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기회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장목화는 바로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다가 백새벽을 쳐다보았다.
“새벽이 넌 어떻게 생각해?”
“회사로 돌아가면 그에 대한 자료를 신청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방면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부분을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요. 더 많은 것을 이해한 다음에 조사하는 게 안전하죠.”
백새벽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음, 하지만 지금 당장 회사로 갈 수는 없잖아. 구체적인 문제에 당면한 상황에서만 회사의 답을 받을 수 있고. 난 이번 탐색으로 경계 교파에서 강자를 보내 그 신전을 탐색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
우린 송 경고자와 좋은 관계를 형성한 상태이긴 한데, 적잖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경계 교파의 강자와 만날 필요까지는 없지.
어쨌든 우리가 레드스톤 마켓에 온 주요 목적은 달성했잖아. 머신 헤븐에 관한 자료만 손에 넣으면 일은 거의 마무리 돼. 그 이후엔 바로 떠나자.”
용여홍과 백새벽은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때까지는 헬빅을 죽인 진범을 찾아내야 해. 무기까지 받은 마당에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을 수는 없지.”
머뭇거리던 백새벽이 말했다.
“헬빅의 원수 명단을 다시 정리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답을 마친 장목화의 눈빛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곧 성건우 역시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10여 초가 지났을 때, 누군가 그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성건우가 원숭이 가면을 쓴 채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검은색 망토를 두른 경고자 송하균이었다. 치안소의 바람둥이 법의관 웰러도 함께였다.
곧 방으로 들어온 송하균은 장목화를 비롯한 구조팀원들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죠?”
장목화가 물었다.
송하균이 웰러를 힐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전에 어인과 산 요괴에게 레나토 주교가 급히 본부에 소환되었다는 정보를 팔아넘긴 사람이 있으리라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용의자 한 명이 특정됐습니다. 그를 몰래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장목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누구입니까?”
송하균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한명호입니다.”
“한 대장이요?”
용여홍, 백새벽뿐 아니라 장목화 역시 화들짝 놀랐다.
장목화는 성건우와 함께 한명호 담당의 방어선으로 돌아왔을 때 목격했던 수많은 시체와 새카맣게 타버린 곳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명호는 다른 마을 경비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죽을 수도 있었다. 치안관이라는 이유로 총알이나 포탄이 그를 비껴갈 리는 없었다.
만약 정말 한명호가 레나토 주교가 본부로 돌아갔다는 정보를 어인과 산 요괴에게 판 사람이라면, 최전방에 나설 이유도 없었다. 얼마든 적당한 구실을 대면서 쉽게 공격당하지 않을 곳으로 갈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곳에 나와 있었다는 건 그야말로 위험하고도 멍청한 짓이었다.
‘한명호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실력자고, 아류인 연합군의 돌격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닌 이상엔 그렇잖아. 그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작은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장목화가 충격에 휩싸인 그때, 성건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도 안 됩니다.”
설명을 이어나가려던 송하균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이어, 그의 곁에 있던 법의관 웰러가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이유도 들어 보지 않고 말도 안 된다니, 왜?”
“난 그 사람을 믿어.”
성건우가 나름의 이유를 댔다.
“왜 한 대장을 믿는데?”
웰러는 꼭 시시비비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남자의 직감이지.”
성건우가 웰러를 분명히 바라보며 답했다.
“⋯⋯.”
웰러는 순간 상대가 허점으로 온통 뒤덮여 있긴 한데, 또 빈틈은 없는 것 같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내 성건우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를 가르쳤다.
“이럴 땐 ‘네가 무슨 남자냐’고 반박하면 돼.”
“그러면?”
웰러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성건우는 당당하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줄줄 읊었다.
“난 바지를 벗고 내가 남자임을 똑똑히 보여줬겠지. 그 일에 모욕감을 느낀 너는 극도로 분노하게 될 테고, 그럼 우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바탕 싸움을 벌일 거야.”
‘이게 대체⋯⋯.’
웰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화제를 왜곡시키는 데 성공한 성건우의 모습에 장목화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송하균을 바라보았다.
“송 경고자님, 그 이유가 뭡니까?”
동석한 웰러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레드리버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송하균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는 아류인일지도 모릅니다.”
“아류인일지도 모른다고요?”
장목화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답이었다.
용여홍과 백새벽의 얼굴에도 짙은 의혹이 어려 있었다. 그러다 한명호의 눈 흰자가 약간 누런 색이라는 걸 떠올린 그들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류인도 인간이죠.”
성건우는 여전히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려 애썼다.
송하균은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옆쪽의 웰러를 가리켰다.
“우리가 그렇게 의심한 이유는 웰러 선생이 말해줄 겁니다.”
자연스레 발언권을 이어받은 웰러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솔직히 나도 믿고 싶지 않아. 나와 한 대장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란 말이지. 그자는 내게 어느 밀수 상단이 창녀를 데리고 있는지도 알려줬다고. 그런데 말이야, 한 대장은 이번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잖아. 왼팔에.”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랬지.”
