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즐길 거리
“좋아, 더 이상의 질문은 없어.”
장목화가 만족스럽다는 듯 답했다. 상황은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풀렸다. 물론 소스 브레인이 그들을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지능 중추의 마음을 움직일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잠깐, 게네바는 소스 브레인이 우리와의 만남을 결정할 거라고 그랬지? 그럼 소스 브레인이 직접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장목화의 머릿속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때, 게네바가 커피 냄새가 나는 윤활유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강 동쪽으로 가봐. 그곳에 여관이 몇 채 있으니.”
이만 작별하자는 말뜻을 알아차린 구조팀원들은 남은 커피를 모조리 다 마셔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르겐센을 비롯한 이들은 여기 남아 기계 경비대에 의해 처리될 예정이었다.
밖으로 나온 용여홍은 싸늘한 밤바람을 들이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안의 지능 로봇들,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
성건우가 지프의 차 문을 열며 물었다.
“전에 다른 지능 로봇을 본 적이 있어?”
“아니.”
용여홍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럼 뭘 기준으로 이상하다고 하는 건데?”
성건우가 웃으며 상대를 압박했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용여홍도 약간 골이 났다.
“⋯⋯상식이지!”
* * *
운전은 백새벽이 맡았다. 강 동쪽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널 생각이었다.
이동하는 와중 구조팀은 수시로 산책하거나, 순찰하거나, 쉬고 있는 지능 로봇들을 보았다. 로봇들은 기본적으로 옷을 입고 있었고, 심지어 신발과 양말까지 신은 로봇들도 있었다.
밤하늘 아래, 강 서쪽 다리 구역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강 동쪽에 이르렀을 땐, 전방이 점차 시끌벅적해졌다.
다리 끄트머리로부터 가장 가까이 자리한 거리의 가로등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좌판이 펼쳐진 그곳은 꼭 위드 시티의 웨스트 스트리트 같았지만, 그보다 더 무질서했다.
차창이 꼭 닫혀 있었음에도, 구조팀원들은 시끄러운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행인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위협하는 다른 차의 소리였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각자 차창을 하나씩 차지하고 거리 양옆에 펼쳐진 좌판을 살폈다. 더러는 구세계 풍의 크리스털,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백옥 장신구를 팔았고, 더러는 각기 다른 크기의 액정 패널과 휴대용 컴퓨터, 더러는 통조림과 옷 등의 물자를, 또 더러는 아예 갖가지 잡동사니를 팔았다.
“구세계의 즐길 거리 포함⋯⋯.”
용여홍이 종이로 만들어진 간판 내용을 읽었다. 한 좌판 앞에 세워진 입 간판이었다. 그 좌판의 주업은 구세계 컴퓨터의 수리인 듯했다.
운전 중이던 백새벽은 용여홍의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저런 것들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왜?”
성건우와 용여홍이 동시에 물었다.
그러자 백새벽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
“황야에서 유랑하던 당시 알게 된, 굉장히 강한 유적 사냥꾼이 한 명 있어. 힘으로 따지면 팀장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지.”
“오, 어느새 내가 기준이 된 거야?”
북적북적한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던 장목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백새벽은 그녀의 농담에 답하는 대신, 하던 말만 이어나갔다.
“한번은 그 유적 사냥꾼이 어느 폐허 도시를 탐색하다 배터리만 빠졌지, 다른 문제는 없는 휴대용 컴퓨터 한 대를 찾았어. 그 후 사람을 찾아 컴퓨터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배터리를 구한 뒤, 전원을 켰지.”
마침 도로를 가로지르는 한 행인을 피하느라 백새벽의 말이 잠시 끊겼다.
그 사이, 용여홍이 나름의 추측을 했다.
“그랬는데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어? 그 컴퓨터 안에 들어있던 구세계의 즐길 거리에 뭔가 위험이 숨겨져 있었던 거야?”
백새벽이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 즐길 거리를 찾아낸 그는 그것에 완전히 빠져버려서 더는 폐허 도시를 탐색하지 않았어. 전에 모아둔 자산과 인맥에 의지해 퍼스트 시티에서 작은 사업을 하며 힘겹게 삶을 이어나갔지.
