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과학자 같지 않은 과학자
그 사이 백새벽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일단 저희 질문을 들으시고 받고 싶은 보수를 결정하셔도 됩니다. 굳이 길드를 통할 필요는 없죠.”
고부겸은 보온컵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답했다.
“늙고 힘없는 내가 자네들이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고 내빼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럼 보상은 없이 고생만 한 꼴이 될 텐데.”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왜퉁스러운 고부겸의 모습에 용여홍은 문득 성건우가 떠올랐다.
‘지금 여기 건우까지 있었으면 대화는 완전히 삼천포로 빠졌겠지?’
“현지의 수석 사냥꾼이 그런 걸 걱정하시나요?”
백새벽이 고부겸을 보며 반문했다.
용여홍은 어젯밤 고부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원래는 베테랑 사냥꾼이었으나, 회장이 된 이후에는 수석 사냥꾼이라는 명예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내가 되어 과거를 자랑해서야 되겠나. 나이 든 사람의 몸은 전처럼 기민하고 빠르지 못하다네. 말해보게, 뭔지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
자조하듯 농담하던 고부겸은 표정을 추스르며 말을 끝맺었다.
용여홍은 곧장 손바닥만 한 수첩과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쥐었다.
“고 회장님, 맥시미언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응?”
고부겸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용여홍은 다시 질문의 중점을 강조했다.
“신력 초기, 머신 헤븐에서 현상금을 걸었던 그 사람 말입니다.”
기억을 되새기던 고부겸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말이로군.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일인데 그건 왜 묻나? 설마 그 사람에 대한 단서라도 있는 건가? 그자의 후손인가?”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간단히 설명했다.
“저희는 소스 브레인을 만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머신 헤븐에서 흥미 있어 할만한 것을 제공하려 합니다.”
“그럼 차라리 금속 광물을 모아 머신 헤븐과 큰 거래를 하지 그러나. 그쪽이 더 기회가 있을 텐데. 맥시미언에 대한 현상 수배는 수십 년 전의 일이야.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부겸은 이 젊은이들의 생각이 기발하긴 해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저희가 맡은 일이 그에 관한 일이라서요.”
하지만 백새벽은 고부겸의 설득을 완곡히 거절했다.
재차 보온컵 뚜껑을 비틀어서 연 고부겸이 안에 든 물로 입을 축이며 말했다.
“그럼 내 직접적으로 말하지. 보수 같은 건 필요 없어. 당시 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네. 그 사람은 치랄 산 구역에 없는 게 분명해. 있더라도 어떤 야수나 어떤 무심자의 배 속에 들어있겠지.”
용여홍은 고부겸의 답을 기록하며 한발 더 나아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때 머신 헤븐에서 내건 현상 수배지에는 뭐라고 쓰여있었나요?”
고부겸이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그때 그 현상 수배지에 사진이랑 설명이 있었어.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지. 머리는 황금색에, 눈동자는 옅은 파란색, 코는 약간 크고, 전체적으로 꽤 잘생긴 편이었다네. 듣기로는 유전자 최적화를 했다던데⋯⋯.”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개량을 유전자 최적화라고 불렀다. 이는 구세계 파괴 전에 개발된, 돌발적으로 진전된 기술인데, 그 후 대부분의 인간 세력에서는 그 맥이 끊겨버린 상태였다.
오직 반고 바이오와 화이트 기사단 같은 곳에서만 해당 기술을 계속해서 계승하고 개량하며 발전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용여홍이 빠르게 기록을 하는 동안 고부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과학자보단 전사에 가까워 보였어. 하지만 머신 헤븐의 현상 수배지엔 그의 신분이 특별히 강조돼 있었지. 그걸 제외하고 딱히 가치 있는 정보는 없었어. 머신 헤븐에선 그 사람을 찾기만 하면 본인들 능력 범위 안에서 그곳의 생사존망에 연루되지 않는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했었지.”
‘전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로봇 군단⋯⋯.’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다는 이야기에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성건우를 흉내 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생각으론 성건우를 흉내 내긴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백새벽이 물었다.
“수배지에 그 사람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쓰여있었나요?”
“없었어.”
고부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특정 물건의 보호를 강조한다거나, 특정 자료의 행방을 추적하라는 말도 없었고요?”
백새벽이 캐물었다.
“그것도 없었네. 목표를 생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뿐이었지.”
고부겸은 이에 대해서는 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그런 요구 사항들이 있었다면 벽에 부딪히기 전 조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기록해둬.”
백새벽이 용여홍에게 당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기초적인 판단을 내렸다. 머신 헤븐에서 맥시미언에게 현상금을 건 것은 그 사람, 혹은 그가 일찍이 했던 어떤 행동 때문이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이나 자료 때문은 아닐 것 같았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이었던 탓에 고부겸도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한 뒤, 사냥꾼 길드를 나왔다.
* * *
용여홍과 백새벽은 이제 용광로 교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장목화, 성건우와 합류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용여홍은 길가에 여전히 펼쳐져 있는 적잖은 좌판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에 반해 상회나 잡화점 등의 간판이 붙은 거리 양옆의 건물 1층은 꼭 닫힌 상태였다.
