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 물건들
방어선에서 나가 차를 세워둔 곳에 이른 순간, 용여홍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내걸렸다.
이곳은 운 나쁘게도 포화에 휩쓸렸던 모양이었다. 황토색 ATV 유리는 다 부서졌고, 타이어도 바람이 빠져 홀쭉했다.
다행히 지프는 온전한 편이었다. 두꺼운 장갑과 방탄유리, 특제 타이어와 그 옆에 세워진 다른 차들 덕분에 조금 긁힌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차는 못 쓰겠는데⋯⋯. 우리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장목화는 짤막한 감상을 남긴 뒤, 지프로 걸어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내가 운전할게. 우리 작은 흰둥이는 밤새 고생했으니까.”
“괜찮은데요.”
백새벽은 장목화의 끈질김에, 결국 이 별명에 체념한 모양새였다.
그때, 성건우가 나서서 장목화의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아직 약간 흥분 상태라서 그래.”
장목화는 바로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살아나셨네? 방금까지만 해도 정신 빼놓고 있더니, 배고파서 그래?”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기는 했다.
“고민을 좀 하고 있었어요.”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어떤 고민?”
장목화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재빨리 차에 탑승한다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얼른 운전석에 앉았다.
* * *
장목화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이걸로는 성건우를 저지할 수 없었다. 결국 뒷좌석에 앉은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레드스톤 마켓의 사람들과 어인, 산 요괴가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는 한숨을 토해냈다.
“⋯⋯아주 어려운 문제네. 추리 광대 능력으로 의형제를 맺고 순환 논증을 완성해도 효과는 길지 않잖아. 어쨌든 넌 이곳을 곧 떠나야 하니까.”
하룻밤 새 쌓인 시체들과 땅을 붉게 물들인 피를 본다면, 각성자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공존을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몇 대에 걸친 꾸준한 노력이 수반돼야만 서로에게 쌓인 응어리를 겨우 풀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얌전히 장목화의 말을 듣던 성건우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저를 여러 명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게 안타깝네요. 한 명이라도 여기 남겨두고 가면 참 좋을 텐데.”
‘내가 한 말이 그 말이었나?’
장목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본래 두 사람의 사고 방향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차창 너머 폐허 도시를 보고 있던 용여홍이 가면을 벗고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다.
“한 산 요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어요.”
“음?”
장목화는 짧은 콧소리로 대꾸했다.
용여홍은 그 산 요괴가 죽기 전 자신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한편 그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는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하는 작업의 의의를 더 깊이 깨달았나 보네. 병의 원인을 밝혀내야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이 빌어먹을 세상을 치료할 수 있는 거지!”
말을 잇는 동안 그녀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이내 성건우가 웃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앞으로 나랑 같이 전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건가?”
장목화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의미 있는 일을 어떻게 안 해?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하고, 무심병의 발병 원리와 치료 방법을 찾아내면 온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용여홍은 그녀를 따라 웃기는 했지만 백새벽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은 그런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이 주제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장목화는 다시 후시경을 통해 뒷좌석의 성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건우야, 너 그 어인 각성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 좀 다 꺼내 봐. 조금 전에 봤을 때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잖아. 이유가 뭘까?”
“야, 라고 부르세요.”
“뭐?”
장목화는 당연히 이번에도 성건우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성건우의 진지한 답변이 이어졌다.
“팀장님이 그랬잖아요. 우리 팀원들 별명이요. 여홍이는 작은 빨강이, 새벽이는 작은 흰둥이, 저는 야, 라고요.”
“⋯⋯.”
장목화는 짜증을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표정이 쉴 새 없이 변했다. 이에 백새벽의 얼굴 근육이 약간 위로 솟는 것이 곁눈에 들어왔다. 네 사람의 가면은 사실 전면을 다 가리진 못해서, 옆에서는 얼굴 일부분이 보였다.
그러자 약간 부끄러워진 장목화가 물었다.
“야, 너 지금 웃고 있는 거야?”
백새벽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프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유쾌하게 흐르던 그때, 성건우가 어인의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말린 과일, 특정 식물의 뿌리, 조악하게 포장된 녹색 사탕, 두껍고 긴 바늘 몇 개였다.
장목화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게 다 뭘까?”
‘그 강력한 각성자가 이런 걸 가지고 있었다고?’
마찬가지로 뒷좌석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백새벽이 성건우가 들고 있는 물건들을 잠시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이건 말린 매실일 거예요.”
그녀가 가리킨 건 검고 통통한 말린 과일이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물건이니만큼 곧장 먹어볼 순 없어서 그녀는 살짝 들어 냄새만 맡았다.
‘말린 매실?’
장목화는 순간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식물 뿌리와 녹색 사탕에 대해선 끝까지 아무 추측도 나오지 않았다.
* * *
지프는 곧 보루와도 같은 경계 교회당에 도착했다.
경고자 송하균은 이미 교회당 경비대원을 데리고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더 적은 인원이 된 것 같았다.
송하균은 곧 에이돌른 성휘를 향해 예를 갖추고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가면들인지라 딱히 질문은 필요 없었다.
“그 어인 각성자를 해결하셨다고요?”
벌써 세 번째로 듣는 질문이었다.
