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실험
성건우가 스피커 버튼을 눌러 녹음 모드로 전환하자, 장목화는 묵묵히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백새벽도 팀장을 따라 귀를 막았다. 용여홍은 손으로 귀를 막고서 심지어 문 앞으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언제라도 이 방에서 달아날 기세였다.
성건우는 곧 모두에게 손을 내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장목화를 향해 스피커를 돌린 후, 방금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재생시켰다.
- 팀장님은 구조팀 팀원입니다. 저도 구조팀 팀원이고요. 팀장님은 격투에 능하죠. 저도 격투에 능하고요. 그러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장목화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날 어느 쪽으로 유도하려는 거야? 피만 섞이지 않은 친남매?”
성건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효과가 없네요. 녹음할 때는 목소리에서 제 의지가 드러났지만, 재생된 목소리에서는 그 의지가 느껴지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복잡한 전환을 거치는 사이 의지가 점차 흩어져 사라진 걸까? 그 의지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소리가 방출되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장목화가 합리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한 차례 실험을 더 거쳤지만, 아무리 재빨리 재생해도 녹음과 저장 과정을 거친 후 방출된 소리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다 장목화는 도제훈이 당시 확성기를 사용해 원거리 도발에 성공했던 것을 떠올렸다.
“확성기로 시험해 볼까? 녹음과 저장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방출된 소리에 의지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마저도 안 통하면 도제훈을 친구로 삼아 경험을 좀 전수해달라고 해봐.”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확성기가 하나 필요하겠네요.”
“그거야 간단하지.”
장목화가 웃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레드스톤 마켓에 이른 구조팀은 곧 치안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한명호를 볼 수 있었다. 부상을 입어 붕대로 칭칭 감은 왼팔이 불끈불끈해 보였다. 그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구조팀을 맞았다.
“어쩐 일이야?”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장목화는 한 차례 전투를 함께 치른 그를 향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잔금을 재촉하러 왔어.”
장목화는 사실 한명호가 의도적으로 기사다운 인상을 주려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치안관으로서 방어선 최전방에 서서, 죽음 따윈 두렵지도 않다는 듯 아류인들의 침입을 막았다. 척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한명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정한 기사였다.
이내 한명호가 약간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곧 줄 수 있을 거야. 우린 이미 전장을 다 정리했거든. 이번 전투로 죽은 어인과 산 요괴도 많더라고. 한동안은 다시 진격하지 못할 거야. 정찰팀이 최종 결과를 보고하고 양측 포로 교환이 끝나면 너희한테 외골격 장치를 넘길게.”
“급할 것 없어. 정 안 되겠으면 도제훈을 대신 데려가지, 뭐.”
성건우가 위로하듯 건넨 말에, 한명호는 말을 잃었다.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장목화는 바로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성건우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도제훈은 괜찮냐는 뜻이야.”
“전투가 끝난 후 병이 났어. 심각한 건 아니지만.”
한명호가 답했다.
장목화는 의도적으로 화제를 전환하며 웃었다.
“이번 전쟁에 우리가 세운 공도 꽤 있는데, 혹시 별도의 보수는 없나?”
‘팀장님, 너무 악덕 상인 같잖아요⋯⋯.’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팀장의 말투는 지나치게 음흉하게 들렸다.
백새벽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 역시 황야유랑자와 유적 사냥꾼으로 살았던 당시, 이러한 악덕 상인을 적잖게 만난 경험이 있었다.
“별도의 보수라니, 원래 그런⋯⋯.”
한명호는 레드스톤 마켓 마을 경비대는 일을 마친 후 웃돈을 요구하는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유적 사냥꾼 팀이 이번 전쟁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건 확실했고, 그들로부터 받은 도움과 그들에게 줄 대가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목화가 그의 말을 끊으며 웃었다.
“조건은 세 가지야. 첫째, 마을 경비대 모터보트를 한 번 빌려줄 것. 둘째, 확성기 두세 개쯤 제공, 셋째, 머신헤븐과 관련된 자료 수집을 도울 것.”
한명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선을 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간단하기까지 한 조건들이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마을 경비대 내 다른 실권자들과 상의를 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선에서 다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명호는 정말 그걸로 되겠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문제없을 것 같군. 언제 필요한데?”
“확성기는 오늘 주면 좋고. 자료는 일주일 내, 모터보드는 따로 말할게.”
장목화는 미리 준비해둔 듯한 답을 줄줄 내뱉었다.
잠시 후 한명호는 치안소를 한바탕 뒤진 끝에 꽤 오래돼 보이는 확성기 하나를 찾아냈다.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물건이었다.
“일단 하나. 나머지는 외골격 장치와 함께 줄게.”
그러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물 위에서의 인간은 어인의 상대가 안 돼.”
성건우와 용여홍이 송하균과 함께 어인을 심문하던 당시, 그 옆에는 심문 내용을 기록하는 치안관이 있었다. 이는 한명호가 세운 여러 정규 절차 중 하나였다. 그 기록 덕에 한명호 역시 호수의 섬에 관해 알고 있었다.
성건우는 바로 흥미를 보이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어인과 물속에서 붙어볼래?’
장목화는 성건우를 팩 노려본 뒤 치안소를 빠져나왔다.
* * *
구조팀 사람들이 구매한 식재료를 가지고 여관 구역으로 돌아갔을 때, 성건우가 확성기를 꺼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재촉하듯 물었다.
“나 좀 도와줄 사람?”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장목화와 성건우, 백새벽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쏠려 있었다.
“아아⋯⋯.”
