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주명희의 경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성건우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전했다.
장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섬 자체가 괴물인가? 표면적인 형식이 널 가둬두고 있는 건가?”
생각에 새로운 물꼬를 튼 성건우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그 섬과 이야기를 잘 해봐야겠네요.”
장목화는 당장 그에게 당부했다.
“그냥 추측일 뿐이야. 틀릴 가능성이 더 커. 그래도 시도는 한 번 해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의 전화가 울렸다.
용여홍은 적극적으로 나서 전화를 받아, 제법 그럴듯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너무 연기 톤이네. ‘여보세요, 누구야?’라고 말해야지.”
성건우가 말했다.
갑작스레 커진 그의 목소리 때문에 용여홍은 고막이 다 울릴 지경이었다.
“그래, 너무 연기 톤이긴 하다.”
장목화도 성건우의 편을 들었다.
반면 백새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전기에 대해서만 알뿐, 전화해 본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접 경험이라도 할 수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은 적도 거의 없었다.
곧이어 수화기 너머로 여관 사장 아이노가 말했다.
- 누가 소리를 지르는 거죠? 로봇 경비대에서 여러분을 찾으러 왔어요.
용여홍은 성건우와 장목화의 공격을 애써 무시하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로봇 경비대라⋯⋯. 준비해, 필요한 물건들 챙겨서 내려가자.”
장목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웃었다.
여관 홀에서 구조팀을 기다리고 있던 건 지능 로봇이 아닌 보조 로봇이었다.
로봇이 네 사람에게 말을 전했다.
“게네바 장관님께서 여러분을 시청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역시.
장목화는 성건우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알겠어.”
* * *
시청 꼭대기 층, 시장 사무실 안.
오늘 게네바는 흔히 볼 수 있는 군복을 입고 승마화를 신은 채 특별 제작된 금속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게네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희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구조팀 네 사람은 그의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어떤 일이지?”
계속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던 장목화가 물었다.
게네바는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금속으로 된 양손을 깍지껴 쥐었다.
“어젯밤 사냥꾼 길드의 고 회장, 그리고 각 대형 교파의 현지 책임자들과 고등 무심자 사건에 관한 얘기를 나눴어. 다들 최대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더라고.
주 관주 의견에 따르면 차례대로 수색하고 사냥하는 게 좋겠다더군. 관련 없는 사람들이 함께 작업에 참여하면 상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각자 팀을 이뤄 도시 밖 일부 구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순서에 따라 고등 무심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수색하는 방안으로 결정 났어.
타르난엔 인력은 충분하지만, 실력 있는 강자는 부족해. 난 너희들이 이 작업에 참여해줬으면 한다. 그 위험한 생물이 재차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무고한 주민들을 해치게 두고 싶지는 않아.”
게네바는 할 일을 간단히 설명한 뒤, 부탁을 덧붙였다.
그러자 성건우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응당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팔을 굽혀 주먹을 쥔 성건우를 보고, 게네바는 파란빛이 번득이는 눈만 고정하고 있을 뿐,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때 성건우가 재차 정색하고 덧붙였다.
“만약 쌀, 밀가루, 생선, 냉동육, 채소 같은 식재료를 보수로 준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게네바는 마치 다운이라도 된 듯 여전히 부동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몇 초 후에야 게네바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게 아주 작군.”
“작지 않아.”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용여홍이 보기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곧 게네바가 돌아보자, 장목화가 변함없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 자세히 생각해봤어. 소스 브레인은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
게네바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자 장목화의 웃음은 한층 더 또렷해졌다.
“하지만 사람과 대화도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전화로 몇 가지 질문을 할 수는 있다는 거야. 굳이 만날 필요는 없이!”
또 한 번 침묵에 빠진 게네바는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답했다.
“일단 상부에 전해보도록 하지.”
* * *
남가관.
게네바와 기본적인 합의를 마친 구조팀은 소스 브레인의 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다시 이곳을 방문했다. 게네바가 전하길, 주명희가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흰색 가운을 걸치고 허리에 삼끈을 멘 주명희는 새카만 머리를 양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 뒤로는 예스럽고 장엄한 감실과 깨진 거울 조각으로 상감된 용의 상징이 자리해 있었고, 양옆엔 검은 등받이 의자들이 배치돼 있었다.
오늘 기도를 드리는 신도는 굉장히 많았다. 다들 한 명도 빠짐없이 일어나 몸을 약간 젖힌 채 양팔을 살짝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장목화의 시선이 성건우에게 닿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에는 대부분 다 진짜 사람들이네. 어젯밤 혼란 때문에 주민들도, 외부자들도 동요됐나? 각자 믿는 달지기에게 기도하며 비호받으려고?’
장목화 역시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신도들에게서 각기 다른 생물 전기 신호를 감지했다.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 장목화가 생각과 같은 의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신령을 즐겁게 하기를!”
주명희가 양팔을 벌리며 몸을 살짝 젖혔다.
‘안면 인식 장애는 있어도 정말 무당 같은 느낌이 난다니까.’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성건우가 물었다.
