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심문
“생존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던데?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지?”
장목화는 무슨 질문을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한 듯 포문을 열었다.
게네바의 눈에서 발산되는 파란빛이 두 번 번득였다.
“그래, 생존자는 한 명뿐이었어. 이름은 장진, 별칭은 장아홉이야. 한 유적 사냥꾼 팀에 속해있었지. 그 팀이 겨우내 굶다 지쳐 튀어나와선 야수를 사냥하러 산 서남쪽 구역으로 향했어. 그중 오직 그 혼자서만 차를 타고 돌아왔지.
온통 피범벅이 돼서 돌아온 그는 강 동쪽 거리 입구를 지키던 경비대원에게 고등 무심자가 있었다는 말만 남긴 뒤 쓰러져 버렸어. 그 후 깨어났을 때는 정신에 이미 문제가 생겨 전부 죽었다, 내가 죽였다는 말만 미친 듯이 외치고 있어. 더 이상 구체적인 건 물을 수 없는 상황이야.”
“다른 정보는 없고?”
장목화가 캐물었다.
“없어.”
게네바는 실버블랙 색 기계 머리를 가로저었다.
고등 무심자의 수는 물론 그들에게 인간 동료가 있는지, 구체적인 능력이 무엇인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게네바가 말했다.
“우리는 고등 무심자에게 대적해본 경험이 있어. 과거 치랄 산 구역에 무심자들이 적지 않았거든.”
그들은 로봇 경비대에게 모조리 소멸된 바 있었다.
신기하게도 구조팀 네 사람은 게네바의 그 말에서 묻어나는 죄책감을 읽었다. 아무래도 지능 로봇은 죄책감마저 흉내 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알겠어.”
장목화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수하도 아니고, 상사도 아닌 상대와 깊은 이야기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별명이 장아홉이야? 형제 중에 아홉째인가?”
게네바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 움직이며 질문에 답했다.
“아니, 그가 속한 유적 사냥꾼 팀이 총 열 명이거든. 그들은 고서에 나온 대로 의남매를 맺은 사이야. 그중 나이로 치면 장진이 아홉 번째라 아홉이란 별명이 생긴 거고.”
‘정말 끔찍한 상황이네. 나였어도 정신을 놓고 말았을 거야.’
용여홍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이로도 거의 막내인 그가 무려 아홉 명의 의남매를 잃고 혼자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장목화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아홉을 만날 수 있을까? 혹시 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
“물론이지. 근데 큰 기대는 하지 마. 우리도 각종 방법을 다 동원했어. 심지어 엄청나게 선진화된 기계까지 이용해봤는데, 결국 다 실패했지.”
게네바가 답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방법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알 수 없는 거잖아?”
장목화는 최대한 성건우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대꾸했다. 구조팀에는 심문의 고수 아니, 담판의 전문가, 아니, 사교의 달인이 있었다.
게네바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허가증을 작성했다. 심지어 서명, 내용, 암호 키 등의 정보로 이루어진 복잡한 도안까지 그렸다. 장목화라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의 보안 수준이었다.
동시에 약간의 의혹을 느낀 그녀가 물었다.
“당신들은 이미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을 텐데? 장아홉을 담당하는 경비대원에게 전자 허가를 보내고 우리 사진을 첨부하면 될 일 아닌가?”
“규정된 절차야. 수작을 부릴 순 없지. 그랬다가는 남들에게 빈틈을 들키게 되기 쉬워지니까.”
게네바가 설명했다.
그 허가증을 받아들고 작별을 고한 장목화는 팀원들과 지프로 돌아갔다.
* * *
백새벽이 시동을 거는 사이, 장목화가 물었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통해 뭘 알아낼 수 있을까?”
성건우가 곧장 답했다.
“장아홉의 말은 거짓이 아닐 거예요.”
“왜?”
장목화가 되묻자, 성건우가 정색을 하고 답했다.
“미친 자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건 또 무슨 논리람?’
장목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침을 탁 뱉었다.
성건우가 다시 또 덧붙였다.
“신부라면 장아홉으로 하여금 그의 동료들을 직접 죽이게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 고등 무심자에게도 비슷한 능력이 있을지 몰라요.”
용여홍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물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장아홉이 그 진실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정신을 잃고만 걸까요?”
“그럴 수도.”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강 동쪽으로 돌아온 구조팀은 곧장 타르난 종합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일단 사냥꾼 길드로 갔다. 혹시 다른 사람이 찾아낸 정보가 추가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홀 안으로 들어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네 사람은 이미 어떤 유적 사냥꾼 팀이 그 조사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저 임무, 누가 맡았지?”
장목화가 근처를 지나던 한 사냥꾼을 붙잡고 물었다. 매우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었다.
장목화에게 붙들린 사냥꾼은 그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외부에서 온 사냥꾼 팀이던데. 팀장은 머리 절반이 금속이었어.”
“멋진 형님의 동료네!”
성건우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분명 치랄 산 구역에서 물을 보충하며 구조팀에게 고등 무심자의 출몰을 경고했던 그 유적 사냥꾼 팀일 것이다.
‘음, 생존자들은 타르난뿐만 아니라 치랄 산 다른 구역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어. 그 사람은 당시 여러 유적 사냥꾼 팀이 끔찍한 죽음과 부상을 겪었다고 했지?
그 말에 비춰보면 고등 무심자와 맞닥뜨린 건 장아홉이 소속된 그 팀뿐만이 아닐 거야. 다른 유적 사냥꾼들도 있었을 테고 그들은 더 많고, 더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거야.
우리에게 경고를 해줬던 그 팀은 그 전에 다른 생존자를 마주쳤던 게 틀림없어. 그러니 이 임무를 맡았겠지. 물론 든든한 실력에서 비롯된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해나가던 장목화가 약간 멍한 표정의 유적 사냥꾼에게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는데?”
