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인간 (1)
손님들을 보내고 문을 닫은 장목화가 아까 받은 종이를 자신의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명단의 첫 번째 부분에는 전하얀 팀에 속한 팀원들의 가명인 전하얀, 장우병, 서시월, 고지용이 포함돼 있었다.
장목화가 명단을 살피며 말했다.
“이 부분은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근데 이중 누군가 일부러 레나토 주교가 무심병에 걸린 사실을 급하게 본부로 갔다는 내용으로 바꿔서 팔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그래야 후에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이 들통나더라도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을 테니까. 레나토 주교가 무심병에 걸리든, 본부로 떠나든 어인과 산 요괴에게 갖는 의미는 똑같잖아.”
말을 하는 사이 장목화의 시선은 명단의 다음 부분으로 향했다.
거기엔 애쉬랜더 내 몇몇 대형 씨족 족장, 레드리버인 중 비교적 큰 세력을 거느린 밀수 상인 여럿과 도제훈, 한명호처럼 능력 있는 마을 경비대 고위층이 포함돼 있었다.
만약 헬빅이 아직 살아있었더라면, 그리고 앙헤바스에게 아류인들한테 무기를 팔았다는 혐의가 없었더라면, 그들 역시 교회에서 일어난 변고를 미리 알고 있던 이들 명단에 포함돼 있었을 것이었다.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순간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이 들어왔다.
디마르코.
“어, 내가 왜 지하 방주를 잊고 있었지?”
장목화는 흠칫 놀란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병립하는 세 개 세력 중 하나인 지하 방주의 힘은 애쉬랜더나 레드리버보다 훨씬 더 강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그는 경계 교회당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 사실을 통지받게 될 존재였다.
용여홍이 동조했다.
“그러게요. 지하에만 처박혀 있는 그들은 사업을 위해 땅 위로 올라올 때가 아니면 아류인이 침략해오더라도 신경 쓰지 않잖아요.”
말을 잇던 용여홍은 순간 뭔가 깨달은 듯 흠칫 놀라고 말았다.
“상당히 의심스럽네.”
백새벽의 말에,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팀장님, 팀장님도 그들을 의심하시나요?”
“어느 정도는.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우린 마침 디마르코에게 어떻게 접근해서 구세계 파괴 당시의 상황을 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잖아? 이게 바로 그 기회야.”
장목화가 웃었다.
용여홍과 백새벽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성건우 홀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못돼먹으셨네요.”
* * *
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구조팀은 곧장 레드스톤 마켓 치안소로 향했다. 어쨌든 한명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래 끌면 끌수록 더 큰 문제로 발전하기 쉬웠다. 예를 들자면 입이 싼 웰러가 실수로 다른 마을 경비 대원들에게 말을 전해서, 한명호가 아류인이란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나갈 수도 있었다.
한명호가 아류인이 아니라면 다행이었지만 만약 맞다면 상황은 매우 골치 아파지지 않겠는가. 레드리버 마켓을 배신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해야 할지도 몰랐다.
구조팀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류인들에 맞서 싸웠던 만큼 한명호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이 문제부터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치안소에는 웰러만 앉아있었다.
“한 대장은 안 왔어?”
장목화가 물었다.
웰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녀석이라고 매일 때 맞춰 이곳에 출석 도장을 찍지는 않아. 마을 경비대와 밖으로 나가 함께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있거든. 이전의 전쟁이 남긴 문제들도 아주 많고.”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남은 경비대원들을 다독이는 것도 다 치안관이 해야 할 일들이었다.
장목화는 치안소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한 대장 앞에서 무슨 낌새를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지?”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던 웰러가 답했다.
“아마 없을걸. 나도 정신력이 꽤 강한 편이라고.”
‘그러겠지. 다른 사람 침대에 누워 그 사람 아내랑 잠까지 잔 사람인데.’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이, 약간 머뭇거리던 웰러가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스읍,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해 다니기는 했어. 이전처럼 그와 농담하지도 못했고.”
장목화는 성건우, 그리고 백새벽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신중하게 물었다.
“한 대장은 어디에 살아?”
웰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을 가리켰다.
“공원 북쪽 출구에. 그곳에 원래 건물 여러 채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다 무너지고 이제 한 채만 남았어. 한 대장은 그곳에 살아. 레드스톤 마켓과 가까워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금세 달려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
* * *
장목화는 곧장 팀원들과 밖으로 나와 공원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에 이른 그들은 나무들 사이에 어우러지듯 자리한 건물들을 발견했다. 일렬로 나란히 선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겨울 추위에 잎을 다 떨군 나무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건물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곳곳이 파손되어 있어, 건그중에서 멀쩡한 건 웰러의 말대로 단 한 채뿐이었다.
그때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짙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건물 밖에 세워진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그녀와 백새벽, 용여홍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한명호, 설마 정말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친 건가?’