용여홍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여자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순 없잖아. 건우도 어쩌면 원거리에서 날 유도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르고.’
용여홍은 애써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가 할게.”
곧 그와 성건우의 사이의 거리는 삼십여 미터 정도 벌어졌다.
확성기를 들어 올린 성건우의 눈동자 색이 순간 짙어졌다.
“봐봐. 넌 늘 높은 경계심을 유지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걸 싫어해. 그리고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은 경계심과 숨기를 숭상하지. 그러니까⋯⋯.”
성건우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여관 구역에 울려 퍼졌다. 성건우는 혹여나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최대한 평범한 조건을 선택했다.
장목화는 곁으로 돌아온 용여홍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용여홍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어때? 어떤 느낌이야?”
“갑자기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네요.”
용여홍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답했다.
“내 목적은 네가 스스로를 레드스톤 마켓 주민으로 여기게 하는 거였어.”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뭐?”
놀란 용여홍은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는 비슷하네. 확성기를 이용하면 추리 광대 영향 범위가 확장되기는 하지만, 그 효과는 좀 작아지는 모양이야. 그래, 도제훈이 도발 능력을 발휘했을 때도 그 어인 각성자가 곧장 튀어나오지는 않았잖아.”
기억을 회상하던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다가 하나의 목표만 노릴 수 있기도 했고요.”
“훌륭해. 앞으로 계속해서 실력을 높이면 되지.”
장목화가 웃으며 말한 뒤, 용여홍과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전보를 보내야겠어. 잠든 신령에 대해 회사에 보고할 거야. 혹시 상부에서 어떤 정보나 제안을 줄지도 모르니까.”
“예?”
용여홍은 팀장의 결정에 흠칫 놀란 듯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정말로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달려들 줄 알았어?”
* * *
이번 보고에서도 장목화는 레나토 주교가 무심병에 걸렸던 그날 밤, 에이돌른이 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주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구조팀이 아직 레드스톤 마켓에, 경계 교회당 세력 범위에 머물러있기 때문이었다. 에이돌른의 관심이 집중된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외부로 유출했다간 달지기의 분노를 살지도 몰랐다.
물론 무신론자인 장목화는 아직까진 달지기를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생물 정도로 여기고 있어, 그에 대해 심각한 경외심이나 숭배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현실에 기반을 둔 고민을 할 뿐이었다. 자고로 강자 아래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법 아니던가.
둘째론 회사가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애쉬랜드와 이미 파괴된 구세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장목화는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는 동안 얻은 임무와 무관한 수확에 대해서는 보고를 보류해두고 싶었다.
게다가 그들은 현재 경계 교파와 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에이돌른을 존중하면서 그 어떠한 신성모독적인 행위도 하지 않았으므로 당분간은 회사의 지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장목화는 용여홍과 백새벽에게도 달지기의 주시에 관한 일을 그렇게 상세히 알리지는 않았다. 그저 이 세상에 달지기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그 존재가 애쉬랜드를 주시하고 있고, 심지어는 세상에 강림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 알려두었을 뿐이었다.
행여 두 팀원이 겁을 먹을까, 그녀는 당시의 두려움과 무력감, 충격 등을 그대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 * *
하늘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저녁을 먹은 구조팀은 반고 바이오의 회신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조사는 허락함. 하지만 아래 사항을 주의할 것.
첫째, 신전에 들어간 후에는 어떠한 물건도 맨손으로 직접 만지지 말 것. 반드시 고무장갑이나 라텍스 장갑 등을 착용하도록.
둘째, 가능한 한 소위 신령이란 그 존재의 육체를 이동시키지 말 것.
셋째, 신전 내에서는 15분 이상, 신전 부근 구역에서는 30분 이상, 신전이 자리한 섬에서는 사흘 이상 머무르지 말 것.」
해독한 내용을 모두 읽은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꽤 익숙해 보이네. 정식 처리 절차까지 수립해둔 걸 보면.”
그녀가 더 호기심을 느끼는 부분은 이러한 금기의 배후에 숨겨진 이유였다. 회사에서는 이미 문제의 근원을 파악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목숨을 바친 경험으로 알아낸 결과일까?
성건우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투로 장목화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구세계 파괴의 최대 용의자이자 현재 애쉬랜드의 최후 빌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용여홍이 물었다.
“정말 가는 겁니까?”
하나하나의 주의사항을 확인한 이때, 용여홍은 오히려 전보다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다른 것보다도 미지가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처리헤야 할지를 알고 난 후에는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배후에 든든한 회사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었지만, 장목화는 조금 전 뱉은 말을 감안해 애써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 지었다.
“가야지. 근데 적어도 외골격 장치를 받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해. 네 실력이 조금 더 나아진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자.”
“좋습니다.”
용여홍은 그 말에 더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이때,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장목화에게 말했다.
“만약 회사에서 탐색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몰래라도 갈 생각이었죠?”
장목화가 눈을 크게 뜨며 부인했다.
“그럴 리가! 내가 건우냐?”
“그런 방법도 한 번 고려해보세요.”
성건우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백새벽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남은 사람들은 동료도 아닌가?”
“뭐? 뭐라고 했어? 난 단 한 명의 팀원도 남겨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각 팀원에게는 각자 맡은 임무가 있는 것뿐이야.”
장목화는 적절한 타이밍에 오른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거리다, 당당하고 공정하게 말했다.
짝짝짝!
이때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장목화는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격투 훈련하고 싶은 거냐?”
그녀가 주먹을 날리자, 성건우는 날렵하게 공격을 피하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