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진지 구축
사냥꾼 길드 2층, 1번 방 밖.
장목화는 고동색 나무 문에 위아래로 걸린 두 거울을 보고 살짝 웃었다.
“하룻밤 새 타르난의 풍습이 많이 바뀐 것 같네.”
사람마다, 집마다 모두가 거울을 내걸고 있었다.
똑똑똑-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문 안쪽에서 고부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여전히 검은색 트위드 옷을 입은 왜소한 몸집의 남자는 은색 보온컵을 들고, 등받이 의자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구조팀 네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고부겸이 하얗고 성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웃었다.
“전에 자네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아서 다행이군. 안 그랬더라면 한 대 흠씬 얻어맞았을 테니.”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녀는 용여홍, 백새벽에게 고부겸과의 대화 중 중요한 부분만 전해 들었던 터라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질문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고부겸은 보온컵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자네들, 어젯밤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잖나. 환각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은 구역에 있었으면서도 멀쩡했고, 그 곁에 있던 수많은 이들까지 살렸지.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인가?”
구조팀은 전에 들린 타르난 종합 병원에서 구체적인 사상자 현황을 들었다. 산 여우 강도단을 제외하면, 총격을 당해 과다출혈로 죽은 주민 2명 외엔 전부 무사하다고 했다.
팀원 중 오로지 홀로 살아 돌아온 장아홉에 비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그게 회장님이 저희에게 얻어맞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성건우가 말했다. 그는 고부겸의 말에 담긴 칭찬의 뜻에 개의치도 않고 그 말의 의도만 캐묻고 있었다.
괜히 본인이 민망해진 용여홍이 헛기침을 하는 사이,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고부겸은 몇 초 후에야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냥 한 농담일세, 젊은이. 그렇게까지 깊이 파고들지 말라고.”
“그렇군요.”
성건우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이 틈을 타 웃으며 물었다.
“고 회장님처럼 대단하신 분이 어떻게 저희에게 얻어맞고만 계시겠어요?”
고부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평범한 사람이라네. 어젯밤에는 심지어 환각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어.”
이 대목에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애쉬랜드에 강력한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그렇다고 널린 건 아니야. 쉽게 막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와 모샤 그 할멈도 젊었을 때는 그래도 일반인들 중에선 꽤 잘 나가는 편이었다네. 경험으로 보나, 식견으로 보나, 사격 실력으로 보나, 신체 소질로 보나, 격투 기술로 보나, 모자람이 없었어. 덕분에 여태까지 목숨 부지하고 사냥꾼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지.
사실 우리도 다른 곳에 갔었다면 소리소문없이 죽었을지 몰라. 비교적 안전하고 주위 폐허 위험도 적은 편에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면 로봇 경비대가 나서는 타르난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고부겸이 보온컵에 든 물로 입을 한 번 더 적신 뒤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은 시절은 아니었어. 배불리 먹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지금처럼 어느 날 암거래로 유전자 개량액을 들여오거나 기계 팔을 이식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네들과는 애초부터 비교가 안 돼.”
구조팀 네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좋은 시절에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어려 있었다.
장목화는 그 말을 받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고 회장님, 회장님은 얼마 동안이나 유적 사냥꾼으로 지내신 건가요?”
고부겸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막 유적 사냥꾼 일을 시작했을 당시엔 사냥꾼 길드도 없었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장목화보다 먼저 나섰다.
“그럼 이두형이라는 사냥꾼을 알고 계시나요?”
성건우는 아주 태연해 보였다. 이 질문을 했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그의 질문에, 고부겸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건 왜 묻는 건가?”
“그냥 묻는 겁니다.”
성건우가 이렇게 답하자, 고부겸은 한 번 더 말문이 막혔다.
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성건우가 돌연 또 양손을 들어 올리고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덧붙였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어디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을까요?”
‘하, 요즘은 배운 걸 바로바로 써먹는 게 또 재밌나 보지?’
장목화는 성건우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고부겸이 이두형을 아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부겸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쓰읍, 자네, 혹시 깨진 거울 신도인가? 듣기로는 용광로 교파에 가입할 준비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현지 사냥꾼 길드 회장은 소식에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용광로 교파에 가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서, 신룡교의 특정 이념을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죠.”
성건우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래, 양쪽에서 성찬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용여홍이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고부겸은 곧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그럼 자네는 왜 신룡교에서 예를 차리는 방법까지 배우려는 건가?”
“말투 때문에요. 이런 말투를 배워놓으면 좋을 테니까요.”
성건우는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다.
고부겸은 이런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면 시간 낭비뿐 아니라 정신도 어디로 달아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현명하게 이 흐름을 끝내기로 했다.
“자네들이 말하는 이두형이 어느 이두형인지 모르겠군. 독특한 이름이라곤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본 이두형도 벌써 서너 명은 된다네.”
“골동품 학자를 자칭하고 다니는 자입니다. 검은색 머리를 길게 길렀고, 입가에 수염도 있죠.”
장목화가 이두형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했다.
고부겸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음, 그래, 자네 설명에 부합하는 자를 만난 적이 있네. 그자가 타르난에 와서 주위 폐허 도시를 탐색하던 때였어. 우리랑 대화도 몇 마디 나눴지. 근데 뭐, 이상한 데가 있던가? 내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 같던데. 외모도 준수하고, 교양도 있고, 남을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어.”
장목화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
“적어도 40년은 됐겠지⋯⋯.”
고부겸은 그 기억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듯 말끝을 살짝 흐렸다. 하지만 그 일이 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장목화는 그제야 고부겸이 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40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 그의 모습도 그때랑 똑같습니다.”