지프가 한명호의 집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백새벽이 땅을 보며 이야기했다.
“바퀴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네.”
어젯밤 부슬부슬 내린 비 때문에 지면 일부는 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명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가?”
용여홍은 백새벽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팀장님, 지금 당장 이 바퀴 자국을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숨바꼭질에 소질이 없구나.”
그 말에 용여홍이 성건우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게 위장이라는 거야? 한명호가 차를 끌고 어느 정도 이동한 다음, 땅이 마른 곳에 그 차를 숨겨 놓고 다시 몰래 이곳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추격대가 바퀴 자국을 쫓아 이동하면 그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성건우가 그의 추측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꽤 많이 들은 모양이네.”
운전 중인 장목화가 끼어들었다.
“합리적인 추측이야. 그럴 가능성도 있지. 음, 조사 중엔 멋대로 목표를 바꾸지 않는 게 좋아. 하나하나 배제해가는 게 제일 안정적인 방법이지. 그렇지 않으면 소탐대실의 잘못을 저지르기 쉬워지거든. 아무튼 일단 한명호 집부터 가보자. 거기에 없으면 그때 바퀴 자국을 따라가는 거야.”
지프는 곧 3층짜리 건물 앞에 이르렀다.
장목화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 사람이 있네. 차 바퀴 자국은 의도적인 위장이었나 봐. 한명호는 추적을 따돌리는 데 능숙한 것 같아. 가지고 있는 차도 한두 대가 아닐 거야.”
그 사이 건물 문 앞에 다가간 성건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노크를 세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반응이 없자, 성건우는 오른손을 뻗어 잠겨 있지 않았던 문을 밀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언제 알았어?”
돌격 소총을 든 용여홍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성건우는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보며 답했다.
“노크하기 전부터.”
용여홍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겠다. 이것도 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거지?”
“틀렸어. 오늘의 성건우는 어제의 성건우랑 완전히 달라졌거든. 이건 그냥 예의라는 거야.”
성건우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얘 또 고질병 도졌네.’
더 이상 대꾸하는 걸 포기한 용여홍은 장목화를 따라 성건우를 지나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홀 안에 멈춰선 장목화가 주방 쪽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와.”
이번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데 있어선 자제력도 중요한 요소지. 누군가의 허장성세에 뜨끔한 나머지 알아서 걸어 나오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니까.”
말을 마친 그는 주방 쪽으로 다가가더니 싱크대 하부장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그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다음 순간, 하부장의 문이 열렸다.
얼굴에 두 갈래의 흉터가 난 한명호가 그 안에 웅크려 앉아 권총으로 성건우를 겨누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리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 사이 하부장에서 빠져나온 한명호는 그 누런빛이 도는 흰자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총구를 내렸다.
“날 찾아온 건 너희들이었군. 난 웰러가 마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이 구역을 포위할 줄 알았는데.”
“임무를 받았어.”
장목화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를 체포하라는 임무?”
한명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단한 임무야. 너를 찾아 한 가지 질문을 하는 거지.”
몇 초간 침묵하던 한명호가 물었다.
“어떤 질문?”
이 순간의 그는 꼭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장목화는 흰자가 약간 누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아류인이야?”
한명호의 표정이 약간 기괴해졌다. 실망한 것 같기도, 개운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살짝 웃음을 짓던 그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래, 난 아류인이다.”
말을 마친 한명호는 왼쪽 소매를 걷어 팔을 드러냈다.
팔의 중간 부분부터 호박색 비늘이 하나하나 돋아나 있었다. 그렇게 빽빽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한명호가 피식 웃었다. 아니, 표정이 약간 일그러진 것도 같았다.
“집단조차 없는 유랑자 아류인이지. 근데 아류인도 인간 아닌가? 그런 분류법에 따르면 레드리버인도 애쉬랜더도 다 인간이 아니어야지.”
“인간이지.”
성건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명호는 그렇게 단호한 답을 들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초 후, 그가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 난 레드스톤 마켓을 되찾고 점거하려 애를 쓰는 어인과 산 요괴들을 이해해. 그들 중 구세계 파괴를 직접 경험하고, 고향이었던 이곳에 관련한 기억을 가진 이는 얼마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들에게 폐허 도시는, 이 호숫가는 일찍이 인간으로서 누렸던 평범한 삶을 상징하는 곳이야.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이지.
만약 이대로 포기해버린다면, 이곳을 되찾고 말겠다는 굳건한 신념이 대를 거듭해 이어지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후손은 자신들이 괴물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될 거라고.”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는 당장이라도 전술 배낭을 풀고 싶었으나 끝내 그 충동을 참아냈다.
장목화는 입을 열었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지금 용여홍의 머릿속엔 다시 또 그 말이 새겨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