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성의
집 안 응접실에 이른 구조팀은 각자 긴 소파 위에 앉았고, 요르겐센을 포함한 포로들은 그 뒤에 섰다.
일인용 소파에 앉은 게네바가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로 꼬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장목화는 일단 작은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뒤쪽 포로들을 가리켰다.
“타르난에 오는 길에 강도들을 만나 이 포로들을 잡았어. 당신들에게 처리를 맡기고 싶은데.”
게네바는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사람을 보내 저들을 감옥에 보내고 며칠 뒤 심판하도록 하지.”
그 말에 요르겐슨을 비롯한 강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타르난이 강도를 처벌하는 수준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도시 안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경우엔 기껏해야 1, 2년 정도 수감 돼 강제 노동을 조금 하기만 하면 됐다.
물론 2년간 자유를 박탈당하는 건 힘든 일이긴 했다. 집에 있는 아내들이 그때까지 기다려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직접적으로 처형당하거나 광산 구역에 팔려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처사였다.
포로들에 관한 문제를 처리한 장목화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치랄 산 서남쪽 지대에 고등 무심자가 한 명 나타났다고 해. 상인단과 유적 사냥꾼 팀은 감히 그쪽에 발을 들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
게네바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목을 움직이며 답했다.
“나도 오늘 저녁 무렵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내일 경비대를 보내 처리하게 할 생각이야.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와 그 소식을 전해주려 한 그 호의에는 감사를 표해야겠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흰색 드레스를 입은 한 로봇이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들어왔다.
은백색 금속 골조로 이루어진 이 로봇의 키는 약 175센티미터 정도였고, 목에는 구 세계풍의 보석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또한 이 로봇의 눈동자에서도 파란색 빛이 번득였다.
쟁반에 놓인 다섯 개의 잔에서 짙은 커피 향이 풍겼다. 동시에 장목화는 뭔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분명 커피 향은 아니었다.
“안녕.”
여자처럼 보이는 은백색 로봇은 허리를 굽혀 커피 네 잔을 구조팀원들 앞에 놓아주었다. 마지막 잔은 게네바의 것이었다.
“내 아내, 수산나야.”
게네바가 짧게 소개했다.
“안녕, 수산나.”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수산나는 그의 인사에 퍽 기뻐했다.
“정말 예의 바른 청년이구나.”
장목화와 용여홍, 백새벽 역시 수산나에게 인사하며 게네바를 몰래 힐끔 쳐다보았다. 이 지능 로봇이 어떻게 커피를 마시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게네바는 한 손으로 잔을 들고 한 손을 입에 넣어 특정 스위치를 돌렸다. 그러고는 잔에 든 액체를 그 안에 약간 쏟아 넣었다.
장목화는 그제야 게네바의 앞에 놓인 잔에 든 액체가 커피보다 훨씬 더 진득진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커피 향에 섞여 느껴졌던 익숙한 냄새의 정체도 깨달았다. 바로 기름 냄새였다.
‘게네바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윤활유를 마시고 있는 거야?’
장목화와 백새벽은 이 상황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성건우와 용여홍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법 대사가 설법하면서 그의 체내에 윤활유를 흘려 넣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눈동자의 파란 빛을 몇 번 부드럽게 깜빡이던 게네바가 말했다.
“정말 맛있군.”
“⋯⋯.”
장목화는 뒤틀리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용여홍이 막 팀장을 따라 커피라는 것의 맛을 보려 한 그때였다.
쿵쿵쿵-
아주 작은 인영 하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1미터가 겨우 넘을 듯한 아주 작은 로봇이었다.
금속 골조는 은백색이었고, 옅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서 머리엔 귀여운 털실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아빠, 아빠.”
게네바에게로 달려오던 작은 로봇은 균형을 잃고 콰당, 넘어졌다.
“조심해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게네바는 곧장 다가가 작은 로봇을 안아 일으키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용여홍은 움푹 파인 걸 넘어 살짝 갈라진 황갈색 바닥을 멍하게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려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음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쓴맛이 밀려왔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음료야?’