고부겸은 재차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당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거참 대단하군⋯⋯. 그자는 정말 평범했었어. 난 그자가 어떤 사물, 아니면 어떤 사건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네.”
네 사람 모두 이해가 안 된 듯한 표정에, 고부겸이 예를 하나 들었다.
“나 같은 쓰레기 사냥꾼은 막연한 생각만으로 폐허 도시로 향하곤 하네. 가치 있는 물건을 찾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는 거야. 근데 그자에겐 굉장히 분명한 목적이 있었어. 나도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지.”
‘쓰레기 사냥꾼이란 말은 남쪽 지역도 그렇고, 북쪽 지역에서도 통용되는 말이었네.’
용여홍이 웃었다. 지금의 그도 정식 쓰레기 사냥꾼이기 때문이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장목화가 답했다.
고부겸은 이두형과 그저 스쳐 지나듯 한 번 본 사이였기에, 더 이상의 정보를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이 대화는 빠르게 끝이 났다.
곧이어 고부겸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지도 하나를 꺼냈다.
상당히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자네들은 서북쪽 방면 길을 지켜주게. 거긴 산으로 곧장 통하는 길이야.”
* * *
타르난 서북쪽, 모비르 리버 옆, 치랄 산으로 통하는 갈림길.
이곳은 구산 산맥과 연결된,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수많은 물자를 요청한 구조팀은 빵빵하게 채운 지프를 끌고 이곳에 이르렀다.
하늘의 색을 살피고, 뒤쪽 도시를 한번 돌아보던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계획대로 배치해. 진지를 구축하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라고. 같은 진지라도 목표의 특성에 맞춰서 변화를 줄 줄 알아야 해. 융통성 없이 고정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야.”
“예, 팀장님!”
성건우가 큰소리로 답했다.
다음 순간, 전신 거울을 가지고 길목으로 신나게 내달린 그가 거울을 땅바닥에 꽂고서 돌로 고정했다.
용여홍도 비슷한 작업에 돌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갈림길이 전신 거울 여러 개로 둘러싸였다. 전부 다 바깥쪽으로 향해 있는 거울 사이론, 오직 타르난으로 통하는 길만 남았다.
“어째 좀 이상한데⋯⋯.”
총지휘를 맡은 장목화가 이를 보고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성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소개했다.
“팔문금광진(八門金光陣)입니다. 요괴를 제압하고, 악마를 항복시키고, 귀신을 없앨 수 있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런 이야기도 나와?”
그 진지한 답에 장목화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보통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라디오를 아예 듣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선별을 거쳤을 라디오 프로그램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터무니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여관 사장이 보던 귀신 영화를 좀 훔쳐봤어요.”
“그건 팔문금광진이 아니었는데⋯⋯.”
역시 그 영화를 몇 번 힐끔거렸던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문, 금광, 진이란 단어를 조합하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그냥 저 사람과 입씨름 해봤자 어차피 이길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용여홍은 지프 트렁크에서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렁크에서는 지뢰, 공병삽, 쇠못, 밧줄 등등 여러 물건이 나왔다.
장목화는 각기 다른 곳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저쪽엔 구덩이를 파서 사냥용 함정을 만들고 안에 쇠못을 넣어. 저쪽은 밧줄 두 개로 봉하고⋯⋯. 저쪽, 저쪽, 그리고 저쪽엔 지뢰 하나씩 묻고.”
지시를 다 마친 후, 장목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환각 능력의 가장 큰 문제는 오직 사고력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라 생물에만 대적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만 지뢰, 못, 밧줄, 함정 등등, 여기까지 환각을 일으키진 못하지. 이런 조치를 딱, 취해놓으면 이제 어떤 환각으로도 이것들을 옮기고, 없앨 순 없어⋯⋯.”
전파 신호 또한 왜곡될 수 있었으니, 장목화는 전자 부품에 의지하지 않는, 비교적 고전적인 물건들을 골라 챙겨왔다.
“여홍이가 밟을까 봐 걱정되는데요.”
성건우가 구덩이를 파며 염려를 드러냈다.
“내가 바보냐?”
곧장 항의하는 친구를 보고, 성건우가 용여홍을 힐긋 쳐다보았다.
“아, 난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그만!”
용여홍이 황급히 그를 저지했다.
장목화도 거들었다.
“환각에 걸리지만 않으면 지금 여홍이는 믿을만한 팀원이야.”
이는 먼저 전신 거울부터 배치한 뒤, 지뢰나 함정 등을 설치한 이유였다. 그러지 않으면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장애물들을 밟을 수 있었다.
한차례 바쁘게 움직인 끝에, 구조팀은 진지 구축 공사를 마쳤다. 또 산 쪽을 향해 세워진 전신 거울 두 개 옆에 전구가 달린 팻말도 세워두었다.
「통행 불가. 동북문으로 가세요.」
동북문을 지키고 있는 건 신룡교 사람들로, 주명희도 직접 나와 있었다.
끝!”
장목화가 시원하게 외쳤다. 그녀는 여태 가만히 서서 지시만 내린 게 아니라 노동에도 참여했고, 무엇보다 주위 감시와 대형 생물의 전기 신호를 살피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었다.
성건우가 입을 열기 전, 그녀는 다시 지프로 다가가며 이야기했다.
“이제는 지프 뒤에서 기다릴 거야. 어떤 기척이 느껴져도 최대한 반응하지 마. 주 관주가 그랬잖아. 많은 일을 하면 실수도 많아지고, 적은 일을 하면 실수도 적어지는 법이라고.”
용여홍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력한 적을 마주한 상황이기는 해도 든든한 요새가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