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새로운 섬
물을 긷는 일을 맡은 이는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검은색 생머리를 길게 기른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밖에서 모험만 한 유적 사냥꾼답지 않게 온화하고 지적이었다.
‘골동품 학자? 역사 연구원? 자연과학자? 안전하게 치랄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보호해달라고 강력한 유적 사냥꾼 팀을 고용한 건가?’
장목화는 그들에게 시선을 거두며 추측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맞은편에 자리한 그 유적 사냥꾼 팀에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장목화 역시 성건우에게 상대를 자극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양측은 서로를 경계하며 어느 정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는 같은 수원지에서 만난 상인단과 유적 사냥꾼 팀이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의가 있는 것도 아니며,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닌 이들에겐 무슨 목적을 위해 모여야 하거나, 길을 묻거나, 정보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서로 대화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상대가 불을 피우고 저녁밥을 해 먹자, 장목화는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먼저 당직을 서라고 했다. 그녀와 성건우는 가장 위험하고 가장 경계가 느슨해지기 쉬운 시간에 불침번을 설 생각이었다.
지프에 오른 성건우는 별말 없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잠들었다.
레드스톤 마켓을 떠나기 전, 강화된 능력에 막 익숙해진 성건우는 기원의 바다에 한 번 더 들어가 그다음 섬으로 향한 바 있었다.
* * *
미약한 빛이 번득이는 허상의 바다.
성건우는 여러 자세로 바꿔가며 이 지루한 여정을 나름대로 즐겼다.
자유형, 배영, 개헤엄, 때로는 인어처럼 유영하며 한참 동안 끝없는 바다를 헤엄쳤다. 그러던 그때, 성건우의 눈앞에 한 섬이 나타났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는 이 섬은 이전까지 그가 만난 두 개의 섬에 비하면 천국과도 같았다.
그 섬에 오른 성건우는 다가올 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두려움에서 비롯된 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경쟁하기로 했다.
따뜻한 햇볕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노곤한 졸음이 몰려왔지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없는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성건우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기원의 바다를 떠나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
성건우는 눈을 번쩍 뜨고 지프차 앞 좌석을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벌렸던 입을 다물고 눈도 다시 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잠이 들었다.
* * *
날이 밝을 때까지 불침번을 선 장목화는 팀원들과 포로들에게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각자 차에 오른 그들이 느릿하게 산골짜기 출구로 향하던 그때, 맞은편에 기계 개조를 한 듯한 남자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입을 열어 외쳤다.
“서남쪽으로 가는 거냐?”
“맞아!”
성건우가 차창을 내리고 답했다.
남자는 차가운 금속으로 이뤄진 오른 얼굴을 매만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회해서 가는 게 좋을 거다. 치랄 산 서남쪽 구역에 고등 무심자 한 명이 출현했거든.”
고등 무심자? 장목화도 보조석의 차창을 내렸다.
“언제 있었던 일인데?”
민스와 십방 상사 사람들은 타르난에서 나온 뒤 그 구역을 거쳐 임해 연맹에 돌아갔을 것이었다.
곧이어 얼굴 절반이 은백색 금속으로 이루어진 남자가 답했다.
“최근에.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건 아니야. 어제 막 그 구역에 진입했지.”
순간 뭔가를 깨달은 장목화가 캐물었다.
“변이된 무심자야, 아니면 무심병에 걸린 각성자야?”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유적 사냥꾼 몇 팀이 끔찍한 죽음과 부상을 입고 얻어낸 귀한 정보지.”
남자는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는 계속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대신 크게 외쳤다.
“고마워!”
“고맙다!”
성건우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 * *
산골짜기를 나온 장목화가 요르겐센이 탄 차를 멈춰 세우고 그들에게 우회로를 묻기도 전,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세 번째 섬을 봤어요. 근데 굉장히 이상하더라고요.”
‘왜 일찍 얘기 안 했어?’
장목화는 이 질문부터 하려다 부드럽게 물었다.
“뭐가 이상했는데?”
성건우는 자신이 본 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어려운 상황도 없고, 괴물도 없었어요. 어딘가에 숨은 채 자기 체면을 살리면서 투항할 방법을 상의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요.”
그의 마지막 말은 무시해버린 장목화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좀 이상하네. 그건 어떤 트라우마가 투영된 걸까? 몇 번 더 시도해보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봐.”
장목화는 끝으로 성건우를 보며 제안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전제 조건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몸으로 부딪쳐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이때 성건우의 옆에 앉은 용여홍이 웃으며 말했다.
“그 섬은 휴식을 위한 곳 같은데.”
“그럴 리 없어. 기원의 바다 안에 있는 모든 섬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기원의 바다에 들어간 게 너였다면 난 그 섬이 어떤 심리에 대응하는지,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단박에 추측할 수 있었을 텐데.”
장목화는 이제 용여홍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섬일 것 같은데요?”
성건우가 물었다.
용여홍은 팀장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작은 빨강이의, 의지가 썩어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영된 섬이겠지. 생각해봐,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그곳에는 넓고 예쁜 집도 있고, 여러 가지 음식도 있어.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거야. 예쁜 아내도 있고, 모든 친척, 친구들도 있고, 손님도 수시로 찾아와.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작은 빨강이는 원대한 야망도 잊고 계속해서 힘써 노력하려는 의지도 잊게 될걸.”