그 사실을 직접 목격한 용여홍이 대답했다.
백새벽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시 웰러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나는 의사니, 그의 상처를 살피고 치료해주고 싶었어. 감염돼서 좋을 게 없잖아. 안 그래? 그런데 웬걸, 내 제안을 거절하더라고.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나 뭐라나.
그러다 얼마 후, 그가 붕대를 갈겠다고 치안소 안쪽 방으로 들어가더라고. 나는 한 손으론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서, 마시던 물만 마저 다 마시고 도와주려고 그 방으로 들어갔지. 뭐, 둘 다 남자니까 굳이 문을 두드리고 그런 건 없이 그냥 문부터 벌컥 열었어.
근데, 그 사람 팔에 뭔가가 한 조각씩 달려 있었어. 옅은 호박색에 성긴 비늘 같은 거. 한 대장은 상처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급하게 소매를 내려서 그 부분을 감추더라고.
그리고 나를 보면서 왜 냅다 들어왔냐고 묻는데, 그때 그 눈빛이 너무도 위험해 보였어. 꼭 자기 아내랑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보는 그 상사의 눈빛 같았지.
난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면서 붕대를 갈아주러 왔다고 했어. 한 대장은 금세 또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와 자기가 이미 다 갈았다고 하더라고.
밖으로 나와서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거야.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교회당으로 가서 송 경고자님을 찾았어. 송 경고자님은 일단 긴장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를 몰래 더 관찰하라고 말씀하셨지.”
웰러의 말이 끝나자, 송하균이 덧붙였다.
“그러다 오늘 변화가 나타났어요. 어인과 산 요괴에게 정보를 팔아넘긴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은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죠.”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송 경고자님, 경고자님이 직접 그를 찾아가셨어도 됐을 것 같은데요. 그가 경고자님께 뭘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가 당연히 각성자인 송하균에게 불친절하고 우호적이지 않은 행위를 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송하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명호는 제게 아주 좋은 인상을 준 사람입니다. 지난 3년간 그는 정말로 적지 않은 성과를 냈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성직자인 저는 교리상 레드리버 마켓 주민들이 서로를 믿고 외부의 적에 함께 맞서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명호는 적어도 그 후자는 달성했죠.
저는 그가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일에 임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직접 찾아가 묻는다면 그 후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양쪽 마음에는 큰 상처가 남을 거예요. 이제 다신 공존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여러분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외부자니 뭔가를 알게 돼도 곧 떠날 테고, 비밀은 묻힐 테니까요.”
웰러와 성건우는 깊이 동감하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명호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경계 교파의 성직자이자 레드스톤 마켓의 실질적인 촌장인 본인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불법을 저지를 수 없지만, 외부자인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우리에게 임무를 맡기려는 진정한 이유인가?’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일단 한 가지를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네요. 한 대장이 아류인인지 아닌지는 그가 정보를 팔았는지 아닌지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가 정말 아류인이더라도 레드스톤 마켓을 팔아넘겼다고 볼 수는 없어요. 당시에 그는 정말로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 사이에서 적들을 저지했습니다.”
그 말에 송하균이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이 답으로, 장목화는 방금의 추측을 확신했다.
“그럼 이 임무는 두 가지로 나뉘겠네요. 하나는 한 대장이 아류인인지 확인하는 것, 다른 하나는 어인과 산 요괴에게 정보를 판 사람을 찾아내는 것.”
“좋습니다.”
송하균이 동의를 표했다.
“이 임무의 보수는 어떻게 될까요?”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송하균은 가면을 쓴 구조팀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각성자 관련 지식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건 알려드리지 못해도, 도제훈이 알고 있는 것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죠.”
‘우리가 어인 각성자를 해치우고 금기된 신전에서도 무사히 돌아온 걸 보고 우리 중 적어도 하나는 각성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네. 각성자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곤 하니, 그게 건우란 것도 어렵지 않게 파악한 거고.’
장목화는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성건우가 잔뜩 흥분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곧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식은 언제나 귀한 것이죠. 괜찮은 보수네요. 송 경고자님, 저희는 경고자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굳이 사냥꾼 길드를 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송하균은 재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임무를 접수한 장목화는 곧장 유적 사냥꾼다운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송 경고자님, 명단이 하나 필요합니다. 어인과 산 요괴가 침략하기 전 레나토 주교가 급한 일로 본부에 소환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 명단이 필요해요. 그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기밀 사항이었죠.”
송하균은 검은 망토 주머니 안에서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네,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명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한 부분은 당시 교회당에서 해당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이들이고, 다른 한 부분은 그 후에 통지를 받은 이들입니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레나토 주교가 무심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과 대화하면 이런 점이 편하다니까.’
장목화는 기쁘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급히 명단을 살피는 대신, 송하균과 웰러를 배웅하며 내일 아침부터 조사를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