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어려운 결정
간격이 그렇게 넓지 않은 가로등 불빛 아래, 용여홍은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나이가 많은 현지 주민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길가에 펼쳐진 좌판 물건들에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각기 다른 폐허 도시에서 찾아낸 기이한 물건인데, 당연히 흥미가 동했다.
앞으로 나아가던 용여홍은 결국 한 좌판 앞에 멈춰 섰다. 이 좌판에 놓인 것은 옥과 비취, 다이아몬드 장신구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겐 이런 물건이 없었다. 용여홍은 어머니를 위한 물건 한두 개는 가져가고 싶어졌다.
반고 바이오 내부 일반 직원들이 가질 수 있는 장신구는 비단으로 만든 꽃장식과 머리핀 정도였다. 목걸이, 귀걸이, 반지, 브로치, 스카프 등은 몇 대를 물려받은 것이거나 안전부 직원이 외근을 나갔다가 주워온 것으로, 그 수가 극히 드물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좌판 앞에 쪼그려 앉은 용여홍은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집은 다음, 한동안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무엇을 더 좋아할지 판별할 능력이 없으니, 그저 다른 각도로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는 훨씬 더 실용적이라,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같은 값의 물건으로 교환이 가능했다.
여태까지 꽤 긴 여정을 이어오는 동안 용여홍과 성건우는 장목화에게서 몇 가지 경제학 개념을 배운 바 있었다.
“왜 황금 목걸이는 없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쥔 용여홍이 좌판을 한 번 훑어보며 물었다.
좌판의 주인인 수염이 덥수룩한 애쉬랜드인은 벌컥 성을 내듯 대꾸했다.
“황금과 은은 사가겠다는 상인단이 줄을 서는데, 굳이 여기까지 가져와 팔 이유가 있겠냐?”
‘하긴, 그런 금속은 공업용으로도 쓰이고 장신구를 만드는 데도 쓰니까.’
용여홍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불친절한 이 좌판 주인의 물건을 팔아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좌판 주인도 그를 따라 일어나 소리쳤다.
“외지인, 우리 타르난의 규칙을 몰라? 집어 든 물건은 사야지! 네가 이미 손댄 물건을 누가 사려 하겠어?”
놀라서 당황한 용여홍이 그런 규칙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려던 그때였다. 마침 곁눈으로, 현지 주민 같은 한 남자가 옆 좌판에 놓인 흰색 사기 접시를 집어 들어 살핀 뒤 다시 내려놓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그 남자를 저지하거나 손댄 물건을 반드시 사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쉬랜드 위에서 꽤 굴러본 용여홍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옷자락을 들어 올리며 허리춤에 찬 권총을 슬쩍 드러냈다.
하지만 좌판 주인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총부터 뽑아 드시겠다? 로봇 경비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보군!”
용여홍도 당연히 타르난에서는 사적인 싸움은 금지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총을 뽑아 드는 대신 슬쩍 드러내기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개를 든 용여홍은 근처 가로등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좌판 주인에게 되물었다.
“날 때리려고? 그거야말로 사적인 싸움일 텐데.”
좌판 주인이 피식 웃었다.
“무기를 쓰지 않는 사적 싸움에 대해선 로봇 경비대도 상관치 않아.”
말을 하는 사이, 양옆에 자리한 두 좌판의 주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기세를 북돋아 주었다.
“그랬군.”
원하는 답을 얻은 용여홍이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냅다 달려들었다. 전에 백새벽과 함께 위드 시티를 돌아다녔을 때 그녀에게 지도를 받은 바 있었다.
백새벽은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설령 상대의 화력이 자신의 목숨줄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것처럼 막강하더라도 일단은 허세를 부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허세에도 적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선공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1분 후, 용여홍은 옷을 탁탁 털며 바닥에 쓰러진 좌판 주인과 두 동료를 내려다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정말 이상하네. 무기를 안 쓰면 사적인 싸움으로 치지 않는다고?”
좌판 주인도, 두 동료도 배를 감싸 안고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느라 아무도 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이 셋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면 용여홍도 그들을 당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겨우 이런 싸움에 상대의 목숨까지 앗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예상치도 못한 순간 선수를 친 용여홍은 좌판 주인의 동료들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를 때려눕힌 뒤, 나머지 두 좌판에 널린 물건을 약점으로 삼아 그 동료들까지 손쉽게 처리했다.
주위 행인들과 다른 좌판 주인들이 손쓸 틈도 없이 상황을 마무리한 용여홍은 애쉬랜드의 생존 규칙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
질서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요즘 같은 시대엔 주먹이 곧 진리였다.
자신감을 조금 더 회복한 용여홍은 전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몇 걸음 걷다 보니 용여홍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비쳤다.
길 한가운데 선 성건우는 왼쪽을 한 번, 오른쪽 한 번, 앞쪽을 한 번 살피며 매우 망설이고 있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야, 저 녀석한테도 저런 순간이 다 있나?’
호기심을 느낀 용여홍은 다가가 뭘 그렇게 고민하냐고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길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서는 둘러 모인 한 무리가 음악 북소리에 맞춰 기이한 춤을 추며,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찬미합니다, 신세계의 대문이여!”
또 왼쪽엔 또 다른 무리가 나무 단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은 본래 허황한 한낱 꿈이라, 신룡(蜃龍)은 높으시고 깨진 거울은 영원하리…….”