정신이 번쩍 드는 맛에 용여홍의 얼굴이 팩 구겨졌다. 본능적으로 입에 머금은 커피를 뱉고 싶어졌다. 그러지 않으면 독살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본인 집도 아니고, 커피 역시 자신이 고른 음료였다.
대접한 음료를 주인 면전에서 뱉는 것보다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을까. 용여홍은 그저 억지로 쓴맛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커피를 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좌우를 살피던 용여홍은 방금 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백새벽의 얼굴도 만만치 않게 구겨진 것을 보았다.
‘그래, 내가 까탈스러운 게 아니야.’
용여홍은 그녀의 모습으로 본인을 위로했다.
그때, 장목화는 팀원들이 원액 그대로의 커피를 맛본 것을 발견하고, 그제야 깜빡했다는 듯 작은 종이 포장들과 은색 주전자를 가리켰다.
“깜빡했네, 우유랑 설탕 넣어 마셔도 돼.”
‘그랬구나.’
이 끔찍한 음료에 어느 정도 탐구 정신을 느낀 용여홍은 커피를 머금은 채 종이 포장 하나를 풀었다. 안엔 육각형 모양으로 압축된 설탕이 있었다.
“보통 하나만 넣는데, 단 게 좋으면 두 개 넣어도 돼. 더 많이 넣어도 되고.”
장목화는 용여홍의 상태를 확인하며 점점 개수를 늘려서 말했다.
‘이 설탕 한 조각을 그대로 넣는다고? 되게 사치스럽네.’
용여홍은 반고 바이오에서 이렇게 풍족한 삶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보조금과 포상을 받고 한동안 사치를 부리며 수시로 사탕을 먹고, 단 음료를 마시긴 했어도 끓인 맹물에 이렇게나 많은 설탕을 넣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용여홍은 절약 정신을 발휘해 각설탕 하나만 커피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커피를 마셔보니 확실히 쓴맛이 좀 덜해졌다. 오묘한 향도 느껴지는 듯했다.
용여홍은 설탕을 넣고, 백새벽은 우유를 넣어 쓴맛을 수습했지만, 성건우는 부동자세로 앉아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넌 안 넣어?”
성건우가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씁쓸한 맛이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네요.”
‘이건 또 무슨 경우냐⋯⋯.’
멍한 표정을 드러낸 장목화는 더는 그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백새벽과 용여홍이 각자 기호에 맞춘 커피의 맛에 조금씩 표정이 풀어지자, 성건우는 그제야 주전자를 들고 이미 반쯤 비운 자신의 잔을 90퍼센트 가까이 채웠다. 마지막으로 설탕도 한 조각 넣었다.
“씁쓸한 맛이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된다며?”
장목화가 참지 않고 물었다.
“이미 정신이 말짱해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필요가 없죠.”
성건우의 답은 진지했다.
‘옳은 말이야. 아주 일리 있는 말이네⋯⋯.’
장목화는 말없이 게네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엉엉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다 달랜 게네바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 딸, 루이더스야. 신력 41년에 태어났지.”
‘조립했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용여홍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또한 게네바는 그제야 커피를 맛본 구조팀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커피를 처음 마시면 다들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꼭 커피를 마셔본 것처럼 말하네.’
장목화와 용여홍, 백새벽이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성건우가 진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당신이 마시는 건 뭐지? 우리가 마시는 거랑은 다른 것 같은데.”
게네바는 합성음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지능인들은 너희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 이건 커피 냄새를 더한 윤활유야. 이게 우리 체내에 들어가면 센서 여러 개가 상응하는 정보를 포착한 뒤, 해당 정보를 메인 모듈에 전송해 정확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줘. 그래서 우린 너희랑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정말이야.”
이 순간 용여홍은 정법의 설법을 마주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말을 마친 게네바는 고개를 숙여 딸 루이더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밥 먹었으면 공부해야지.”