“관주님은 왜 노래를 부르지 않으십니까?”
전에 그는 신룡교의 대합창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곧장 본론에 들어가려던 주명희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이라 믿기에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웃었다.
“노래는 신령을 즐겁게 하는 방식일 뿐, 신도들 사이의 예가 아닙니다.”
성건우는 이미 예상한 답이라는 듯, 배워둔 말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어디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주명희는 잠시 진지한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답을 받은 성건우는 곧장 한발 더 나아간 제안을 했다.
“제가 아는 노래 중에 신룡교에 딱 맞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뒤이어 그가 바로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원한 용의 후계자⋯⋯.” (* 허우더젠 《용의 후예》)
“‘후예’겠지요.”
주명희가 틀린 부분을 바로잡았다.
자꾸만 딴 길로 새는 대화에 장목화가 애써 웃으며 끼어들었다.
“주 관주님, 게네바 장관이 저희한테 전할 말이 있으시다던데요.”
주명희도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어젯밤 저와 함께 고등 무심자에 대적했던 그 유적 사냥꾼 팀이셨네요. 타르난 방어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신 겁니까?”
‘뭐? 여태까지 우리를 몰라봤던 거야? 그러고도 건우랑 저렇게 이야기를 잘 이어나갔다고?’
장목화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용여홍, 백새벽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가 다시 주명희의 질문에 답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 게네바 장관이 저희 요구에 응하면 그때 확정할 겁니다. 물론 어쨌든 한 구역 방어를 담당하기는 해야겠죠. 그건 저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장목화는 만약 소스 브레인이 전화로도 소통하기 싫다고 하면 팀원들과 적극적으로 공격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위험까지 부담할 필요는 없었다. 숨은 인재도 많고 여러 교파도 있는 타르난에 강자가 부족하진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답한 주명희가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말씀하세요.”
성건우는 지금 상당히 예의 바른 모드의 성건우인 것 같았다.
주명희가 말을 이었다.
“네, 전 어젯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명상하며 고심한 끝에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고등 무심자는 거울에 비치는 걸 두려워합니다.”
“거울에 비치는 걸요?”
장목화는 목표의 약점이 거울과 관련돼 있으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고등 무심자가 두려워하는 건 반짝거리는 성질이지, 거울에 비치는 그 자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두려워하는 건가?’
한편 용여홍은 속으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명상하고 고심을 한 끝에 알아냈다는 말은 왜 하는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이라니. 하긴,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예. 그러니 여러 개의 거울을 소지하고 다니다가 환각을 보게 될 때 곳곳으로 거울을 비춰보는 게 좋을 겁니다.”
주명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렇게요?”
성건우가 뒤로 홱, 돌았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이마엔 손바닥만 한 거울이 붙어 있었다.
이 남가관으로 오는 동안 구조팀은 거울 여러 개를 구입한 바 있었다.
“⋯⋯.”
주명희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놀란 듯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반면 구조팀 세 사람은 그냥 그러려니, 별다른 동요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주명희가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는 왜 여태 그걸 이마에 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어젯밤에 허리를 흔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
이번엔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이 흠칫하고 말을 잃었다.
몇 초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장목화가 충고했다.
“이마에 쓰면 허리가 아니라 목이 아프고 현기증도 느껴질 텐데요.”
“그렇네요⋯⋯.”
깊이 생각해보던 주명희는 목과 머리가 아픈 것보다는 허리가 아픈 게 낫겠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할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전할 말은, 어젯밤 있었던 일로 그 고등 무심자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젯밤 타르난 곳곳에 거울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들이 있었어요. 그자의 실제 위력은 훨씬 더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녀가 잠시 또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그 정도의 고등 무심자라면 특별한 데가 있을지도 몰라요.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성건우가 팀을 대표해 인사했다.
이윽고 장목화도 웃으며 덧붙였다.
“우린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주명희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주변을 수색하는 위험까지 부담할 필요는 없어요. 방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희 교파의 꿈 보호자 한 명도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으려나?’
여태까지 주명희의 모습을 봐온 용여홍은 신룡교의 사람들에게 영 믿음이 가질 않았다. 차마 그런 질문을 직접 입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성건우는 상당히 직설적인 편이었다.
“그분이 길을 잃으면 어쩌죠?”
주명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길을 잃으실 그런 분은 아니랍니다.”
장목화는 타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이런 대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질문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주 관주님, 그 고등 무심자의 환각을 파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명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많은 일을 하면 실수도 많아지고, 적은 일을 하면 실수도 적어지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실수도 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성건우가 물었다.
주명희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환각에서 중요한 건 거짓 속에 진실이, 진실 속에 거짓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환각 속에 섞여들어 여러분의 코앞까지 다가와 머리에 총을 겨눌 거예요.”
환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차례 나눈 뒤, 구조팀은 남가관을 나왔다.
그리고 어젯밤 일어난 사건의 생존자들, 살아남은 산 여우 강도단의 구성원들을 만나기 위해 타르난 종합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