‘그게 다 갖춰져 있다면 더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어디 있어? 그게 바로 내가 이렇게 분투하는 목적인데.’
용여홍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감히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달지기의 은혜라고 생각할걸요.”
성건우도 동조했다.
용여홍은 그에게 반박하는 대신 작은 목소리로 틀린 부분만 고쳤다.
“달지기가 아니라 하늘.”
그는 어떤 달지기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 그성 달지기의 은혜가 아니라 하늘의 은혜일 것이다.
선을 지킬 줄 아는 장목화는 계속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대신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 섬이 정말 네 의지를 부식시킬까?”
“그냥 지겹기만 하던데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눠봤음에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장목화는 무전기 버튼을 누른 뒤 뒤따라오는 차에게 말했다.
“아까 그 유적 사냥꾼의 경고, 너도 들었지?”
연못 맞은편에 묵었던 그들이 유적 사냥꾼이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황량한 야외에서 마주친 이라면 그게 누구든 유적 사냥꾼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딱히 상관없었다.
이윽고 요르겐센이 출발하기 전 백새벽이 그에게 넘긴 예비용 무전기에 대고 열정적으로 답했다.
- 들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곳은 타르난에서 매우 가까우니까요. 머신 헤븐에서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지능 로봇 경비를 보내 문제를 처리할 겁니다. 그들은 고등 무심자도 두려워하지 않죠.
‘각성자도 두려워하지 않겠지.’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모르겠습니다. 타르난에서 그 소식을 언제 접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요르겐센이 솔직하게 답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 구역을 우회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어?”
- 있습니다. 한나절 정도 더 걸리는 길입니다. 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트럭 같은 차는 다닐 수가 없죠. 하지만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차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요르겐센은 길잡이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다른 동료들처럼 양손이 묶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이어 뒤에 있던 포로들의 차가 앞서 나가자, 용여홍은 아무래도 걱정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만약 그 고등 무심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우리가 선택한 우회로를 막아서면 어떡하지?’
야수가 아닌 고등 무심자에게 고정된 활동 구역 같은 건 없었다. 설령 야수라고 해도 자극을 받았을 때는 이주를 하는 법이었다.
그래도 용여홍은 이러한 질문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말이 씨가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성건우는 입방정을 떤 용여홍을 보고 고소해하며 이렇게 한탄할 게 뻔했다.
‘휴, 이게 바로 좋지 않은 이름의 위력이라니까?’
* * *
용여홍이 하고 싶었던 질문을 꾹 참아서 그런지, 구조팀 여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만 워낙 거친 길에 속도가 매우 느려진 데다, 수시로 마주하는 장애물을 치우기까지 해야 해서 시간은 좀 적잖게 낭비되었다.
저녁 무렵, 오래된 돌다리를 지나친 뒤 요르겐센이 무전을 보내왔다.
- 남쪽으로 30분 정도만 더 가면 타르난입니다.
이렇게 순조롭다고? 용여홍은 이러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내 불안해했지만, 여정에서 뜻밖의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 * *
구조팀과 포로가 타르난에 도착한 건 하늘이 새카매진 후였다.
강에 걸쳐 있는 이 작은 도시에 높이 솟은 건물은 많지 않았고, 회백색의 가지런한 길에는 흠 하나 없었다.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보호해줬나 봐.”
장목화의 말에 성건우가 바로 반박했다.
“아니죠, 행운의 작은 빨강이가 보호해준 거예요.”
“쟤가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운전대를 잡은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들 하지⋯⋯.’
용여홍은 유약한 외침을 속으로 삼켰다.
다행히 타르난에 진입한 이후, 장목화와 성건우의 신경은 지능 로봇의 지배를 받는 이 작은 도시에 쏠렸다.
깔끔한 시멘트 길 양옆으론 가로등이 하나하나 세워져 있었다. 깊은 밤하늘 아래, 가로등 빛은 꼭 땅에 내려앉은 별처럼 보였다.
인도 바깥쪽으로는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해봤자 15, 6층 정도밖에 안 되는 듯했다.
일부 건물에는 반쯤 폐쇄된 정원이 딸려 있었다. 정원을 감싼 담장은 낡았지만, 그래도 꽤 깨끗한 편으로 틈새에서 자라난 풀도 없었다.
그 모습에 구조팀은 자연스레 늪 1호 폐허를 떠올렸다. 등불이 켜진 이후의 그곳 광경은 이곳과 매우 비슷했다. 물론 규모는 더 크고, 충격적이었지만.
이때, 약간 복잡해 보이는 붉은색 트럭 한 대가 사거리에서 이쪽으로 꺾어져 들어오더니 불이 꺼진 가로등 옆에 섰다.
다음 순간, 이 소형 트럭은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스스로를 지탱하던 트럭은 천천히 각 부분을 펼치더니, 특정 부위를 새롭게 조립했다. 그리고 약 3, 40초가 지났을 때 트럭이 5, 6미터 정도 높이의 로봇으로 변했다.
로봇은 빠르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안정적인 모습으로 망가진 가로등을 분리하고 회로를 검사했다.
지프차 안, 구조팀 네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씩 다 달랐다.
성건우는 흥분과 호기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고, 장목화는 놀라움과 열망을 느꼈으며, 백새벽은 충격과 의혹을, 용여홍은 혼란과 경이로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