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한명호의 결정
이때, 장목화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어.”
“뭔데요?”
용여홍이 매우 협조적으로 나섰다.
보조석의 장목화는 후시경을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한명호는 줄곧 스스로를 이기적이었다고 표현하면서, 그간 자신이 해온 모든 훌륭한 일들을 인간다워 보이려고 한 짓이라고 말했잖아.”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덤덤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황야유랑자 출신이에요. 실력이 무척 강하다 할 수 없는 아류인으로서 여태까지 살아남은 데다가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가기까지 했다는 건 절대 선량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으리라는 뜻이죠.”
백새벽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도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초창기엔 그 역시 험악하고 교활한 사람이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그를 봐. 모르겠어? 오랫동안 기사 연기를 해온 지금의 그가 문제를 고민하는 각도는 이미 완전히 바뀌어 있어. 악한 마음은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라고, 차라리 그 전에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리는 게 낫다고 했잖아.”
기억을 되새겨보던 용여홍이 놀란 듯 반문했다.
“연기가 진짜가 된 건가요?”
장목화가 웃었다.
“그런 셈이지. 그야말로 행동이 심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 표본이라고 할 수 있어.”
“잘된 일 아닌가요?”
가면을 벗은 성건우가 웃으며 물었다.
장목화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대꾸했다.
“잘된 일이 아니면 회사에 그를 영입해달란 보고할 생각도 안 했겠지.”
그녀는 뒤이어 고개를 살짝 틀어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작은 흰둥이, 넌 어떻게 우리 회사와 접촉하게 된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백새벽이 답했다.
“회사에 지원을 했죠.”
“뭐?”
장목화가 화들짝 놀랐다.
성건우는 흥미롭다는 듯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며 물었다.
“회사가 위드 시티의 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반고 바이오 지원처’라는 현수막을 걸어두기라도 한 거야?”
장목화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핀잔을 주려다가 외려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생각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유적 사냥꾼 팀에 가입했어. 팀원이 어느 정도 있어야만 받을 수 있는 임무를 맡고 싶었거든. 그렇게 몇 차례 임무를 완수하고 나니까 팀장이 나한테 반고 바이오에 들어가고 싶으냐고 물었어.
기초적인 시험에 통과해 지하 빌딩에 들어갔을 때에서야 알았지. 한 유적 사냥꾼이 검은 늪 황야에 대해 잘 아는 나를 회사에 추천했다는 걸. 그 유적 사냥꾼 팀이 내건 새 팀원 모집 조건도 딱 나에 맞춰서 세워진 거였어.”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난 네가 회사의 어느 임무 집행팀과 마주친 줄 알았어. 그들과 싸우면서 정든 끝에 회사에 들어왔나보다고 생각했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의 지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폐허 도시 북쪽 경계 교회당으로 향했다.
* * *
송하균을 만난 장목화는 일단 한명호와의 대화를 대략적으로 전달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송하균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한 대장은 진정한 인간입니다. 안타깝군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끝내 떠나겠다고 한 한명호의 결정인지, 아니면 주교를 상대로 뜻을 밝히지도, 한명호를 만류할 용기를 내지도 못하는 자신인지 알 수는 없었다. 장목화는 상대를 따라 가만히 한숨만 쉬었다.
그러다 송하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어쩐지, 제가 한명호에게 레드스톤 마켓에서 좋은 사람과 만나 아예 이곳에 정착하라고 할 때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치안관에게는 적이 많을 수밖에 없고, 본인 아내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고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마을 경비대가 제대로 갖춰지고, 모두가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치안법이 수립되고, 또 재산이 충분히 모이면 치안관이라는 직위에서 물러난 뒤에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요.”
한명호는 자신의 몸에 달린 비늘을 가까운 사람에게 들킬까, 아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듯했다.
“거짓말쟁이!”
성건우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목화도 성건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건우는 여태 한명호가 공정하고 안전한 세상을 위해 가족을 꾸리지 않는 것이라 여기며 그와 자신을 동일시했었다.
물론 한명호는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한명호는 적어도 레드스톤 마켓의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관과 마을 경비대 대장이라는 직책을 이행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잖아.”
장목화가 위로하듯 말했다.
이때, 용여홍이 돌연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그럼 레드스톤 마켓에 오기 전에는 왜 아류인과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애쉬랜드에서는 서로 도울 수 있는 두 사람이 있다면, 혼자서 분투해야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요?”
아류인과 결혼했다면 멸시를 받거나 할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답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백새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류인은 그의 눈에 차지 않았을 거야.”
살짝 놀랐던 장목화는 곧 깊이 동의했다.
“하긴.”
한명호는 분명 아류인이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를 진정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아류인 집단이 그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들을 향한 한명호의 감정은 기껏해야 동정심, 친근감, 공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생각조차 한 적이 없을 터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한명호도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자인 셈이었다. 다만 그 입장은 인간 쪽에 가깝고, 다른 종족에겐 자연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조용히 어인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용여홍은 한명호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인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나아 보이기도 했다.
점점 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에 송하균이 얼른 본론을 짚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기에 한명호는 아류인 연합군에 정보를 판 것 같지 않다는 겁니까?”
장목화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동기와 입장 측면으로 볼 때 한명호에겐 레드스톤 마켓을 팔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심층적인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새로운 단서가 발견될 테고, 그러면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죠.”
