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중대한 진전
게네바에게 받은 허가증으로 로봇 경비 대원의 검사를 간단히 통과하고, 구조팀은 즉각 파나니아의 병실로 들어갔다.
산 여우 강도단 두목은 그 긴 금발을 박박 밀린 채,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삶에 회의감을 느낀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잔뜩 풀죽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이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렇게 강력했던 강도단이 단 며칠 만에 와해 됐으니, 그 심정도 이해는 갔다. 그들이 맞닥뜨린 사건들도 믿기 힘들 정도로 기이하지 않았던가.
강력한 유적 사냥꾼 팀을 맞닥뜨린 것이야 억지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어도, 어젯밤 있었던 사건은 파나니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파나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들의 등장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나 앉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나도 여기 남기 싫었다고.”
“긴장할 것 없어.”
장목화가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그래, 널 죽이기야 하겠어? 몇 대 때리는 거라면 몰라도.”
성건우도 동조했다.
“왜?”
용여홍이 물었다. 대체 성건우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강도단 두목이 여태 저지른 죄가 어디 한두 개였던가? 이런 악당이라면 마땅히 죽여야 옳았다.
곧 성건우가 정색하며 답했다.
“타르난에 사적인 싸움이 금지돼 있잖아.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해치는 일이 금지돼 있다고.”
‘난 또. 저 녀석한테 측은지심이라도 느낀 줄 알았지.’
용여홍이 스스로 너무 천진했음을 깨닫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두 친구의 만담 같은 대화에 마음이 좀 안정됐는지, 파나니아가 구조팀 네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으려고.”
장목화가 포문을 열었다.
파나니아의 얼굴에 다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났다.
“우, 우린 산비둘기에서 나가 맞은편에 있던 청포도로 가려고 했어. 거기로 가고 있는데 조니가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면서 담벼락에 해결하고 오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린 바로 그 자리에 멈춰서 녀석을 기다렸어.”
“왜 청포도로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백새벽이 물었다.
그녀는 이런 강도단의 행동 양식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은 오줌이 마렵다면 알아서 싸고 쫓아오라는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 많은 수하를 데리고 마냥 제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강도단 두목답지 않은 태도였다.
파나니아는 살짝 여린 말투로 답했다.
“나, 난, 너희들이 쫓아올까 봐 겁이 났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랑 함께 있는 게 훨씬 더 안심되잖아.”
“그래서?”
장목화가 그의 진술을 재촉했다.
파나니아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조니는 오줌을 누러 간 뒤 돌아오질 않았어. 우린 걱정이 돼서 찾으러 갔다가 수많은 야수를 맞닥뜨렸지. 더러는 변이된 야수였고, 더러는 잔뜩 굶주려 있었어. 심지어는 무심자도 섞여 있었고.
우리는 그들과 격하게 싸웠어. 그러다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제야 우리를 도우러 온 로봇 경비대의 보호를 받고 방으로 돌아왔지.
방에 도착하자마자 피로가 쏟아지더라고. 그 후의 일은 로봇 경비대에게 맡겨두고 그냥 자버리고 싶었어⋯⋯.”
장목화와 성건우는 번갈아 이런저런 각도에서 질문을 한 뒤 겁에 잔뜩 질린 강도의 병실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기 전, 파나니아는 조건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안녕.”
성건우도 웃으며 예의 바르게 호응했다.
“안녕.”
* * *
네 사람은 나머지 강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 뒤 지프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장목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주 관주는 뭔가를 숨기고 있어⋯⋯.”
운전하던 백새벽은 장목화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아홉이 용을 봤다는 거요? 그 고등 무심자와 신룡교 사이에 일정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거,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난 그 고등 무심자가 만들어낸 환각이 기본적으로 우리 기억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지와 식견,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걸 확신해. 기껏해야 목표의 반응에 근거해 끊임없이 환각을 조정할 수 있을 뿐일 거야. 예를 들어 목표가 귀신 영화를 보며 겁에 잔뜩 질려 있다면, 그 고등 무심자가 만들어내는 환각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되는 거지.”
이 대목에서 고개를 튼 그녀가 용여홍, 성건우를 놀리듯 말했다.
“그게 아니면 산 여우 강도단이 환각 속에서 본 건 변이된 괴물, 굶주린 야수, 흔히 볼 수 있는 무심자가 아닌 강한 공격성을 보이는 우리였을 걸.
그래, 그들이 거짓으로 진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근데 내 생각엔 굳이 그럴 이유까진 없을 것 같아. 그들이 이미 그 고등 무심자에 사로잡혀 작정하고 연기하는 게 아닌 이상엔 말이야.
우리도, 그들도 지금은 같은 배에 탄 신세잖아. 최대한 빨리 그 고등 무심자를 해치우지 않으면 다들 죽을지 몰라.”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람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넌 능력도 안 썼잖아? 근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장목화가 웃으며 반문했다.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했으니 그도 교수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바른편이니까요.”
‘⋯⋯그 녀석한테 예의를 가르친 건 너 아니었냐?’
용여홍은 친구의 말을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장목화도 막 웃으며 핀잔하려던 그때였다.
웅- 웅-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진동했다.
