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포위
-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난 정말 배가 고파⋯⋯. (* 뤄톈이, <배고파 송>)
성건우의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지프 안을 가득 메웠다.
같은 소리라도, 용여홍에겐 왠지 다른 가사로 꽂혔다.
‘목말라, 목말라, 목말라, 난 정말 목이 말라⋯⋯.’
산악 지대에선 정말로 물이 부족했다. 지금은 또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겨울이라 상황은 더 심각했다.
하루 전 비축해둔 물을 모조리 마셔버린 구조팀은 여태 수원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흔적을 따라 벌써 두 군데나 방문했지만, 그렇게 발견한 물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돼 있었다. 일부 오염 지수는 기준치를 몇 배나 초과했다.
그래도 일부 나무들에서 얻어낸 극소량의 수분을 통해 급한 불은 껐으나, 이는 아직은 목이 말라 죽을 상황은 아니라는 뜻일 뿐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수원지가 나올 거야.”
장목화가 창밖의 환경과 지리를 살피며 자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맞아요.”
백새벽도 동의했다.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에서야 목마름이 어인이나 산 요괴의 공격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라는 걸 깨달았다. 전자는 그 상황이 지속되지만, 후자는 단 몇 분 만에 결말이 나버리니 그만큼 고통도 짧게 느낄 뿐이었다.
용여홍은 침이라도 삼키기 위해 말조차 삼갔다. 반면 운전대를 쥔 성건우는 여전히 힘이 넘쳐 보였다. 입술이 조금 말라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심각한 물 부족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했다.
“아, 용왕 가면을 살걸. 그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을 텐데.”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레드스톤 마켓을 떠난 이후 네 사람은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았다. 성건우만 이따금 의기양양해 보이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용여홍을 놀릴 뿐이었다. 심지어 원숭이 소리까지 내며 용여홍을 바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용왕은 직접 비를 내릴 수 있어. 굳이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장목화가 조용히 성건우의 말을 고쳐주었다.
* * *
전방의 높은 절벽을 우회한 구조팀은 이제 갈색 흙이 촉촉하게 젖은 듯한 골짜기에 진입했다.
“속도 낮춰. 시야가 탁 트이지 않은 곳이야. 빠른 속도로 돌아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장목화가 곧장 지시했다.
그녀와 성건우의 감지력엔 거리의 제한이 따르는지라 만능은 아니었다.
성건우는 보조석의 장목화를 바라보면서 엑셀레이터에 올렸던 발을 떼고 차의 속도를 낮췄다. 그는 팀장의 명령에 꽤 순종하는 편이었다.
국방색 지프차는 흙길을 따라 천천히 그 절벽을 우회했다.
그리고 순간, 성건우와 장목화는 눈앞이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구불구불 흐르는 작은 개울이었다. 맑은 개울물 아래로 자갈과 조약돌이 훤히 비쳐 보였다.
개울의 양옆으론 큰 바위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채운 진흙과 모래는 주위 구역의 주조색을 이뤘다.
그보다 더 바깥쪽으론 나무들이 있었다. 더러는 시들어 있었지만, 아직 녹음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론 진흙이 깔린 길이 하나 끼어있었다.
이내 장목화의 시선이 개울 상류 쪽으로 향했다. 이곳으로부터 100미터 떨어진 곳에, 사람들 수십 명이 있었다. 남자가 주를 이룬 무리인데, 입은 옷도, 가진 무기도 가지각색이었다.
낡은 솜옷, 더러운 다운재킷, 기름때로 번들거리는 가죽 코트 등 그 다양한 옷차림을 스쳐, 장목화는 차 여러 대와 천막 여러 채도 발견했다.
보통 무기를 가진 이들은 여유롭게 물을 긷거나, 점심을 준비하거나, 바닥에 앉아 큰 소리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딘가를 훑던 장목화의 눈빛이 돌연 차갑게 식었다. 그 무리가 양손이 묶인 여자를 거침없이 희롱하며, 분노에 찬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남자 포로들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강도단이에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백새벽이 앞 유리 너머 상황을 살피며 말했다. 무리는 방금 막 상인단이나 황야유랑자 거점을 턴 대형 강도단으로 보였다.
