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216화 (216/649)

216화. 병

“몇 시야?”

장목화가 이마에 얹은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녀도 자신에게 병이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유전자 개조를 받은 직후 위험한 시기를 견뎌낸 이래, 부상으로 인한 염증이 몇 번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병이 난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젯밤 심장이 과하게 무리를 했던 데다가 전기 충격까지 받았는데도 바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병이 난 건가?’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성건우는 바늘과 옷을 내려놓고 본인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1시네요.”

“……그렇게 늦었다고?”

장목화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허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신 것 같네요.”

성건우가 사실을 정확히 짚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그의 물건 중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유도할 때 쓰는 작은 손거울을 가지고 오더니 장목화 앞으로 내밀었다.

“뺨이 상당히 붉어요. 입술도 말라 있고요. 잠들었을 땐 잠꼬대까지 하시더라고요. 엄마, 아빠, 하면서⋯⋯.”

“그만!”

장목화가 갖은 힘을 짜내 성건우의 말을 막았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강건한 전사 이미지가 심각하게 손상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리를 쳤더니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입 안도 더 말라오는 듯했다. 이에 장목화는 여러 물건을 쌓아둔 침대 머리맡의 협탁으로 손을 뻗어 물 주머니를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척척, 다가온 성건우가 그녀보다도 더 빨리 물 주머니를 집어 들곤 뚜껑까지 열어 그녀의 입가에 대주었다.

“와.”

장목화는 다시 한번 놀랐지만, 거절하지 않고 물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 그제야 웃음을 그렸다.

“어젯밤에 했던 짓에 대해 반성하는 거냐?”

“동료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성건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보다가, 장목화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왜 튀어 나간 거야?”

“그 각성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레드스톤 마켓 주민이 다 죽게 되잖아요.”

성건우는 여느 때처럼 진지하게 답했다.

그녀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성건우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맑고 깨끗했다.

장목화도 결국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도 나한테 미리 알리기는 했으니까. 아, 근데 넌 왜 멀쩡해?”

순간 그녀는 살짝 짜증이 났다. 지난밤의 일로 병이 난 거라면 두 사람 모두 아파야 했다. 당위성을 따져보아도 둘 중에서 아파야 하는 사람은 바로 성건우였다. 어쩌면 이 기회를 통해 질병 섬을 돌파할 가능성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답했다.

“전 거의 혼절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는 그의 심장이 한계를 뛰어넘는 정도의 부하를 받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성건우는 전기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장목화는 뺨을 동그랗게 부풀린 채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 그래, 그럼 빨리 물 좀 끓이고 수건도 좀 갖다줘. 어쨌건 어제 네가 독단적인 행동을 한 건 맞으니까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지!”

성건우는 즉각 능숙하게 물을 끓이고, 적신 수건의 물기를 짜냈다.

그 후로도 장목화는 그에게 각양각색의 잡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물 부대 채우기, 환자 부축해주기, 수건 갈기, 옷 꿰매기부터 옆방의 백새벽, 용여홍과 소통하는 것까지 그야말로 광범위했다.

처음엔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성건우를 보고 피식 웃던 장목화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던 당시 성건우는 이미 이러한 일을 여러 번 해봐 익숙해졌지 않을까.

이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장목화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를 약하게 내리쳤다.

“여태 잘못 생각했었던 거야!”

“뭘요?”

성건우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살짝 인상을 썼다.

장목화는 그의 생각이 또 기괴한 방향으로 튈까 곧장 설명에 나섰다.

“우리는 지금껏 병에 대한 네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할지만 고민했었잖아? 사실 생사에 대한 네 태도로 보면 넌 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잠시 생각하던 성건우가 대꾸했다.

“병에 걸리면 아무것도 못 하게 돼요. 아직도 두려운데요.”

장목화는 살짝 짜증과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보기에 넌, 병이 네 곁에 있는 사람을 데려가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순간 깊은 생각에 빠진 성건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장목화가 웃었다.

“내가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병은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는 걸 보여줄게! 만약 회사의 유전자 개량 기술이 모든 지역에 널리 퍼지고, 유전자 개조가 지금처럼 그렇게 위험하지 않고 통제가 가능해진다면, 인간은 병에서도 거의 자유로워질 거야.

내가 다 낫고 나면 이런 방향으로 한 번 시도해 봐, 알았지? 좋아, 이제 먹을 것 좀 갖다줘. 배가 고프기 시작하네. 이건 아주 좋은 일이지!”

그녀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베개에 기댔다.

* * *

점심 식사를 마친 장목화는 아프다는 이유로 아류인 포로 심문 임무를 성건우와 용여홍에게 맡겼다.

장목화의 분부에 따라 일단 경계 교회당으로 향한 두 사람은 경고자 송하균에게 함께 심문하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는 성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상대의 친화력을 이용하려는 방법이었다.

송하균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이가 많은 데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지만, 얼굴에서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몸도 상당히 훌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성건우와 용여홍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내 그는 교회 경비 2명과 함께 자신의 차에 올랐다.

일행은 레드스톤 마켓 맨 아래층, 치안소에 이르렀다.

