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24화 (224/649)

224화. 잠든 신령

“소용없는 것 같은데.”

장목화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성건우는 단념하지 않았다.

“네 아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도망갔어!”

‘요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저런 이야기도 들려주나 보네.’

장목화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관 안에 누운 신령은 이번에도 얌전했다.

또 레드리버어로 반복해 말해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같은 내용을 말하는 성건우를 기다리다가, 장목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인간의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가 미약한 전기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이자가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했을 거야. 적어도 3, 40년은 잠들어 있었겠지? 그런데도 어느 정도 살아있다니,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네. 혹시 누군가 정기적으로 포도당과 영양제를 주사해주기라도 하는 건가?”

인간이라면 아무리 유전자 속에 잠재된 동면 능력을 회복한다 한들 3, 40년 동안 잠든 상태로 살아있을 순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대꾸했다.

“인체 냉동 기술.”

장목화도 그 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자가 모종의 능력이나 어떤 물건을 이용해 자신의 신체를 동결했다는 거야?”

실제로 동결한 건 아닐 터였다. 관 앞에 선 장목화와 성건우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살짝 서늘한 기운뿐이었다.

“이자를 깨우면 알 수 있겠죠.”

성건우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장 고개를 돌려 장목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세요⋯⋯.”

“그만! 보긴 뭘 봐? 무슨 수작이야?”

장목화는 순간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웠다.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이 자에게 각성자 능력을 사용해 보고 싶어서요. 보세요, 제 각성자 능력은 인간의 의식을 가진 생물에게 적용돼요. 그리고 이자에게는 인간의 의식이 남아 있죠.”

추리 광대 능력의 도움 없이도 장목화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시도에 나름의 성공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고민에 잠긴 장목화가 중얼거렸다.

“회사에선 가능한 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잠든 신령의 육체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난 최대한 건드리지도 않는 게 좋겠다는 조건을 덧붙였고. 하지만 정신 측면의 영향과 접촉은 주의사항에 없었어.”

성건우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심지어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가면까지 벗어던졌다.

그를 보고, 장목화가 얼른 덧붙였다.

“추리 광대 능력은 안 돼. 이자는 네 말을 듣지 못할 테니까. 억지쟁이와 양손 동작 불능은 이론적으로 둘 다 가능하지만, 난 양손 동작 불능 능력을 추천할게. 전자는 불필요한 뜻밖의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잖아.

후자는 연결이 성립된 뒤에야 두 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저자의 손은 원래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각성자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 또렷한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그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작겠지.”

장목화는 이 미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 광경을 보고 싶진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성건우 역시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곧장 왼손에 낀 라텍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난 여기 있는 어떤 것도 만질 수는 없지만, 너는 건드릴 수 있어. 네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이상한 낌새가 보여도 곧장 정신 차리게 해줄게.”

말하는 사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지직, 하고 전류가 흘렀다.

성건우는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관속에 잠든 신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내 빠른 속도로 의식을 뻗은 그가 상대의 의식과 자신의 의식을 연결했다.

순간 성건우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원의 바다에 돌아온 듯 미약한 빛만 보였다.

그 미약한 빛을 따라, 성건우는 하나의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 밖 저 멀리 떨어진 곳엔 흐릿한 탑 하나가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창문 아래 어둠 속엔 한 인영이 웅크려 앉아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고개를 든 그가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던 그의 입에서 허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려줘……!”

어둠 속 인영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려는 사람처럼 성건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성건우는 마치 한겨울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온몸이 서늘해졌다. 또 인영의 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미약한 빛이 떠다니는 눈앞의 어둠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소리 없이 깨져버린 어둠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성건우의 시야로 검은 관과 삼베옷을 입은 미라가 들어왔다.

의식이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성건우의 몸은 아직 뻣뻣했다. 수많은 말초 신경이 경련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길래 깨우려고 했던 것뿐인데. 가면을 벗어둬서 진짜 다행이다.”

장목화는 전광이 피어오르는 왼손을 거두고,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심으로 걱정했던 눈빛이었다.

“얼마나 지났나요?”

성건우가 물었다.

“한 2, 3분 정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터라, 장목화는 굳이 손목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까지도 계속해서 성건우의 상황과 구체적인 시간에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이 신전에 오랫동안 머물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잠시 기억을 떠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10초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요.”

뒤이어 그는 그 어두운 환경과 미약한 빛 속의 창문, 멀찍이 자리한 흐릿하고 높은 탑, 창문 아래 웅크려 있던 인영들을 있는 그대로 고했다.

“그 인영이 ‘살려줘’라고 했다고?”

장목화가 놀란 듯 반문했다.

“애쉬랜드어를 썼어요.”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동문서답으로 마무리했다.