그리고 구조팀이 강도단을 막 알아봤을 때, 강도단에서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한 사람도 네 사람을 발견했다.
“두목, 새로운 사냥감입니다!”
검은 머리에 눈동자가 파란색이 한 강도가 잔뜩 흥분한 채 우두머리에게 네 사람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겨울이 되면 상인단은 줄고 각 거점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기에, 강도단은 내내 얻은 게 몇 없었다. 그래서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지기가 친히 굽어살피기라도 했는지, 강도단은 오전에 이미 한 상인단을 털며 적지 않은 물자와 사람을 약탈했다. 그러다 또 이 골짜기로 알아서 굴러들어온 지프차 한 대까지 마주한 것이었다.
강도단 우두머리는 30대 남자였다. 175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긴 금발을 멋대로 늘어뜨린 그는 몸이 상당히 튼실하고 우락부락한 편이었다.
또 눈동자가 매우 옅은 파란색인데다 위협적이고 거칠게 생긴 그의 머리엔 어느 폐허 도시에서 찾아냈는지 모를 쇠뿔이 달린 투구가 씌워져 있었다.
부하의 보고에 지프로 시선을 돌린 우두머리가 호탕하게 웃었다.
“사자 소굴에 들어온 새끼 양과 다를 바가 없군. 가라, 가서 저들을 데려와. 겨울에 감히 이 치랄 산을 넘으려 한 여행자가 어떤 놈인지 봐야겠다.”
이곳은 구산의 산줄기 중 하나였다.
그러다 잠시 또 뜸을 들이던 우두머리가 덧붙였다.
“차 넉 대를 보내. 어쩌면 어느 상인단의 선발대인지도 모르니까.”
그 뒤에 더 많은 차와 더 많은 인원, 더 많은 무기가 있을 수도 있었다.
“예, 두목!”
강도는 큰 소리로 답하고 동료들을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국방색 지프가 후진으로 골짜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방향을 돌려 나가는 방법도 잊은 듯했다.
“하하!”
강도들은 각종 기괴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무기를 휘두르며 준비된 차로 향했다. 무리는 보통 저렇게 겁을 먹은 사냥감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 사냥감이라면, 총알을 적잖게 아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에 올라탄 강도들이 목표를 쫓기 시작하자 이미 포로로 잡혀 있던 남자와 여자들은 희망 섞인 눈빛을 거둬들였다. 구원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마주한 건 지프 한 대뿐이었다. 그러니 기대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국방색 지프는 그저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다 물을 얻기 위해 골짜기로 들어온 유적 사냥꾼 팀의 차처럼 보일 뿐이었다.
잔뜩 흥분한 듯 환호를 내지르던 십수 명의 강도들은 SUV 두 대와 픽업트럭 두 대를 나눠타고 모퉁이로 미친 듯 돌진했다. 사냥감이 그들의 시야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맨 앞에 선 차가 막 방향을 튼 그때였다. 돌연 그 차를 몰던 기사의 눈빛이 굳어졌다. 국방색 지프가 수십 미터 밖에 얌전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스듬히 세워진 차체는 마치 낮은 벽처럼 보였다.
지프 뒤쪽엔 결코 키가 작지 않은 남자가 동료의 도움 아래 검은색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었고, 지프 측면엔 키가 좀 아담한 여자가 보닛에 소총을 받쳐두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 지프 반대편엔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 회색 제복을 입은 여자가 어깨에 묵직한 개인용 바주카포를 멘 채 반쯤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주카포……?’
가장 먼저 달려온 운전기사와 강도들의 눈이 일제히 커다래졌다.
다음 순간,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광!
개울가에서 수하들이 사냥감을 잡아 오기만 기다리던 우두머리는 노르스름한 자체 제작 담배에 막 불을 붙이던 순간, 귓전을 때리는 굉음을 들었다.