굉장히 공허하면서도 신성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오른편 전방엔 뭔가 하나 끓고 있었다. 진한 냄새를 풍기며, 밀가루를 입힌 닭 날개가 점차 옅은 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또 그 앞에 세워진 얇은 기둥엔 한 여성이 한쪽 발로 그 끝을 밟고 서서 두 팔을 쫙 펼친 채 균형감각을 뽐내고 있었다.
시선을 거둔 용여홍은 성건우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서로 다른 세 개 교파가 활동하는 이곳에서 춤과 노래, 닭 날개 튀김 중 어떤 걸 택해야 하느냐는 엄청난 기로에 선 것이었다.
‘건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겠네.’
용여홍의 머릿속에 순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대사 한 줄이 떠올랐다. 사실 만약 저 세 교파가 지나치게 가까이 자리해 있지 않았더라면, 성건우는 셋 중 하나도 놓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용여홍도 이제 기본적으론 저 세 개 교파가 각각 무엇인지 파악했다.
하나는 그들과 만난 지 얼마 안 된 용광로 교파, 다른 하나는 무근자 상인단의 수장 플린이 언급했던 영광의 저울, 나머지 하나는 11월의 달지기, 깨진 거울을 믿는 교단일 터였다.
‘타르난은 정말 열정적이구나.’
용여홍은 더 이상 성건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서 자신의 모험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 역시 갓 튀긴 닭 날개가 탐이 나기는 했지만, 친구처럼 성찬을 위해 믿음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 * *
진지하게 고민하는 성건우를 지나, 용여홍은 수십 미터를 더 나아갔다.
이내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골목길 입구에 앉은 한 노부인을 발견했다.
두꺼운 암적색 솜옷을 입고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녀는 머리가 이미 하얗게 다 센 것으로 보아 나이가 적지 않은 듯했다.
노부인의 전방엔 펼쳐진 좌판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거리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애쉬랜드인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용기를 낸 용여홍은 앞으로 나아가 예의 바르게 노부인을 불렀다.
“할머니, 뭣 좀 여쭤봐도 될까요?”
노부인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흠칫 놀란 용여홍은 그제야 애쉬랜드의 몇몇 분파 언어 중엔 레드리버어보다 더 알아듣기 힘든 언어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지?’
바로 상대와 대화를 포기한 용여홍이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하려 한 그때였다. 등나무 의자에 앉은 노부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주머니 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전자기기를 하나 꺼냈다.
노부인은 한 버튼을 누르고, 방금 전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그 검은색 전자 제품에서는 전자합성음이 흘러나왔다.
- 젊은 총각이 예의가 참 바르네. 뭘 물어보려고?
노부인은 애쉬랜드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용여홍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사명도 잊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노부인이 다시 또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무슨 대답을 하자, 검은색 전자기기에서 재차 전자합성음이 흘러나왔다.
- 이건 구세계에서 만들어진 번역기란다. 머신 헤븐에서 수리했지. 지난번에 한 상인단이 우리 집 곡식과 채소, 짐승을 사가겠다고 통조림 한 무더기랑 이걸 주더군. 꽤 유용한 물건이야.
“그렇네요.”
용여홍은 점차 십방 상사의 민스가 했던 말을 깨닫게 됐다. 타르난은 로봇과 전자제품, 기계가 많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별 특별할 게 없는 도시였다.
잠시 용여홍은 장목화에게 이런 번역기를 예비용으로 한두 대 갖춰두자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이곳 현지인이신가요?”
노부인은 본격적으로 번역기를 이용해 용여홍과 대화에 임했다.
- 그렇지. 난 신력 3년에 태어났어.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이지. 그 사이 자식들에게도 자식들이 생겼고. 휴, 당시 내가 내린 결정은 정말 현명했어. 남부 지역에 있는 친구 중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다들 강도의 손에 죽거나, 전란에 휩쓸리거나, 전염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거나, 노환 때문에 병에 걸려 숨을 거뒀지.
용여홍은 몇 마디 칭찬을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타르난에서 꽤 오랫동안 지내셨다면 머신 헤븐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노부인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
- 그들에게는 필요하지만 여태 손에 넣지 못하거나 만들지 못한 게 아주 많아.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적지 않고. 예를 들면 원자력 마이크로화 기술이나 초고성능 배터리 기술, 구세계의 핵융합 연구 중요 자료, 임해 연맹에서 타르난까지의 송유관 건설, 두 지역 사이의 더 많은 철도 노선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것 등등. 아, 각종 광물도 상당히 부족해.
“⋯⋯.”
용여홍의 표정이 굳었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고급 기술은 고사하고, 구조팀에겐 지하자원과 기초 시설을 구하거나 공급할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이 고생을 하는 대신,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하지 않았을까.
몇 초 후, 용여홍이 겨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다른 건요? 그들이 특별히 원하는 건 없을까요?”
노부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답했다.
- 있지. 내가 막 타르난에 왔을 때 머신 헤븐에서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한 사람을 찾았었어. 맥시미언이라는 이름인데, 레드리버인 남자야. 무슨 과학자였나, 그랬을 거야. 한동안 현상금이 걸려 있었는데, 그 후에 그 사람을 찾았는지, 포기한 건지 현상금이 다시 거둬들여지더라고.
맥시미언⋯⋯. 용여홍은 그 이름을 기억에 새기며 물었다.
“혹시 그 사람 특징은 기억 안 나세요?”
노부인은 거침없이 답을 했다.
- 기억 안 나. 난 그 임무를 맡지도 않았었거든. 누군가한테 듣기만 했지.
다시 용여홍이 물었다.
“그럼 그 임무는 누가 맡았는데요?”
노부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 영감탱이가. 현재 길드의 회장, 고부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