“이미 출발했지, 산으로.”
사냥꾼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 후로 몇 차례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 이상의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 * *
구조팀은 다시 차를 타고 리버프론트 애비뉴 북측으로 나아가 타르난 종합 병원에 이르렀다.
장아홉의 병실 밖은 검푸른 군복을 입은 로봇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었다.
장목화는 그에게 방문 이유를 밝히며 게네바의 허가증을 내어주었다.
로봇 경비 대원이 곧 파란색 눈빛을 밝게 번득이며 종이에 그려진 복잡한 부호를 스캔했다.
띡-
소리가 울리자, 경비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완료. 문제없군. 들어가 봐.”
‘편리하네.’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병실 안.
장아홉은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두꺼운 하얀색 이불을 둘둘 감고 침대 위에 웅크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혼란한 눈빛에는 초점도 없어 보였다.
지금이 겨울이라곤 해도 그는 꽤 심각하게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성건우에게 눈짓을 해 보인 장목화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닫았다.
곧이어 앞으로 나아간 성건우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입가에 수염 자국이 또렷한 장아홉은 더욱 구석으로 물러나면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성건우가 연하게 웃으며 운을 뗐다.
“긴장할 것 없어. 봐봐⋯⋯. 넌 인간이야. 나도 인간이지. 넌 유적 사냥꾼이야.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장아홉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는 했다. 그 때문에 장목화는 추리 광대 능력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능력은 효과를 발휘해도 정신이 미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성건우의 말을 듣던 장아홉은 몸의 떨림이 점차 가라앉는 듯했다. 더 이상 그렇게 두렵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너, 너는 양하나?”
망설이던 장아홉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은 흠칫 놀랐지만, 곧 양하나를 대충 짐작했다. 그와 동시에 뭔가 마음을 짓누르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내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왜 우리를 죽인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장아홉이 갑자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난⋯⋯. 난 안 그랬어! 안 그랬어! 양하나,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나, 난 그냥 괴물을 죽였을 뿐이야!”
말을 잇던 그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하하, 내, 내가 그것들을 죽였어! 내가! 내가!”
성건우는 오른손을 들어 상대를 진정시키려는 듯한 손짓을 취했다.
“괴물 말고 또 뭘 봤지?”
그러자 살짝 진정하는 듯했던 장아홉의 눈빛이 조금씩 멍해졌다. 무작정 덮어놓았던 기억 속을 느릿하게 파고드는 듯했다.
그러던 그때, 장아홉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그 바람에 그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 흔들렸다.
“요, 용이 있었어!”
그의 목소리가 병실 안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 * *
타르난 종합 병원 밖, 개조된 국방색 지프 안.
보조석에 앉은 장목화가 몸을 반쯤 틀어 팀원들에게 물었다.
“어떻게들 생각해?”
성건우가 답하기 전, 용여홍이 먼저 자신의 추측을 밝혔다.
“그 고등 무심자의 능력은 아마 환각을 만들어내는 걸 거예요. 장아홉에게 그의 동료들을 괴물로 보이게 하고 거대한 용을 보이게 해서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한 뒤 정신을 무너뜨린 거죠.”
말을 마쳤는데 누구도 그의 말에 의견을 덧붙이거나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용여홍은 약간 불안해졌는지 제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다른 의견은?”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로 볼 때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지. 여홍이 너,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판단력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장목화가 용여홍을 칭찬했다.
용여홍이 뿌듯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던 그때,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지능 로봇도 환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나요?”
운전 중인 백새벽도 동조했다.
“맞아요.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로봇 경비대원들과의 연락이 왜 끊어졌느냐는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 이유를 밝히려면 고등 무심자의 능력이 정확히 뭔지 알아내야 해. 만약 그가 감각 기관을 속여서 환각을 만들어내는 거라면 지능 로봇을 속일 순 없을 거야. 그들의 감각 기관 체계는 인간과 완전히 다르니까.
하지만 만약 그 고등 무심자가 환경 정보를 직접 왜곡하고 상응하는 신호를 바꾸면서 환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면, 아무리 지능 로봇이라도 그 능력을 피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장아홉은 왜 용을 본 걸까? 일반적인 상황에서 용과 접촉한 적 없는 사람이면, 아무리 환각이라도 그걸 볼 순 없었을 텐데. 설마 그 고등 무심자가 용을 만들어낸 건가? 그럼 그 이유는 뭐지?”
혼잣말하듯 생각에 잠긴 장목화를 두고, 성건우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용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요!”
“어딘데?”
장목화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답을 추측하며 물었다.
“신룡교 교회당 안이요.”
성건우가 단호하게 답했다.
“들어가 봤어?”
이 질문을 한 건 장목화가 아닌, 용여홍이었다.
성건우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찍은 거야.”
용여홍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리려던 그때,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신룡을 숭배하는 지역에 용의 형상이 있는 건 정상적인 일이지. 만약 장아홉이 신룡교의 신도라면 문제도 해결되는 건데⋯⋯. 쓰읍, 신룡교가 숭배하는 건 어느 달지기지?”
“11월의 달지기, 깨진 거울이에요.”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답했다.
“그 달지기의 다른 칭호는?”
장목화가 캐물었다.
약간 머뭇거리던 백새벽이 용여홍과 동시에 답했다.
“환각의 신!”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목화는 그 사실에 흥미로워하면서도 보다 신중하게 나섰다.
“재미있네. 그 고등 무심자는 환각 구현으로 의심되는 능력이 있고, 장아홉은 용을 봤고⋯⋯.”
짝!
가볍게 손뼉을 친 그녀가 백새벽에게 말했다.
“신룡교 교회당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