신전 구조를 한 번 돌아보던 장목화는 다시 길고 검은 머리카락과 거친 삼베옷을 입은 미라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살려달라고 외쳤다면⋯⋯. 지금의 상태가 자신이 원한 결과는 아니었다는 뜻일까? 심령의 복도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무슨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안에 갇히게 됐고, 그래서 의식은 여태 육신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의 기운은 어인 각성자와 융합한 뒤 그 몸을 빌려, 심령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통로를 뚫으려 한 걸까?”

장목화는 성건우가 기원의 바다로 향할 때마다 비슷한 걱정을 해왔기에, 비교적 정연한 추측을 늘어놓았다.

“어떤 시도를 하는 와중, 의식을 잠재의식에 가둬버린 건지도 모르죠.”

성건우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도 진지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다시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이자의 육신이 여태 살아있는 게 설명이 안 돼. 설마 이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인간, 혹은 각성자의 육체는 자연적으로 동결 상태에 진입하게 되는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장목화는 하는 수 없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 창문과 창문 밖의 탑이 의미하는 건 뭘까? 만약 네 추측이 맞다면 그건 모종의 심리 반영일 거야. 내 추측이 맞다면 그건 심령의 복도 깊은 곳의 광경일 테고. 시간이 얼마없어. 다른 단서는 없는지 더 찾아보자. 떠들어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장목화는 이 대목에서 손목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성건우도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다시 가면을 쓰고, 벨트에 걸려 있던 손전등을 꺼냈다.

노란 빛기둥은 검은 관 안을 비추며 곳곳의 어둠을 몰아냈다.

장목화는 한 손으로 총을 쥔 채 몸을 숙이고, 손전등 불빛 아래 염호라는 이름을 가진 잠든 신령을 이리저리 살폈다.

머리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시선을 조금씩 옮기던 그때였다. 장목화의 눈에 갈라진 채 암적색으로 물든 미라의 오른손 손톱이 들어왔다.

“다쳤나?”

장목화가 미라의 오른손이 닿을 법한 관벽을 비춰보라고 손짓했다.

빛이 닿은 그곳에는 뭔가에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흔적 중 더러는 정상이었지만, 더러는 끊겨있었고, 더러는 암적색으로 물들어 있기도 했다.

“잠든 후 손톱으로 박박 긁기라도 했나? 초기에는 가끔씩 손가락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던 건가?”

장목화는 그 흔적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이러한 흔적들은 단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 차례 시간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총을 어깨에 멘 뒤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낸 장목화가 비율에 맞춰 축소한 관 안 구조와 흔적을 옮겨 그렸다.

복사를 마친 후에야 장목화는 그 흔적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새’, ‘로’, ‘운’, ‘세’, ‘계’

다섯 개의 애쉬랜드 문자였다.

신령 염호가 잠든 뒤 사력을 다해 남긴 흔적이 이 단어일 줄이야.

성건우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이자는 새로운 세계에 갇혀 있는 겁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아? 새로운 세계가 의미하는 게 뭔데, 거기가 어딘데?”

장목화도 성건우의 추측을 맹목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더 많은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모르죠.”

성건우의 답은 언제나처럼 솔직했다.

장목화는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자. 일단 탐색부터 마저 하고.”

두 사람은 관 안의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시간까지 활용하면서 신전 좌우의 회랑도 한 번 확인했으나 그곳에는 먼지 한 톨조차도 없었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야.”

관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장목화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성건우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팀장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장목화는 마지막으로 관 안에 누워 잠든 염호를 바라보았다. 꾹 감긴 눈, 피골이 상접한 얼굴, 약간 누렇게 바랜 흰색 삼베옷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곧 상대의 오른쪽 손목에 걸린 팔찌에 닿았다.

장목화는 그 팔찌 역시 기묘한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이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기이한 변화를 보였던 어인 각성자를 떠올리면 감히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염호가 남긴 물건에 그와 비슷한 효과, 혹은 바이러스가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한숨을 내쉰 장목화는 피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며 돌아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전 밖으로 향했다.

이렇게 위험한 물건은 후에 이곳에 올지 모를 경계 교파의 사람이나 회사의 전문 처리팀에게 맡겨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성건우는 곧장 그녀를 따라나서는 대신 손전등을 넣고 비스듬한 방향으로 한 발 나아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관을 덮어주었다.

작업을 마친 그는 더 이상 잠든 신령이 보이지 않는 관 앞에서 허리를 세 번이나 깊이 숙이며 절을 했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장목화는 뜨락 안에 서서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 아직 안 죽었어⋯⋯.”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야 더 따뜻하잖아요. 벌레들이 귀찮게 굴지도 않을 테고.”

성건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대며 전당 입구에 말아 올려놓았던 흰 장막을 풀었다.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그럼 허리까지 굽혀가면서 절은 왜 했는데?”

“예의죠.”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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