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환각
이내 주명희가 살짝 웃었다.
“지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의 시선이 동시에 용여홍에게 향했다.
“⋯⋯.”
용여홍은 약 2초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팀장이 내린 결정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가 하겠습니다.”
결국 용여홍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진실이 어떻든 일단 그는 자신이 원해서 자청한 것처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주명희는 한 줄씩 놓인 검은색 등받이 의자 중 맨 마지막 줄 가장 끝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저 의자를 만져보세요.”
‘할 일이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의아한 얼굴로 걸어간 용여홍은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의자와 닿은 손끝엔 목재의 질감과 단단한 촉감, 우둘투둘한 표면이 느껴졌다.
“어떻습니까?”
미소 짓는 주명희의 눈이 선처럼 가늘어졌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요.”
용여홍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럼 한 번 앉아보세요.”
용여홍은 역시 또 너무 간단한 요구라고 생각하며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그 순간, 용여홍은 아래로 쑥 꺼져버렸다.
틀림없이 의자에 잘 안착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용여홍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물론 용여홍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중심을 잃은 몸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그는 몸이 검은색 등받이 의자를 그대로 관통하는 것을 목격했다. 딱히 어떠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급히 일어난 용여홍이 의자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등받이 의자는 여전히 너무도 멀쩡하고 온전한 모습이었다.
“이, 이게 환각이었나요?”
놀란 용여홍이 물었다. 앉기 전까지는 어느 각도로 봐도 의자는 실제 의자와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다.
주명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다들 보셨다시피 환각은 아무리 실제 같아 보여도 진정한 사물을 대체하지는 못한답니다. 진짜는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뭔가 생각에 잠긴 장목화가 물었다.
“환각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선 실제로 손을 대보고 그 감각이 느껴지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한다는 건가요?”
“그 방법은 효과가 있긴 하지만, 만능은 아니랍니다.”
주명희가 신중하게 말했다.
이때 성건우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만약 우리 넷이 손에 손을 잡고 산에 들어간다면, 동료가 괴물로 보이는 환각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장목화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와 손을 잡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괴물로 보여도 어쨌든 동료라는 판단은 할 수 있을 터였다.
‘효과적이기야 하겠지만 상황을 상상해보니 어째 좀 이상한데.’
실제로 상상해보니 꼭 어린아이들이 하는 게임 같은 느낌이었다.
주명희도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그럼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은 전투력을 잃게 될 텐데요?”
양손이 누군가에게 잡혀 있는 상황에선 공격이 아예 불가능했다.
“전 발로도 총을 쏠 수 있습니다.”
성건우가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주명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완전히 안전을 보장할 순 없어요.”
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설명을 이었다.
“손을 잡는다고 동료의 갑작스러운 소실을 막을 순 없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소실이란, 실제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감각 기관의 상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몸을 만질 수 없게 되는 건 그 사람을 잃는 거나 다르지 않았다.
성건우는 이미 그런 상황에서의 대책도 세워뒀다는 듯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얘가 사라지면 저는 바로 얘를 꼬집을 겁니다.”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뱅뱅 맴돌았다.
‘……왜 나를?’
뒤이어 그는 성건우가 제안한 방법의 허점을 찾아냈다.
“사라진 사람을 꼬집어서 비명을 지르게 한들 그 소리를 들을 순 없잖아. 허공에다 아무리 손짓해봤자 꼬집는 느낌도 안 날 텐데. 아니⋯⋯.”
말을 잇던 용여홍은 순간 성건우가 이 방법을 제안한 진정한 의도를 깨달았다.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용여홍이 존재하는 이상, 성건우의 손이 그를 관통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주명희도 이젠 성건우의 방법을 인정했다.
“그것도 방법이네요. 그러기 위해선 그 고등 무심자가 어느 영역의 환각에 능한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는 어쩌면 여러분들이 거리를 착각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장목화는 자신이 지금까진 환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음을 실감했다.
한동안 더 대화하다, 장목화가 구조팀을 대표해 예의 있게 고별을 고했다.
주명희는 떠나는 구조팀을 배웅한 뒤 돌아서 용의 상징을 모신 감실을 마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야⋯⋯.”
휙-
뜨락에 불어닥친 바람이 전당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주명희 곁에 있던 검은색 등받이 의자들과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던 신도들 몇몇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전당 안이 텅 비었다. 감실과 대들보, 기둥과 관주를 제외하고 남은 건 오로지 짙은 파란색 방석 몇 개뿐이었다.
* * *
성건우는 지프에 타자마자 입을 열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 가짜야.”
용여홍이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자 그가 다시 덧붙였다.
“인간의 의식이 없었어.”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전기 신호도 없었지. 주 관주의 환각 능력은 아직 좀 조악한 것 같아. 그걸 보면, 주 관주의 환각 능력은 그 자신의 인지를 바탕으로 창조될 뿐, 우리 기억까지 끌어다 쓰지는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어.”
만약 환각이 구조팀 네 사람에게서 기인했다면 장목화는 기도하던 신도들에게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었을 테고, 성건우도 인간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용여홍은 황급히 아까 전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눈을 감고 기도하던 그들이 전부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믿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장목화와 성건우가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상황에 더 이상 의심할 수는 없었다.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과연 신룡교⋯⋯.”
‘도관 안에 있던 사람과 물건이 대부분 거짓이고 환각이었다니.’
곧이어 백새벽이 지프를 몰기 시작하자, 용여홍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산으로?”
그는 이제 환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서 뭐 하게? 전의 그 유적 사냥꾼 팀처럼 괴물 게임 하려고?”