그러자 호기심이 인 용여홍이 어느 좌판 앞으로 다가가 주인에게 물었다.
“왜 거리 상가를 이용하지 않고 여기 노천에 나와 장사하시는 건가요?”
위드 시티에서 잠시 생활해봤던 용여홍은 거리 상가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레드스톤 마켓에서 제공한 자료를 통해 타르난에서는 주인 없는 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장기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 이상 지능 로봇에 재산권을 신청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용여홍이 질문한 좌판 주인은 피부가 거친 여자였다. 30대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했다. 곧 그녀가 상당히 어색한, 레드스톤 마켓 느낌이 나는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상점을 쓰려면 알아서 꾸미고 정리해야 하는데, 거기 들일 돈이 어디 있겠어요? 로봇들은 길가에 펼쳐진 좌판은 신경 쓰지 않아요. 비가 오면 큰 우산을 쓰면 되고, 무료로 전깃불까지 쓸 수 있으니 이러는 편이 낫죠.”
말을 마친 그녀가 위쪽 가로등을 가리켰다.
‘아, 상점에 들어가면 돈을 내고 전기 공급을 요청해야 하는 건가?’
용여홍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대에게 질문까지 해놓고 그냥 돌아서기가 좀 미안해졌다. 그는 결국 쪼그려 앉아 잠시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이 좌판에 진열된 것은 종이가 이미 누렇게 바랜 구세계의 책들과 보석 장신구, 구세계의 잡동사니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은 자신을 따라 쪼그려 앉은 백새벽에게 물었다.
“중년 여성에게 선물하려면 어떤 게 좋을까?”
“네 어머니한테 드리려고?”
용여홍의 의도를 가볍게 간파한 백새벽이 물었다.
“응.”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기에 용여홍은 솔직하게 답했다.
이때 용광로 교회당에서 나온 장목화와 성건우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와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용여홍에게 뭘 찾느냐고 물어본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보석 장신구 살 때 쓸 물자를 좀 빌려줄 수 있어. 돌아가면 공헌 점수로 갚아.”
백새벽이 청록색 비취 팔찌를 가리켰다.
“어머니 연배라면 저런 종류를 좋아하실 거야. 지금은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아도 오래 착용할수록 윤이 나거든. 내가 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 유적 사냥꾼 몇 명이 저런 장신구를 찾아냈는데 잘 팔리진 않아서 별수 없이 직접 차고 다녔거든?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반짝거리더라고.”
“맞아요, 맞아요.”
좌판 주인도 맞장구를 쳤다.
장목화는 이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 데다 개인적으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더 좋아했기에, 괜스레 이견을 밝히기보단 책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그녀는 책 한 권을 들고 열심히 읽고 있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뭘 보는 거지?’
호기심이 동한 장목화가 고개 숙여 성건우가 든 책 표지를 확인했다.
《배우의 자아 수양》
“⋯⋯.”
장목화는 무슨 말을 하고 싶긴 한데, 막상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구조팀은 한 차례 흥정 끝에 통조림 하나로 비취 팔찌를, 또 통조림 하나로 책 네 권을 얻었다. 한 권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은 장목화가 고른 것이었다.
* * *
맛없는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따로 할 일이 없었던 관계로 여관방 안에서 낮잠을 자거나 각자 의자, 혹은 소파를 하나씩 차지한 채 방금 사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편안한 휴식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 됐을 때, 돌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났나?”
용여홍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보자.”
장목화는 이제 좀 움직일 때가 됐다는 듯 말했다.
네 사람은 곧장 세린 드림 여관을 나와 리버프론트 애비뉴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소란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바로 사냥꾼 길드였다.
이미 소란은 잦아든 상태였으나 그곳에는 사람이 적지 않게 모여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드 안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곧 대형 패널에 나타난 임무를 발견했다.
「산 서남쪽 구역의 고등무심자 사건 조사」
‘게네바가 로봇 경비대를 보내 해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의혹을 느낀 장목화는 시선을 내려 그 아래의 설명을 살폈다.
「로봇 경비대원 열 대와 연락이 두절 됨⋯⋯.」
이 순간 장목화와 용여홍, 백새벽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들 사이에선 로봇 전사가 고등 무심자에 대적하기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건 상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옳았다.
물론 이는 그들에게만 상식이었다. 타르난 주민 대부분은 각성자와 고등 무심자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로봇 전사의 강대함을 직접 경험했으니, 그런 로봇 경비 대원 열 대면 치랄 산 서남쪽 구역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 정도의 병력이라면 일반 군대 하나와도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원들과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안정감을 느꼈던 타르난 주민들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타르난에 주재하는 로봇 경비대원은 전부 다 통틀어도 스물네 대 정도에 불과했다. 단숨에 그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잃은 셈이었다.
게다가 로봇 경비대 구성원은 전부 지능 로봇으로 감시와 수리, 청소를 담당하는 로봇과는 모델이 달랐다.
시선을 거두며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상황인 것 같아. 어쩌면 고등 무심자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닌지도 몰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도 뭔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한 사람이 생각나네요.”
“누구?”
장목화는 그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직접 물었다.
“수종이요.”
성건우가 한숨으로 옅은 그리움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