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37화 (237/649)

237화. 떠나다

다음 날 오전, 한명호가 낡아빠진 SUV를 타고 여관 구역에 왔다.

“이게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머신 헤븐 관련 자료야.”

그는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장목화에게 종이 한 더미를 건넸다.

장목화는 곧장 자료를 살피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송 경고자님이 널 찾아가지 않았어?”

한명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얘기 나눴어.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지.”

‘보아하니 생각이 확고한 모양이네.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야.’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이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앞으로 어디로 갈 생각이야?”

“그건 왜 묻는 거지?”

한명호는 경계 교파의 신도가 아닌데도, 레드스톤 마켓에 오랫동안 지내면서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경향에 물든 듯 본능적으로 반문했다. 또 본인 행적에 관한 정보를 흘리지 않는 건, 경험 많은 유적 사냥꾼의 습관이기도 했다.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우린 널 관찰해야 하거든.”

“뭐?”

한명호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성건우는 한발 더 나아갔다.

“친구로서 네 생활을 관찰하고 네 상태에 관심을 두는 건 아주 일반적인 일이잖아?”

“친구라⋯⋯.”

한명호는 그 단어를 낮게 중얼거렸다. 약간 놀란 듯했다.

몇 초 후, 그가 자조하듯 웃었다.

“퍼스트 시티에 가야지. 기회도 아주 많고, 여기보다 더 복잡한 곳이잖아. 나같은 사람이 가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지.”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원에서 아류인 군대를 배양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퍼스트 시티 주민의 미움과 멸시, 배척을 받는 그 군대는 원로원의 권력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버림받는 순간 퍼스트 시티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거나, 광산 구역으로 집단 이주를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원로원의 권력자는 충성심 있고 말도 잘 듣는 데다 전투력도 강한 군대를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이만 갈게.”

한명호가 짧게 답하고 등을 돌렸다.

“나중에 퍼스트 시티로 찾으러 갈게!”

성건우는 아쉬워 죽겠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몇 걸음 나아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자리에 멈춰선 한명호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보자고.”

“또 봐.”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도 그의 인사에 응했다.

* * *

한명호는 느릿하게 숨을 토해낸 뒤 SUV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이후 그는 폐허 도시 서쪽으로 달린 끝에 호숫가 공터 지대에 이르렀다.

이곳엔 도시 경비대원들이 과녁 여러 개에 순서대로 총을 쏘고 있었다. 거기에 엎드려쏴, 무릎쏴, 서서쏴 자세로 바꿔가며 끊임없이 각기 다른 자세에서의 사격 실력을 단련하는 중이었다.

“한 대장님.”

차에서 내린 한명호를 발견한 휴식 구역 경비 대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일부 대원은 레드리버어를 쓰고 있었다.

한명호는 약간 멍한 표정을 보이다, 이내 웃음을 지었다.

“어때, 훈련은 잘돼가나?”

그는 레드리버어로도 질문을 반복하며 모든 대원을 공평하게 대했다.

무표정한 도제훈이 앞으로 두 걸음 나왔다.

“최근 모든 대원의 실력이 적잖게 높아졌어. 함께 훈련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일의 효율도 높아졌지.”

지난 3년간은 애쉬랜더와 레드리버인 사이의 갈등과 경계, 숨기에 대한 숭배심으로, 갖은 힘을 들여도 같이 훈련하는 집단을 조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명호는 시간을 나눠 경비대원들을 차례대로 훈련시켰다.

이번 아류인 연합군의 습격으로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은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지 않고 한데 모여 훈련을 받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수많은 친척과 친구를 잃고 붉은 피와 시체가 낭자했던,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한 이번 참사에 큰 자극을 받은 탓이었다.

한명호의 의지로, 애쉬랜더와 레드리버인을 섞은 조를 짜, 전쟁의 위기 속 상대에게 의지하며 서로를 도운 끝에 마침내 그들은 신뢰를 쌓았다.

한명호는 재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훌륭해.”

이때, 노란 머리의 레드리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한 대장님, 지금은 탄약만 좀 부족한 상황입니다.”

마을 경비대에서 쓸 탄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류인 연합군이나 강도단이 돌연 기습해올 때 쓸 여유분을 남겨두어야 했기에 실탄 훈련을 충분히 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한명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앙헤바스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마을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에 레드리버인, 애쉬랜더 할 것 없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레드리버어로만 한 말이지만, 애쉬랜더들도 그 정도의 레드리버어는 알아들었다.

“예, 한 대장님!”

몇몇 경비대원들이 각 잡힌 태도로 대답했다.

지시를 마친 한명호는 과녁이 세워진 사격장 쪽으로 걸어갔다.

도제훈이 그의 곁을 따랐다.

“이번 사건 이후로, 대원들은 너를 진짜 대장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어. 네가 있던 그 방어선이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었잖아.”

도제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한명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걷는 내내, 한명호를 본 사격장 대원들 모두 곧장 돌아서 인사를 건넸다.

“한 대장님.”

“한 대장님.”

“한 대장님.”

그렇게 사격장 끝까지 걸어간 한명호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뜬 그가 다시 돌아서 사격장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머리 색의 레드리버인과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애쉬랜더들은 이곳에 다 함께 모여 있었다. 아직 서로에게 어색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고,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따금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눴다.

시선을 거둔 한명호가 도제훈에게 말했다.

“대원들 잘 보고 있어.”

“알겠어.”

도제훈은 사격장 밖 검은 SUV로 향하는 한명호를 눈으로 배웅했다.

