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33화 (233/649)

233화. 접견실

모두가 침묵하던 그때, 성건우가 돌연 무서워 죽겠다는 듯 물었다.

“우리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려는 건가요?”

집사 울리히는 몇 초간 멍한 표정을 보였다.

“디마르코 선생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무기를 가져와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는 건 불가합니다.”

‘자신만만한가 보군.’

겨우 정신을 차린 장목화는 잠깐의 고민 끝에 이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디마르코가 이들을 만나려는 진짜 이유가 뭐든, 이는 분명 얻기 어려운 기회였다. 게다가 지하 방주에 들어가기 전 경계 교회당에 들러 해당 사실을 알리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 * *

밖으로 나와 지프로 향하는 동안 장목화는 의혹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디마르코 선생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건가요? 어젯밤만 해도 저희의 요청을 거절했었는데요.”

울리히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그저 주인님 분부에 따를 뿐이에요.”

장목화가 어젯밤 지하 방주에 평소와 다른 일이 있었는지, 혹은 디마르코가 어떤 소식을 들은 것인지 물으려는데, 성건우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진짜 디마르코 선생이라는 걸 확신하나요? 최근 매일 가면을 쓰고 있다면서요.”

‘좋은 질문이야.’

장목화는 입을 다문 채 울리히의 답을 기다렸다.

울리히가 고개를 돌려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위장을 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습니까? 머리 스타일, 키, 체형까지 흡사하다고 해도 불가한 얘기입니다. 급한 상황에서 짧게 접촉한 것이라면 모를까, 매일 함께 생활하는 사람도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습관, 거동, 취향, 태도, 발음 등 다양한 면면이 있는데 가까운 사람을 속이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전에 그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그렇게 미세한 부분까지 따라 하도록 훈련받지 않은 이상에는 말입니다.

더더군다나 지하 방주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태어났는지까지도 다 하나하나 집계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네요.”

장목화가 울리히의 말에 동의했다.

이후, 각자 차에 오른 그들은 폐허 도시 북쪽 경계 교회당으로 향했다.

* * *

경고자 송하균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구조팀은 울리히를 따라 지하 1층으로 들어갔다. 그중 한 엘리베이터 로비에 이르렀다.

이곳엔 굉장히 묵직하고 두꺼워 보이는 흑회색 엘리베이터 세 대가 배치돼 있었다. 또 그 사이사이엔 크지 않은 액정 화면 두 대가 끼워져 있었다.

울리히가 지하 방주 내부와 영상으로 연락하자 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 내부 상태는 꽤 훌륭했다. 바닥에는 나무가 깔려 있었고, 사방의 금속 벽은 거울처럼 번득였다.

“전용 접견실은 지하 2층에 있습니다. 그러니 방주에서 나갈 때도 훨씬 수월할 겁니다.”

울리히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장목화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성건우를 흉내 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네 사람의 눈앞에는 베이지색 카펫이 깔린 바닥이 드러났다.

구조팀은 두꺼운 카펫과 벽등으로 장식된 복도를 따라가 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곳에는 족히 여덟 명이나 되는 경비가 배치돼 있었다.

그중 둘은 흑회색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 중이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신형 모델인 것 같았다.

‘어쩐지, 무기 소지를 허용하더라니.’

용여홍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하 방주 내부의 화력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울리히는 방문을 두드린 뒤 2초 정도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내도록.”

방 안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목화는 문양이 조각된 붉은 나무 문을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공간의 구조를 상세히 눈에 담았다.

매우 정상적인 접견실로 보이는 이곳은 티 테이블과 소파, 카펫, 장식장, 의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장식돼 있었다. 비교적 호화스럽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특별난 데는 없었다.

이 방엔 오직 디마르코 한 사람뿐이었다.

귀밑머리가 린넨색인 그는 구세계 풍의 검은색 사제복을 입고 같은 색 구식 모자를 쓴 채,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키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옅은 파란색 눈으로 방 안에 들어온 손님들을 슥 훑어보던 디마르코가 티 테이블 맞은편의 긴 소파를 가리켰다.

“앉지.”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울리히는 자리를 떠나 묵직한 문을 닫아주었다.

디마르코가 막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성건우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경계 교파의 신도답지 않으시네요.”

디마르코는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더니 여유로운 자세로 물었다.

“왜?”

카리스마 어린 중저음의 소유자는 구세계 당시 분노의 호수 구역에서 쓰던 레드리버어를 쓰고 있었다.

장목화가 성건우 대신 설명에 나섰다.

“선생의 경비는 전부 문밖에 있어요. 만약 저희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습격에 나선다면,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가 이 방에 들어오기도 전에 선생을 인질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좀 무방비한 상태이기는 하죠.”

디마르코는 몸을 살짝 뒤로 기대며 웃었다.

“내게 충분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 아니겠나?”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은 그 어인 신사보다 더 강하신가요?”

순간 말문이 막힌 디마르코는 몇 초 후에야 답했다.

“어쩌면 이 방에 다른 장치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계속 이러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신,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무늬가 들어간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토했다.