경고자를 앞세워서 그런지 아직 휴식을 취하는 중인 한명호가 출근하지 않았는데도 성건우와 용여홍은 수월하게 심문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가장 약하게 부상을 입은 한 포로를 만났다.

흑회색 비늘로 덮인 그 피부도 다시 보게 되었다. 더불어 귀 아래에서 목까지 이어진 어인의 아가미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용여홍이 보기엔 어인들의 생김새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저 키와 덩치만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각자 자리에 앉은 심문자들 가운데, 먼저 성건우가 포문을 열었다.

“남을 질식시킬 수 있는 그 어인은 누구지?”

철창 뒤의 어인 포로는 불룩 튀어나온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송하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딱히 기밀 사항도 아닐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포로도 일리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금세 수용적인 태도를 드러낸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래도 잠시 망설인 끝에 답했다.

“신사시다.”

용여홍은 예의 바르게 송하균의 동의를 구한 뒤에야 물었다.

“신사? 어느 달지기의 신사?”

어인 포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달지기가 아냐. 원래 우리 세 번째 목사셨어. 우리가 믿는 건 구세계의 하느님이다. 나, 나중에서야 그는 우리에게 본인을 신사라고 부르게 했지.”

어인어는 레드리버어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용여홍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만 상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송하균은 아마 자체적으로 현지 아류인들의 언어를 공부한 적이 있는지 상당히 유창하게 물었다.

“그건 언제 있었던 일이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어.”

어인 포로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듯 편안하게 답했다.

송하균도 계속 부드럽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때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순간 흰자가 대부분인 어인의 눈에 두려운 빛이 어렸다.

“그, 그가 굉장히 강해졌어. 무척 무서워졌어. 꼭 신령의 화신처럼.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는 쉽게 죽이고, 군대 한 부대도 가볍게 제거하고.”

성건우가 흥미를 보였다.

“그전에는? 그전에도 강했어?”

어인은 원숭이 가면을 힐긋 보다, 썩 내키진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기이한 능력들을 갖고 있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어. 누군가의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해서 밥을 못 먹게 한다거나,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쉽게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진술을 가만히 듣던 송하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신사로 변하기 전에 그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나? 아니면 자네들이 겪은 일은 없었어?”

기억을 되새기던 어인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우린 분노의 호수에서 가장 큰 그 섬에 상륙했었어.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도 그곳에 읍내와 여러 마을이 있다고 하셨었지.

처음에만 해도 우린 늘 밭을 일구고, 물고기도 잡고,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하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는데, 나중에는 그곳에 가보고 싶더라고. 물론 거기 사는 사람들 상황에까지 관심을 둔 건 아니었지만.”

가고 싶어졌단 말을 하며 감정의 기복을 보인 그는 더 이상 송하균을 믿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더욱 우호적인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격퇴당한 뒤 우리는 줄곧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했어. 젊은 애들 대다수는 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 큰 섬에 흥미를 보였고.

그 섬은 우리가 사는 곳보다 훨씬 더 넓고 도로도 꽤 잘 보존돼있어. 곳곳에 버려진 논밭도 있고.

우린 점점 섬에 사는 인간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궁금해졌어. 외부의 습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거든. 한 차례 탐색 끝에 우리는 그들이 일찍이 모여 살던 마을과 기록을 발견했었지.”

‘팀장님이 오셨더라면 이 이야기에 엄청난 흥미를 느꼈을 텐데.’

어인어에 점차 적응해나가기 시작한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인 포로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그 섬에 살던 이들이 구세계 파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염호(閻虎)라는 신을 믿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염호는 애쉬랜드 신화 속 염라대왕의 강생이래.

이러한 신령의 비호 아래 섬의 사람들은 어떠한 재난에도 휩쓸리지 않고 굉장히 잘 살았어. 그러나 어느 정도의 힘을 축적한 그들이 분노의 호수 주위 구역을 점령하기 시작하려던 그때, 잠들어버린 그 신령이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는 거야.

더 이상 신령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섬에선 곧 대규모의 무심병이 발발했지. 남은 인간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심자들에게 전부 살해당했겠지.”

‘대규모의 무심병이라…….’

용여홍은 어인의 이야기에 머리가 저릿해졌다.

반면, 성건우는 여전히 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너희는 그 잠든 신령을 찾아낸 거야?”

어인 포로는 떨리는 입술로 답했다.

“맞아. 우리는 신이 잠들어 있는 신전을 발견했어.”

송하균이 입을 열기 전, 성건우가 그를 대신해 물었다.

“그 안은 어땠는데?”

방금의 대화로 확신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이 어인 포로는 천천히 말해주기만 하면 레드리버어도 알아듣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인 포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기이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어. 우린 감히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당시엔 목사였던 신사에게 알리는 수밖에 없었어.”

송하균은 이러한 답에 전혀 놀라지 않고 반문했다.

“그곳에서 나온 뒤에는 자네들에게 그 신전을 탐색하지 말라고 했지?”

어인 포로는 기겁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머리로 생각을 했으니까⋯⋯.’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