그는 가게가 바쁘게 돌아갈 때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했어. 어떻게 하면 장사를 더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사업을 불릴지 고민하는 대신 컴퓨터 앞에만 붙어 앉아 끊임없이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키보드를 눌러대기만 했어.
그는 원래 굉장히 야망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 언젠가 자신의 장원을 갖고 말겠다고 말했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폐인이 돼버린 거야.”
용여홍이 탄식했다.
“진짜 무섭네, 구세계의 즐길 거리라는 거.”
반면 성건우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내 의지가 구세계의 즐길 거리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그때 용여홍은 뺨을 살짝 부풀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팀장을 보았다. 어쩐 일인지 몸도 살짝 떨고 있었다. 장목화는 지금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팀장님은 구세계의 즐길 거리를 접해본 적이 있나 봐.’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장목화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배까지 감싸 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우리 작은 흰둥이, 심각한 모습이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하하!”
백새벽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제야 겨우 진정한 장목화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건우 쟤가 구세계의 즐길 거리랑 접촉하게 해선 안 돼.”
겨우 라디오 프로그램과 음악 목록, 그리고 연말 공연만 접한 상황에서도 선을 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그가 풍부하고 완벽한 구세계의 즐길 거리를 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성건우가 항의했다.
“아니, 네가 아니라 구세계의 즐길 거리를 못 믿는 거야. 그게 너를 오염시킬 것 같아서.”
장목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것이 성건우에게 가장 큰 설득력을 발휘할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가 답했다.
“다행으로 아세요. 지금의 성건우는 자부심이 넘치는 성건우니까요.”
“⋯⋯.”
장목화는 눈동자를 위쪽으로 굴리며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지프차가 앞쪽으로 조금 더 나아갔을 때 용여홍은 길가에 살짝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선 사람을 보았다. 손에 검은 커버의 책을 한 권 들고 있는 그는 주위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두꺼운 책을 들고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용여홍은 전에 들었던 정보로 판단을 내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는 확실히 종교가 많은가 봐요.”
머신 헤븐의 지능 로봇들은 종교를 믿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이 어떤 종교를 믿든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교파도 이곳에서는 수면 밖으로 나와 교회당이나 사찰, 관각 등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임해 연맹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용광로 교파의 경우엔 더 거리낌이 없었다. 이들은 이곳에 교회당을 짓고 공헌자를 파견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을 아예 임해 연맹의 여러 상사와 팀을 위한 타르난 서비스 센터로 삼았다.
한편 타르난에는 전도의 또 다른 전제 조건인 전도할 대상도 적잖이 있었다.
한명호의 자료를 받기 전까진, 구조팀은 타르난엔 로봇이 더 많고 인간은 이곳을 오가는 상인단과 사냥꾼, 무역 대표 등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었다.
타르난의 존재를 아는 건 머신 헤븐에게 거래 대상으로 인정받은 세력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각 세력에서 상인단과 그들을 보호할 유적 사냥꾼을 파견한다 한들, 이곳의 인원수는 평범한 중형 거점 정도밖에 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구조팀원들은 레드스톤 마켓을 떠나기 전, 타르난 현지 거주민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았다.
그들의 내력은 셋으로 나뉘었다. 그 첫 번째는 상인단의 특정 구성원과 그들의 후손이었다.
타르난은 머신 헤븐의 관리 아래 사적인 싸움이 금지돼 있어 치안과 질서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거기다 강력한 무장 부대도 있어, 강도단이나 다른 세력의 습격을 받을 염려도 없었다. 인간들이 보기엔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혼란의 시대와 신력 초기 타르난에 몰려든 사람은 적지 않았다. 당시 수많은 상인단과 도시 국가 무역단 사람들은 정식적인 루트를 통해, 혹은 원래 세력에서 아예 빠져나오는 방법을 통해 이곳에 남기 시작했다. 유지가 상당히 잘 된 이 폐허 도시엔 주인 없는 집이 꽤 많아서 머물기로 정해도 부담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임해 연맹은 아직 성립되기 전이었고, 머신 헤븐은 그 구역의 여러 도시 국가와 거래하고 있었다.