빈틈없는 답에 흠칫 놀란 송하균이 멍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몇 초간 고민하던 그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어딘가 귀에 익은 답이군요. 제가 본부에 보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에요. 보아하니 여러분도 어느 세력 출신인 모양입니다.”
일정한 규모가 갖춰진, 동시에 정식으로 조직된 세력의 일원이어야만 이런 식으로 공식적인 표현을 쓸 수가 있었다.
아무 허점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허점을 들킨 장목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유적 사냥꾼도 어느 정도의 배경을 갖춘 의뢰자와 이야기를 할 때는 신중하게 구는 법이죠.”
양측은 이렇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명호의 행동을 제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 용의자 목록에서 한명호는 일찍이 다 지워진 것 같았다.
“돌아가 한명호와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눠봐야겠습니다. 혹시 또 떠나겠다는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송하균이 말했다.
‘친화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에는 어려울걸요.’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송 경고자님. 다른 의심 대상이 있는데, 그와 만남을 신청하고 싶네요.”
잠시 고민하던 송하균이 물었다.
“신청하고 싶다고요? 지하 방주의 사람입니까?”
‘역시 똑똑한 사람이야. 오랫동안 살면서 쌓인 지혜 덕분이겠지.’
장목화가 솔직하게 답했다.
“예, 디마르코 선생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하균이 망설이며 말했다.
“지하 방주는 교회에서도 그 지위가 낮지 않습니다. 저라도 그들을 강제할 수는 없어요. 음, 제가 일단 디마르코 선생의 집사들을 교회당에 불러 이야기를 나눠본 뒤 문제가 발견되면 본부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장목화가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송하균은 의심스럽다는 듯 그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일단은 괜찮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리시죠.”
이들은 현재 홀 뒤쪽 복도 소파와 티 테이블, 의자가 놓인 작은 응접실에 있었다. 이 방의 벽도 홀과 마찬가지로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떠나는 송하균을 눈으로 배웅하던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언급하는 대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 방주 사람과 접촉하는 거였는데! 선 조치, 후 보고 방식을 썼어야 했어.”
영상 통화 방식만 아니라면, 일을 처리할 방법은 많았다.
“그러니까요.”
성건우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여러 차례의 경험 끝에 성건우는 복잡한 전자기기를 쓰면 추리 광대의 영향 범위를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으로서는 확성기의 도움만 겨우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백새벽은 그런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보다가 일깨우듯 물었다.
“경계 교파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한 거 아니었어요?”
문 뒤의 주시를 떠올린 장목화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교파를 마주한 상황에서는 멋대로 굴지 않는 게 좋지.”
다행히 가면을 쓴 덕에 그녀는 누구에게도 표정을 들키지 않았다.
“팀장님은 신부도 해치우셨잖아요.”
성건우의 지적에,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반 지성교가 경계 교파랑 같냐?”
적어도 말인은 에이돌른처럼 자신의 구역을 주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구조팀은 반 지성교의 정식 교회당에 난입한 적도 없었다.
한동안 웃고 떠들던 그때였다. 돌연 고개를 든 장목화가 응접실 안의 작은 통풍구를 올려다보았다.
“찾았어!”
성건우가 곧장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통풍구 철망이 옆으로 치워지는가 싶더니 안에서 비엘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쑥 빠져나왔다. 소년은 녹색 눈동자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너희들, 지하 방주를 조사하려는 거야? 송 경고자님이 디마르코의 집사에게 연락하는 걸 들었어.”
장목화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혹시 우리한테 팔 정보라도 있는 거야?”
비엘은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빌어봐. 그럼 알려주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의자를 딛고 위로 튀어 올라 통풍구 양쪽 판을 움켜쥐었다.
화들짝 놀란 비엘은 몸을 웅크리면서 한참 뒤로 물러나, 매우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성건우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를 붙잡고 묶어둔 다음 빌려고.”
비엘은 미간을 찡그린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성건우의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장목화도 이들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즐겁게 지켜볼 뿐이었다.
빠르게 물러나던 비엘은 또 다른 통풍관에 이른 후에야 멈춰 섰다.
그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입구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 크게 말했다.
“지하 방주의 경비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 디마르코는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래. 하인들은 무슨 잘못을 했든 그와 마주치거나 그에게 발각된 순간 처형된다는 거야. 기분이 나쁜 상황에서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하인이라도 죽인대.”
그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살짝 구기던 장목화는 전에 품었던 한 가지 의혹을 풀 수 있었다.
지하 방주에서는 왜 정기적으로 하인을 사고 그들을 교육할까?
지하 방주의 규모로 볼 때 10년에 한 번씩 정도만 새 하인을 받아들여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럼 디마르코의 잔인한 성격으로 죽어 나가는 하인들 수가 너무 많아서 정기적으로 보충해야 하는 건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성건우에게 이만 내려오라고 말한 장목화가 다시 통풍구를 향해 물었다.
“죽은 하인들 시체는 어디에 있는데?”
그렇게 많은 시체가 지하 방주 냉동 창고에 쌓여 있을 리는 없었다.
통풍구 안쪽에서 비엘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흘러나왔다.
“산맥 쪽에도 지하 방주 출구가 하나 있어. 그 근처에 묻히는 모양이야.”
하나의 출구는 하나의 입구와도 같지.
장목화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가려는데, 다시 비엘이 외쳤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너희들, 운이 좋았어!”
비엘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통풍관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구조팀은 서로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