“좀 더 놀면 안 돼요?”
은백색의 작은 로봇 루이더스가 애교를 부렸다. 평범한 여자아이 목소리와 똑같았지만, 합성음에 담긴 감정은 없었다.
용여홍은 꼭 대사 처리가 형편없는 배우들이 하는 공연을 보는 것만 같았다. 반고 바이오에서도 연말마다 짧고 굵은 연극이나 오페라를 상연하곤 했다.
“안 돼.”
게네바가 인내심 있게 타이른 결과, 마침내 루이더스도 30분 동안 공부하는 데 동의했다.
이내 게네바는 만족스럽다는 듯 딸의 머리를 열더니 옷 주머니에서 꺼낸 칩 하나를 그 안에 꽂았다.
“⋯⋯.”
이 광경에 구조팀 전원의 표정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아, 물론 성건우는 예외였다.
그는 연신 부러워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지식을 주입할 수 있다면. 공부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딸이 공부하는 동안, 게네바는 다시 구조팀에게 눈길을 돌렸다.
“방금 이야기했던 것들 말고 더 할 이야기 있나?”
이미 게네바에게 정보를 얻어낼 방법을 고안해뒀던 장목화는 이 순간 번뜩 일련의 생각을 떠올렸다.
‘여러 방면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하면, 타르난의 지능 로봇들 대다수가 인간을 흉내 내 가정을 이루는 걸 좋아한댔어.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지능 로봇은 매우 공정하고 공평한 모습을 보이고.
게네바는 인간의 군복을 입고 있는 데다, 아내와 아이도 있고, 커피 향이 가미된 윤활유를 마셔. 이런 지능 로봇을 마주한 상황에서 화술을 이용해 논리에 허점을 만들어내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야.’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향해 눈짓했다.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역시 이런 상황에선 건우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성의를 보이는 게 나아.’
결정을 내린 장목화는 웃으며 게네바의 질문에 답했다.
“머신 헤븐에 메인 브레인이 한 대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 말에 커피를 마시며 그 독특한 맛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던 용여홍은 하마터면 입에 들어온 액체를 그대로 뿜어낼 뻔했다.
‘너무 직접적인 거 아냐? 그게 머신 헤븐의 기밀 사항이면 어쩌려고! 게네바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당하지 않을까?’
게네바는 커피향 윤활유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파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장목화와 성건우를 비롯해 나머지 두 사람 얼굴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7, 8초 후에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솔직하군. 우리가 자발적으로 외부에 메인 브레인의 존재를 밝힌 적은 없지만, 특정 합작 파트너들은 알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메인 브레인에 대해 묻는 이유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조직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세계를 찾고 있는 유적 사냥꾼 팀이야. 신세계의 대문을 찾기 위해서는 구세계 유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머신 헤븐의 메인 브레인을 통해 구세계 파괴 전후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거야. 그건 그 당시에도 가동되고 있었을 테니까.”
게네바도 그 이유를 인정했다.
“그런 거라면 이해가 돼. 난 신세계를 찾으려 하는 수많은 유적 사냥꾼 팀을 만나봤거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뗐다. 그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소유자였지만, 그 목소리에서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첫째, 현재 그건 더 이상 메인 브레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지금은 소스 브레인이라고 불리지. 둘째, 난 소스 브레인을 대신해 너희들과의 만남을 결정할 수 없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상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할 뿐이야. 답변이 올 때까지는 하루에서 사흘 정도 걸리겠지.”
그의 발음은 매우 정확했기 때문에 구조팀원들은 소스 브레인이라는 단어를 분명히 알아들었다. 다만 소스라는 것이 양념을 말하는 것인지, 근원을 말하는 것인지는 약간 헷갈렸다.
그러자 게네바가 손가락 끝으로 붉은빛을 발하며 응접실 맞은편에 걸린 기이한 장막에 글자를 적었다. 소스는 근원을 뜻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