이내 장목화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전자기기를 꺼냈다. 검은 액정 패널엔 로봇 두 대가 서로에게 기댄 화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핸드폰이었다.
게네바는 구조팀 네 사람에게 핸드폰 한 대씩을 다 나눠주었다.
타르난은 머신 헤븐이 기지국을 건설해주고 관련된 부서도 건립해준 덕에 이런 통신 기기를 직접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구조팀이 받은 핸드폰은 구세계 유적에서 찾은 걸 고친 게 아닌, 머신 헤븐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모델이었다.
타르난 시장이자 로봇 경비대 대장인 게네바는 그 고등 무심자가 전자파 신호를 방해할 수 있고, 그 능력을 통해 로봇들의 환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각 구역 방어를 담당하는 팀과의 연락을 포기할 순 없었다. 순전히 고함만으로 소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소리 역시 왜곡되고 조작될 가능성이 있었다.
임무를 다 완수한다면, 작전 참여자들은 핸드폰을 반납할 수도 있고, 보수 일부로 챙길 수도 있었다.
단,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타르난을 벗어난 순간부터 핸드폰의 주요 기능은 쓸 수 없어진다는 점이었다.
통화 기능을 쓸 수 없는 휴대폰은 소설을 보고 게임을 하는 소형 컴퓨터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위드 시티처럼 기지국이 건설된 곳에 간다고 해도, 일단 주관 부서로 가서 등록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다시 통화할 수 있었다.
장목화는 지금까진 핸드폰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도 좋고, 전자기기도 여럿 사용해봐서 핸드폰을 꽤 능숙하게 다뤘다.
그녀가 전화 받는 법, 거는 법, 소설 보는 법, 게임 하는 법을 대략으로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곧이어 장목화가 진동하는 핸드폰을 엄지로 한 번 훑고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 게네바다.
전자합성음으로 이뤄진, 부드러운 남자의 중저음이 들려왔다.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 있어.
게네바가 단호하게 답했다.
‘좋았어.’
장목화는 불끈 쥔 주먹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의 반응에 성건우가 몸을 옆으로 틀더니 용여홍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흠칫 놀란 용여홍은 이 정신 나간 친구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진 않았지만, 결국 친구의 끈질긴 눈빛에 오른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쳐주었다.
그 사이, 게네바의 말이 이어졌다.
- 방금 소스 브레인에게 답변이 왔어. 이번 일이 해결되면, 또 너희가 그에 상응하는 공헌을 했다면 전화로 질문해도 된다고 하더군. 하지만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5분이야.
장목화의 핸드폰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통화를 엿듣던 성건우가 순간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히익! 어렵겠는데? 어떻게 5분 내내 질문을 하지?”
전화 건너편의 게네바는 한동안 침묵 끝에 덧붙였다.
- ⋯⋯답변 시간도 이 안에 포함된다.
“그럼 너무 짧잖아.”
성건우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던 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듯했다.
장목화는 게네바가 이미 성건우의 화술에 말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재차 침묵하던 게네바가 말했다.
- ⋯⋯이건 소스 브레인의 결정이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어쨌든 고마워.”
장목화가 중대한 진전에 매우 기뻐했다.
“고마워.”
성건우도 따라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핸드폰을 챙겨 넣은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네. 지금까지 만나자는 건 강경하게 거절했잖아. 소스 브레인은 왜 전화 통화는 거절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 방식은 팀원들 생각을 유도하기 위해, 팀장 장목화가 종종 사용하는 형식이었다.
“특별한 뭔가가 있는 소스 브레인과 직접적으로 만나면 비밀이 유출될 수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용여홍이 답했다. 그도 이젠 경험도 많고, 식견이 있는 유적 사냥꾼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봤자 스마트 슈퍼컴퓨터일 뿐이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 적어도 외형으로는 그 차이점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겠어?”
장목화가 반문했다.
그 질문에 용여홍의 말문이 막혔을 때,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르죠.”
“인간이란 걸 숨기고 싶었다면 슈퍼컴퓨터 모형만 갖다 두고 우리랑 대화하면 돼.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으면 너나 나한테 감지될 염려도 없어.”
장목화가 성건우의 말에 반박했다.
이에 한층 더 혼란스러워진 용여홍이 물었다.
“그게 전화로 대화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거죠?”
장목화가 웃었다.
“다르지 않지.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이때, 망설이던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만약 소스 브레인이 만남에 응했다면, 그건 어디서 이뤄졌을까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스 브레인은 이동할 수 없을 거야. 적어도 이동하기 쉽지 않겠지. 그러니 장소는 우리가 머신 헤븐 본부가 있는 그 도시로 갔을 가능성이 커.”
순간 용여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팀장님, 그러니까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게 그 도시, 머신 헤븐의 본부라는 뜻인가요?”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진짜 궁금하네. 각종 로봇 생산을 주업으로 삼는 그 도시가 왜 그렇게 숨어 있으려 하는 건지⋯⋯.”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지프는 사냥꾼 길드 밖에 이르렀다. 방어할 구역 배정은 현지 사냥꾼 길드 회장 고부겸이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네바는 타르난에 배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부겸은 40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하고 전투하며 주위 환경에 훨씬 더 빠삭했다.
그러니 아무리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게네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고부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