를 들고 열정적인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백용명, 임단아, 레이, 장세붕.”
“왜 저 사람들 이름을 다 한 번씩 부르는 거야?”
용여홍이 못 참고 질문하자, 성건우가 확성기를 내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예의잖아.”
“근데 그 이름들, 진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이번엔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한 방 먹였다.
성건우는 재빨리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어디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어요?”
이때, 머리 절반을 기계로 개조한 백용명이 의아한 얼굴로 하차했다.
“우리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러자 성건우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대사를 뱉었다.
“도인에게는 신묘한 지략과 기묘한 계책이 있는 법.”
장목화는 얼른 설명에 나섰다.
“방금 너희들이 여기에 왔었거든.”
“그 고등 무심자가 우리 환영을 만들어냈다는 건가?”
온화해 보이는 임단아도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내린 레이와 장세붕은 무기를 쥔 채 사방을 경계했다.
장목화가 확성기에 대고 답했다.
“그래, 다행히 우리가 전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질문해봤어.”
그 말에, 백용명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희도 정보를 적잖게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네.”
백용명은 상대가 환각 능력을 가진 고등 무심자의 특징을 인지하고 신분 검증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그 사실을 충분히 짐작해냈다.
“녀석이 어젯밤 타르난을 습격했어. 너희도 신분 검증 절차에 좀 따라줬으면 좋겠는데.”
장목화가 간단히 설명한 뒤 덧붙였다.
“문제없지.”
임단아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확성기를 쥔 성건우가 전에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치랄 산 구역 수원지에서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지?”
백용명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화 같은 건 안 나눴는데? 너희들한테 산 서남쪽 구역에 고등 무심자가 출몰했다는 사실만 알려줬었잖아.”
“축하해, 정답이야!”
성건우가 확성기에 대고 답했다.
상대와 이렇게 멀리 있지 않다면, 중간에 지뢰 여러 개와 쇠못이 박힌 함정만 없었더라면 당장 달려가 그들과 한 명씩 악수라도 했을 기세였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장목화가 물었다.
“최근 너희들끼리 신분 검증을 한 건 언제야?”
곧장 칼을 등에 멘 백용명은 오른쪽 눈으로 기이한 자홍색 빛을 번득이며 인내심 있게 답했다.
“1시간 전, 그 후엔 곧바로 차에 타서 한 번도 안 멈추고 달렸어.”
장목화가 다시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서로 신분 검증을 해줄 수 있을까? 그 후에 차례대로 거울 앞에 서줘.”
돌아선 백용명은 임단아와 레이, 장세붕과 따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는 금세 큰소리로 결과를 전달했다.
“문제없어.”
뒤이어 그들은 차례대로 두 개의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이 틈에 임단아와 레이는 자신들의 머리를 정리했다.
이 모습에, 용여홍은 머리가 저릿해졌다. 두 사람은 전에 고등 무심자가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했었다.
고등 무심자는 목표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세부적인 특징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지능이 없는 무심자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