“예.”
장목화의 답변도 늘 한결같았다.
이내 송하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분들이 없었더라면, 전 교회당으로 물러나 브랜드를 내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을 겁니다.”
“경고자님도 숨겨진 강자이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장목화는 당연히 성건우를 막고 싶었지만, 이미 한발 늦고 말았다.
흠칫 놀란 듯하던 송하균은 화를 내기는커녕 쓴웃음만 보였다.
“전 대가가 가중될까 두려워 여태 실력을 높이지도 않았습니다. 달지기의 은혜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해요. 더는 바랄 수가 없지요.”
‘두렵다⋯⋯. 전에 이 경고자가 그랬지, 사람은 늙을수록 겁이 많아진다고.’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성건우는 어인 각성자에게서 찾아낸 물건들을 꺼내놓으며 진심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어디에서 난 겁니까?”
송하균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그 물건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 어인 각성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입니다.”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더욱 집중해서 그것들을 살피던 송하균이 잠시 후 조악하게 포장된 녹색 사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연합 공업의 매실 사탕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죠.”
대부분의 황야유랑자 거점에서 사탕은 사치품이었다.
‘매실 사탕?’
장목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후로도 송하균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건 말린 매실일 겁니다. 이게 바늘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이, 이, 이건 부근의 산과 숲에서 나는 한 식물의 뿌리입니다. 우린 이걸 헛먹기라고 불러요. 경미한 독성이 있어 설사를 유발하지만, 기운을 내고 졸음을 쫓는 효과가 있죠. 어렸을 때 그들을 따라 야외로 사냥을 나갔다가, 밤샐 일이 생기면 졸음을 쫓으려 한 조각씩 씹어먹곤 했습니다.”
헛먹기라는 건, 안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먹어봤자 금세 아래로 쏟아내며 심지어는 배 속을 텅 비워버리기까지 하기 때문이었다.
설명을 듣던 장목화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매실 사탕, 말린 매실, 각성제 역할을 하는 식물 뿌리, 두껍고 긴 바늘, 이것들이 설명하는 게 뭘까?”
성건우는 거침없이 답했다.
“임신!”
“임신이랑 바늘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게다가 어느 임산부가 설사를 유발하는 음식을 먹으려 하겠어?”
장목화의 반박에도 성건우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임신했을 때는 변비에 걸리기 쉬워요. 바늘은 곧 태어날 아이의 옷을 짓는 데 필요한 물건이고요.”
장목화는 그의 설명에서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건우는 생명 제례 교단의 정식 교도이기도 했다.
적당한 때에, 백새벽이 나섰다.
“기운을 북돋을 때 쓰는 걸 수도 있어요. 말린 매실과 매실 사탕은 신맛 때문에 짧게나마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게 해주죠. 바늘도 그렇고요.”
그녀는 일찍이 사냥감을 쫓기 위해 스스로의 뺨까지 쳐가며 잠들지 않으려 노력한 적도 있었다.
장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성건우를 팩 노려보았다.
“그 어인 각성자가 이것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건, 계속해서 말짱한 정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야. 대가를 지불하면서 피로를 쉽게 느끼게 된 걸까? 수시로 졸음이 찾아왔나?”
“그럴 수도 있지요.”
송하균이 동조했다.
장목화는 이 기회를 이용해 본론으로 들어갔다.
“송 경고자님, 그 어인 각성자는 의식을 잃은 후 변이를 보였어요.”
그녀는 의식을 잃은 어인의 체내에서 발산된 기이한 기운과 속에 기생충이 들어있기라도 한 듯 꿈틀거리던 피부를 설명했다. 성건우가 몇 차례나 총을 쏠 때까지 깨지지 않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묘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송하균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겁니까?”
장목화가 어떤 답을 하기도 전, 그가 망설임 끝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를 이 교파로 이끈 분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분은 현재 공포 주교단의 구성원이시죠.
그분이 말씀하시길, 심령의 복도 깊은 곳에 이른 강력한 각성자는 심령의 복도 안에, 심지어는 현실 세계에도 자신의 기운을 남길 수 있답니다. 이 기운은 어느 물품과 결합하며 기묘하고 무시무시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죠.
그 어인 각성자가 이러한 기운과 결합한 존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자체는 아직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지 못했을 겁니다.”
* * *
송하균도 심령의 복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렇게 장목화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에 팀원들을 데리고 여관 구역으로 돌아왔다. 이후, 구조팀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어느 순간 장목화가 흐릿하고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마도 뜨끈하고, 온몸엔 쑤시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이 영 불편했다.
‘병이 났나?’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장목화는 베개를 등 뒤에 받치고 앉았다.
손을 이마로 뻗는 사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다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성건우가 보였다. 그는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바늘과 실로 총알구멍이 여러 개 뚫린 외투를 열심히 꿰매고 있었다.
바느질은 장기적으로 애쉬랜드 위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반고 바이오 직원들에게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구조팀이 막 설립됐을 당시, 장목화는 바느질에 관한 수업도 한번 하려다 자신보다 더 능숙한 성건우의 바느질 실력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성건우가 14~5살 무렵부터 홀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었다. 뭔가 깨닫게 된 그녀는 더 이상 그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