* * *

차에 오른 한명호는 그 자리에 수십 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제야 시동을 걸고 레드스톤 마켓으로 향했다.

지하로 들어가 자를 댄 그는 전방을 보며 천천히, 또 깊게 호흡했다.

곧이어 차에서 내려 레드스톤 마켓 내부로 들어간 한명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도중에 구세계에서 남긴 광고판을 지나치던 그가 그 표면에 노크했다.

“무슨 일 없지?”

한명호가 쿵쿵 울리는 메아리와 함께 물었다.

“없습니다. 정상입니다.”

금속 광고판 안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교대해가면서 휴식 취하는 거 잊지 말고.”

말을 마친 한명호가 바로 맨 아래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려는데, 금속 광고판 안의 치안소 직원이 외쳤다.

“한 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순간 멈칫한 한명호가 느릿하게 돌아서며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한명호는 그제야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웰러가 없는 치안소에 있는 사람이라곤 어딘가에 숨은 직원 둘뿐이었다.

한명호는 자신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잠시 그것을 응시하더니 옷 주머니 안에서 편지 한 통을 천천히 꺼냈다.

신중히 편지를 꺼낸 그는 물이 들어 있지 않은 컵으로 그것을 눌러 놓은 다음, 익숙한 책상과 의자, 등, 가구, 벽 등을 느릿하게, 자세히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쉰 한명호가 그대로 돌아서 문밖으로 향했다.

* * *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한명호는 고개를 들어 텅 비어 보고 냉랭해 보이는 이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마을을 나온 그는 낡은 SUV를 폐허 도시 서북쪽으로 몰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시야로 폐허 가장자리의 구릉이 들어왔다.

한명호는 조건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SUV를 세웠다.

후시경에 비친, 온전하지 않으며 적막한 폐허 도시 가장자리는 거의 한낮이 다된 이때, 옅은 금빛 외투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겨울 햇빛이 선사한 금색 이부자리라고 해야 할까.

그 전경을 한동안 지켜보던 한명호는 시선을 거두고 옆에 놓인 소총을 만지작거리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뗐다.

다시 달리는 차 안에서, 한명호는 전방의 구릉과 황폐한 들을 보았다.

그렇게 SUV는 아무도 없는 애쉬랜드를 질주하고 있었다.

* * *

머신헤븐과 관련한 자료를 받은 구조팀은 경계 교회당으로 가 송하균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들은 어젯밤 이곳에서 거행된 안혼 의식에 참여해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었다.

경계 교파의 안혼 의식에 숨바꼭질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의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슬픈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듯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성건우는 숨바꼭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고 진지하게 의식에 참여했다.

교회당에서 나와 지프에 오른 용여홍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부근의 무너진 건물 위를 돌고 있는 소년들을 발견했다.

그중엔 노란 머리의 비엘도 포함돼 있었다.

“하, 어른인 줄 알았네.”

이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용여홍은 비엘의 나이를 잊을 뻔했다. 사실 비엘의 신비로운 행적과 기이한 말 때문에 그 나이를 기억하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통풍관 속에서 현실을 관음하길 좋아하는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 또래의 녀석들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저 녀석, 분명 뭔가가 있어. 하지만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조사해야 하는 현지 치안관이 아니니까.”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한편 오늘의 운전대는 백새벽이 잡고 있었다.

성건우는 잠시 고개를 돌려 경계 교회당을 눈에 담았다. 이대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뭔가 미련이 남아?”

장목화가 물었다.

“아직 이곳의 어인, 산 요괴, 애쉬랜드인, 그리고 레드리버인이 조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장목화가 대꾸했다.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야. 게다가 송 경고자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잖아. 우리가 여기 다시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머신헤븐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르게 될 테니까. 그때는 상황에 따라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순간 흥분한 듯 외쳤다.

“그럼 모든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래요. 내가 돌아왔다!”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용여홍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미 짐을 다 꾸린 구조팀은 다시 여관 구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지프는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머신 헤븐이었다.

* * *

교회당 밖.

비엘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 무너진 건물 가장자리에 앉아 투덜거렸다. 소년의 눈동자는 흑녹색이었다.

“우리 아빠를 묻을 때 왜 안 왔어? 우리 친구 맞아?”

그와 같이 무너진 건물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비엘이 입을 비죽거렸다.

“내가 그 아저씨 싫어하는 거 알잖아. 맨날 내 키를 가지고 놀렸다고.”

* * *

지프는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높은 산과 험준한 언덕 사이, 가까스로 보존되긴 했으나 딱히 유지는 잘되지 않은 도로였다.

오늘 구조팀의 목적지는 타르난이라는 곳이었다.

머신 헤븐에서 설립한 유일한 대외 무역지인데, 이곳의 존재는 그들의 신임을 얻은, 혹은 중요한 전략 물자를 제공한 세력만 알고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과 위드 시티도 그중 하나에 속했다.

반면 운송을 주업으로 하는 무근자 상인단에는 자격이 없었다. 머신 헤븐은 운송 수단이 부족하지 않은 대형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의 현재 신분은 위드 시티의 무역 대표였다. 이 신분은 성건우 형제회 위드 시티 지점의 회장 허양원으로부터 싸게 얻은 것으로, 실제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을 떠나기 전, 이들은 경고자 송하균에게 레드스톤 마켓의 무역 대표라는 예비용 신분을 요구하기도 했다. 허양원이 갑자기 성건우를 형제로 여기지 않게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허양원은 반고 바이오를 봐서라도 장목화와 성건우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머신 헤븐에 그 네 녀석은 전부 거짓말쟁이라는 전보를 보내는 등, 작은 분풀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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