그러자 담배가 그의 입에 물리기도 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불덩어리 하나가 급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이내 그 붉은 불덩어리는 맨 앞에 서서 막 방향을 틀려고 했던 그 픽업트럭의 전면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이 광경은 마치 유화처럼 모든 목격자의 눈에 새겨졌다.
펑!
두 번째로 나섰던 SUV는 미처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 이미 불타오르고 있는 픽업트럭과 충돌했다.
콰광!
충격으로 양측 유리창이 깨졌을 때, 총알 하나가 운전석으로 파고들었다.
총에 맞은 기사의 몸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사이, 멀찍이 있던 우두머리는 이미 반쯤 미쳐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함정이다! 이건 함정이야! 우리는 이미 포위된 거야!’
* * *
전방의 차 두 대를 따라가던 SUV와 픽업트럭은 다행히 제때 멈춰 섰다. 차 바퀴에서는 부연 모래 먼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 차에 탑승해 있던 강도들은 알아서 문을 열고 굴러떨어지듯 나와 황급히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차 안에서 허리를 바짝 숙이고 있으면 적의 총에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앞차의 폭발을 목격한 그들은 이런 상황에선 차 안에 남아있는 것도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차는 말하자면 움직이는 관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개울 상류, 강도들이 모인 이곳에선 포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위치로 향하는 한편 황급히 모퉁이 쪽을 겨눴다. 경험이 많은 강도라, 뜻밖의 상황을 마주했어도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골짜기 모퉁이,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돌연 시끄러운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듣는 이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빠르고 리드미컬한 음악이었다.
그 둥둥 울리는 북소리 속에, 강도들 눈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175센티미터 정도로 보이는 키에, 목과 가슴, 배는 전부 검은색 장갑으로 뒤덮여 있었고, 사지 역시 금속 골격에 싸여 있었다. 또 등에 멘 거대한 에너지팩이 어렴풋이 보였으며, 머리에 쓴 고글에선 붉은색 빛이 번득였다.
군용 외골격 장치였다.
우두머리를 비롯해 이 십수 명의 베테랑 강도단 사람 모두가 알아보았다.
이제 강도단의 두려움은 끝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그다음 순간, 초연이 피는 이 골짜기로 사내의 거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 봉화가 피어나, 북쪽을 바라보면⋯⋯. (* 도홍강 ‘정충보국’)
이 음악이 이어지는 와중, 용여홍은 위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이로 인해 그가 있던 곳에 쏘아진 총알은 전부 허공만 때렸다.
붕 떠오른 용여홍은 음악에 맞춰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한쪽 손을 늘어뜨렸다. 들어 올려진 건 경량형 기관총이 달린 왼팔, 늘어뜨린 것은 유탄 발사기가 장착된 오른팔이었다.
다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총알이 차에 구멍을 내고 유리를 깨뜨리는 가운데, 멀찍이 자리한 강도단의 주력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기관총이 총알을 미친 듯이 뿜어내는 사이 발사된 유탄 한 발이 두 번째, 세 번째 차 사이로 날아들었다.
콰광!
아까 전보다는 약간 작은 불덩어리가 폭발하면서 그 주위에 있던 여러 명의 강도를 집어삼켰다.
콰광!
또 한 발 날아든 유탄은 네 번째 차 앞유리창에 박히며 그 차를 산산이 조각냈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도 그대로 끊겨버렸다.
- 용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말이 우는 가운데 서늘한 검기가 피어오른다……. (* 도홍강 ‘정충보국’)
폭발음이 막 사그라들 무렵, 거칠고 호방한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 골짜기 안을 호령하며 퍼졌다.
그 음악과 함께 계획대로 움직인 용여홍은 절벽에 발을 디디면서 개울의 상류로 도약했다.
강도단의 주력들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심지어 유탄 발사기까지 동원했지만 용여홍은 종합 경보 시스템의 도움으로 여유롭게 피했다.
용여홍의 긴장감도 대폭 줄어들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는 이 전장에서 그 위력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