“내가 자네들을 부른 것은 분노의 호수 가운데에 있는 그 섬의 신전, 그리고 염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야.”

‘염호라⋯⋯. 잠들어 있는 그 신?’

“선생은, 아니 선생의 선조는 염호를 알았나요?”

약간 의혹이 생긴 장목화가 반문했다. 그녀는 자신들이 신전을 탐색했다는 이유로 디마르코의 초청을 받게 된 줄은 전혀 몰랐다.

디마르코는 1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은 채 웃었다.

“오래전, 우리 증조부와 조부가 살아계셨을 당시 호수에 있는 그 섬과 염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혼란의 시대 말기, 방주가 외부와 접촉하며 물자 교환을 시작할 무렵, 우리 조부께서는 그곳에 조사 요원들과 주위 구역의 유적 사냥꾼을 파견했어. 아, 당시엔 이런 명칭이 아니었지. 그땐 사냥꾼 길드라는 조직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들은 그 섬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다 염호의 존재를 알게 됐어. 신기하고, 기이하고, 강력한 힘을 선보인 염호는 당시 신으로 대접받았어. 우리도 경계 교파를 받아들이고 에이돌른을 믿은 후에야 그가 굉장히 강력한 각성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초창기 때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아서 호수의 그 섬과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어. 이후 갑자기 봉쇄된 그 섬에서는 누구도 나오지 않았고. 우리 조부와 부친께서도 점차 그 일에 대해 잊게 됐었지. 그 섬의 변화가 방주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으니까.

난 어젯밤 자네들이 그 섬에 가서 염호의 신전을 탐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연 궁금해졌어. 그래서 자네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거야.”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닐 텐데. 겨우 그 정도의 마음으로 단 한 번도 외부인의 출입을 허하지 않았던 이곳에 우리를 초대했을 리가 없잖아. 너희들과 염호 사이엔 분명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장목화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그녀는 곧 성건우와 함께 그곳을 탐색했던 이야기를 대강 전달했다. 단, 성건우가 각성자 능력으로 잠든 염호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어둠에 웅크려 앉아 구조를 요청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봤다는 사실만은 전하지 않았다.

디마르코는 오른손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살짝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장목화가 들려준 이야기 중 한 부분을 되뇌었다.

“새로운 세계⋯⋯.”

그 부분이 가장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몇 초 후,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군. 구세계에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지? 뭐든 물어보게.”

그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파고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하얀 팀이 뭔가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러한 의혹을 억누른 채 물었다.

“디마르코 선생의 선조께선 구세계가 파괴되리란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요?”

디마르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분은 그저 열렬한 종말론 신봉자셨을 뿐이야. 마침 그 이상을 실현할 돈과 지위도 있었고.”

“그럼 구세계 파괴 이전에, 어떤 징조가 있었던 건 아닌가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무슨 일을 겪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디마르코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우리 조부 말씀이,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발발할 전쟁을 피하려 지하 방주에 숨으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에 무심병이 일어났다더군. 하지만 방주 내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고 하셨어. 수많은 하인이 아무 조짐도 없이 무심자로 변해 피비린내 나는 혼란이 일어났다는 거야.

이에 우리 증조부께서는 조부와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한 층 더 격리된 곳으로 피신했는데, 다행히 무심병에는 전염성이 없었지.”

‘역시 무질서한 전쟁과 무심병은 구세계 파괴의 표면적인 원인이었어. 그런데 미리 지하에 숨어든 사람조차 무심병을 앓게 되었다고? 회사에서는 무심병의 폭발 이후에 생존자들을 꾸려 지하 빌딩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장목화는 몇 가지 중점을 기억에 새기며 다른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한 차례 대화를 마친 끝에, 구조팀은 레드스톤 마켓이라는 폐허 도시가 구세계에선 어땠는지 어느 정도 파악을 했다.

분노의 호수 서쪽과 북쪽은 애쉬랜드인에게 속해 있었고, 동쪽과 남쪽은 레드리버 유역에 속했으며, 분노의 호수는 애쉬랜드어를 쓰는 국가와 레드리버어를 쓰는 국가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호수의 여러 섬 중 일부에는 애쉬랜드인이, 일부에는 레드리버 인이 살았다는 것이다.

레드스톤 마켓이라는 폐허 도시는 분노의 호수 동남쪽에 자리해 있었으므로 당시엔 레드리버 국가에 속한 곳이었다. 하지만 변방의 도시였던 이곳에 이주해온 애쉬랜드인 상당수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디마르코의 선조는 도시 내의 가장 큰 건설업자로, 현지의 여러 의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디마르코에게 구세계의 파괴와 관련한 정보를 적잖게 얻어낸 장목화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남은 건 간단한 질문 두 개뿐이에요. 혹시 라르스라는 유적 사냥꾼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장목화는 디마르코가 거절할 틈도 없이, 리만이 준 그 사진까지 꺼냈다.

그런데 디마르코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라르스? 돌아가 리만에게 전해. 라르스는 방주 안에서 그의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못 믿겠거든 경계 교회당에 오라고 해. 라르스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말이야.”

“예?”

구조팀원 모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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