후에 오염지대 이외의 도시 국가들은 주를 형성하고 그 주를 바탕으로 연맹을 맺었는데 사실 여기엔 수자원 정화 기술을 제공하고, 로봇 지원 부대를 보내 고등 무심자에 대항하는 등의 도움을 줬던 머신 헤븐의 공이 컸다.
또 두 번째 세력은 주위 구역의 황야유랑자들이었다.
이렇게 안정적이고 평화로우며 필수적인 물자를 교환해줄 수 있는 도시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유랑자가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외부에서 온 유적 사냥꾼들이었다.
치랄 산 구역을 포함한 타르난 남쪽의 적잖은 폐허 도시는 수많은 유적 사냥꾼을 끌어들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폐허 도시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안전한 타르난을 발견하고 한동안 생활하면, 유적 사냥꾼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떠나는 대신 머무르기를 택했다.
그렇게 남은 이들은 논밭을 일구고 근처 폐허를 탐색하는 삼는 한편, 현지 사냥꾼 길드를 건립하기도 했다.
물론 현지 사냥꾼 길드의 건립은 사냥꾼들을 적절히 제약해 외부에 타르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한 전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좌판에 펼쳐진 각종 장신구와 전자기기, 잡동사니는 전부 주위의 폐허 도시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민스는 밥을 먹지도 않고 밭을 일구지도 않는 로봇들의 도시 타르난에는 신선한 식재료가 극히 드물어 오로지 통조림과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는 외부자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현지 주민들은 전부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이곳 땅은 산악 지대라 워낙 척박했으며, 상당 구역이 아직 오염된 터라 경작이 불가했다. 그들이 일군 땅에서 나는 작물론 그들의 배나 겨우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키우는 가축을 파는 것도 어쩌다 한 번 있는 수준으로 극히 드물었다.
즉, 타르난에서도 밀가루나 쌀, 채소 등을 팔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너무 비싼 까닭에 상인단이나 유적 사냥꾼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른 곳에서 구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 * *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침내 그 시끌벅적한 거리를 벗어난 지프는 보다 조용한 구역에 이르렀다.
이곳 가로등도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근거해 보면 타르난에 전력이 부족하진 않은 모양이었지만 노란빛, 혹은 흰빛이 새어 나오는 집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 외엔 수많은 집이 텅 빈 듯 캄캄했다.
“타르난은 북적북적하고 번화한 곳일 줄 알았어요. 근데 아직 빈집이 다 채워진 건 아닌가 봐요.”
“아직 이 도시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장목화가 답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용여홍은 불쑥 한숨을 내쉬었다.
“늪 1호 폐허와 비교하면 확실히 작네요. 이런 도시는 애쉬랜드에 거의 널려 있어요. 하지만 구세계 파괴전에는 사람이 가득했겠죠? 이런 곳도 작은 도시로 여겨졌을 거고요.”
5분의 1도 채워지지 않은 타르난도 오늘날의 애쉬랜드에선 번화한 곳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구세계는 얼마나 더 번화했던 걸까?
성건우가 곧장 동조했다.
“맞아. 그러니까 나를 따라 읊어볼래?”
용여홍은 일순 약간 또 멍해졌다.
“뭘 읊어?”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이번에 그의 말을 끊은 건 장목화가 아닌, 백새벽이었다.
백새벽은 한 여관의 문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세린 드림]
이 여관은 시끌벅적했던 그 거리에서 대략 2~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구세계에서는 호텔로 쓰였던 것을 후에 고치고 개조해 지금은 여관으로 운영 중인 듯했다.
또 이곳은 레드스톤 마켓의 여러 밀수업자가 가장 편안한 숙소라고 추천해 준 곳이었다.
지프를 여관 앞에 세운 구조팀은 알아서 돌아가는 대문을 통과해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어김없이 또 계속 회전문을 따라 빙글빙글 돌면서 그 안에 머물러 있으려던 성건우는 당연한 절차처럼 장목화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갔다.
하지만 용여홍도 자신들이 접근하자마자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한 그 문에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전공 분야와 관련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