멍한 표정이 된 용여홍을 보고, 성건우가 설명을 도왔다.
“네가 그들에게 탕, 탕, 탕, 할 수 있듯 그들도 탕, 탕, 탕, 할 수 있어.”
“그건 그러네⋯⋯.”
순간 용여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두 팀이 산에서 만났을 때 환각의 영향을 받게 된다면 맞은편에 있는 이들을 전부 괴물로 여기게 될 터였다.
그런 상황에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맞은편에 나타난 것이 진짜 괴물이라면?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산에 들어가려면 그 안에 있는 게 우리뿐이라는 사실이 보장돼야 해.”
* * *
저녁 무렵, 할 일이 없는 구조팀은 타르난의 술집을 돌아보기로 했다.
이는 소식을 조금 더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술집에서 파는 보통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웃돈이라도 얹어줄 수 있었다. 차에는 거의 공으로 얻은 최신형 휴대용 컴퓨터도 많이 실려 있었다.
또 술집에서도 괜찮은 음식을 주문할 수 없다면 다른 맛의 통조림이나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로 교환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일행은 지금 가지고 있는 식량에는 완전히 물려 버린 상태였다.
타르난의 술집은 두 곳이었다. 비스듬히 떨어져 마주 보고 있는 두 술집은 서로 거리가 꽤 가까웠다. 성건우는 그 중간에 서서 왼쪽 한 번, 오른쪽을 한 번 살피더니 용여홍에게 물었다.
“어느 집으로 갈래?”
[산비둘기] [청포도]
용여홍도 이 거리를 몇 번 지나치긴 했으나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두 간판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청포도로 가자. 되게 좀 신선한 느낌이잖아.”
성건우는 바로 홀가분하게 외쳤다.
“좋아, 그럼 산비둘기로 가자!”
“또 작은 빨강이를 놀리는 거야?”
장목화가 웃으며 한소리했다.
용여홍이 그 말에 깊은 위안을 받고 있는데,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산비둘기. 왠지 식욕이 돋는 이름이야.”
처음으로 야외 훈련을 나왔을 때 구조팀은 토끼뿐만 아니라 새도 잡아 구워 먹은 적이 있었다. 절로 그때의 경험이 떠오르다 보니, 용여홍도 어쩐지 구미가 당겼다.
“좋아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중얼거렸다.
“놀리는 방법에도 수준 차이가 있구나⋯⋯.”
성건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장목화가 그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자.”
“네.”
성건우의 태도는 매우 순순했다.
용여홍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팀원들 뒤를 따랐다.
* * *
산비둘기 술집 문은 이중이었다. 바깥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짝 문으로 된 안쪽 문은 순수 목재로 만들어져 황갈색을 띠고 있었다.
문은 잠기진 않고 닫혀 있기만 했다. 장목화는 일단 팀원들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제일 먼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 정중앙에는 춤을 추는 무대가 있었고, 그 주위로 원탁과 의자들이 배치돼 있었다. 아직 음악은 틀지 않아서, 상당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카드 게임을 하거나, 주사위를 굴리거나, 마작을 하고 있었다.
무대를 지나, 바 테이블 쪽으로 가면 좌우 양편으로 자리한 당구대와 탁구대 등 오락 시설도 볼 수 있었다.
산비둘기는 그저 술이 없을 뿐, 꽤 그럴듯한 술집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작은 흰둥이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활동 센터 같네.”
장목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웃으며 말했다.
성건우는 곧장 노래를 흥얼거렸다.
“너는 나의⋯⋯.”
“그만! 일단 사람들한테 그 유적 사냥꾼 팀이 돌아왔는지부터 물어보자.”
장목화가 바로 성건우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녀가 말한 유적 사냥꾼 팀은 고등 무심자 조사를 위해 산에 들어갔던 그 팀이었다.
이내 장목화가 따로 지시를 내리기도 전, 성건우가 카드 게임 중인 테이블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어때? 이겼어?”
성건우는 양쪽 옆머리를 박박 깎은 한 젊은이를 툭툭 치며, 마치 잘 아는 친구처럼 물었다.
고개를 튼 젊은이는 얼굴이 몹시 낯선데 너무도 친근하게 구는 성건우의 태도에, 순간 어디서 이자를 본 적이 있나 싶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렇게 또 민감한 질문도 아니라, 별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말도 마, 최근 탐색으로 얻은 수확을 다 날려버리게 생겼다고.”
“화이팅.”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는 뜨거운 뭔가에 덴 듯 몸을 비틀며 춤을 췄다.
“신의 숨결에 푹 빠지기를.”
타르난 내엔 용광로 교파 신도들이 적지 않아서 그런지, 게임 중이던 이들은 성건우의 난데없는 춤에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이내 성건우가 다시 태연하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전에 산에 들어갔던 그 유적 사냥꾼들, 돌아왔어?”
카드 게임 중이던 젊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답을 들은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 게임을 1~2분 정도 더 지켜보다가 여유롭게 장목화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 후, 카드 게임 테이블의 다른 플레이어가 성건우의 질문에 답했던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샤바, 쟤 누구냐? 난 왜 모르겠지?”
샤바라고 불린 젊은이는 몇 초간 기억을 더듬다 대답했다.
“나도 몰라⋯⋯.”
“친한 거 아니었어?”
또 다른 플레이어가 의아해했다. 방금 성건우와 샤바는 꼭 의형제를 맺은 듯 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샤바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재차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하지만 카드 게임에 열중한 까닭에 그들은 또 이 일을 금세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