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악마
눈앞의 산 요괴가 완전히 숨을 거둔 후, 용여홍은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이 빌어먹을 세상!”
자리에서 일어나 백새벽의 곁으로 돌아간 그는 유탄발사기에 탄약을 채워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 인류를 구원하고 싶다는 건우의 꿈을 이젠 이해할 것 같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명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자연스레 건우라는 이름과 그 기괴한 청년 사이에 등호가 그려졌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든 이상할 게 없었다.
백새벽도 산 요괴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다른 이들의 은혜와 원한, 옳고 그름은 우리랑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나한테 주어진 일만 잘 해내면 될 뿐이야. 겨우 우리 몇 명이 어떻게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어? 우리에게 송 경고자 같은 강한 친화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이 100배, 1,000배 더 강해서 사람들이 서로 믿고 다시는 싸우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가 떠나고 나면 다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녀는 성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을 예로 들려다, 아직 이곳에 한명호와 다른 경비대원 한 명이 남아있는지라 송하균의 능력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침묵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무의미하진 않아. 구세계 파괴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무심병의 진짜 뿌리를 찾지 못하면, 구세군이 정말 이상을 실현해 아름다운 신세계를 만든다고 해도 전부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무심병의 발병으로 모든 게 지금처럼, 심지어는 지금보다 더 나쁜 수준으로 퇴보해버릴 테니까.
내 생각엔 건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일단 병의 원인을 찾아 그걸 완전히 없애야 해.”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명호는 점차 어리둥절해졌다. 전부터 이들이 한 대형 세력 출신의 유적 사냥꾼 팀이리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팀의 목표와 이상이 이렇게 원대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겨우 네 명이서 그런 이상을 이룰 수 있을까? 퍼스트 시티에서도, 연합 공업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한명호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류인 진지에 대한 감시를 이어나갔다.
* * *
한편, 씁쓸한 감정을 정리한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또 뭐가 있는지 빨리 살펴보고 철수하자. 어인과 산 요괴의 돌격은 일단락됐어. 조금 있으면 그쪽에서도 여기 상황을 확인할 팀을 파견할 거고.”
지도를 가지런히 접은 성건우는 어인의 남루한 망토 주머니에 그것을 다시 넣어주곤, 뒤이어 잡동사니 한 무더기를 꺼냈다. 말린 과일, 특정 식물 뿌리, 조악하게 포장한 녹색 사탕, 두껍고 긴 바늘 몇 개였다.
이때 주차장 가장자리로 나아간 장목화는 자신이 아까 던져놓았던 총을 챙기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곧 성건우가 들고 있는 물건들을 확인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솔직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토론할 시간은 없었다. 장목화는 다시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마을 경비대원에게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경비대원은 유전자 개량과 조작을 받은 반고 바이오 직원과 달리, 여태까지도 정신을 차릴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장목화가 곁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이리저리 흔들어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다행히 페이카를 가져왔다. 빠르게 구급용 생물학적제제를 꺼낸 장목화가 그 약물을 경비대원 정맥에다 놓아주었다.
성건우도 어인에게 마지막으로 월계관을 잘 씌워준 뒤, 자리를 옮겨 전원을 끈 스피커를 전술 배낭에 잘 챙겨 넣었다.
곧이어 여자 대원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우아한 중 가면이었다. 이는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에게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너흰 누구야? 적들은?”
여자 대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장목화는 일단 성건우를 향해 외쳤다.
“저 사람한테도 페이카 한 대 놔줘.”
그녀가 가리킨 건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또 다른 남자 경비대원이었다.
분부를 마친 장목화는 그제야 웃으며 눈앞의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 대장이 고용한 용병이야. 적들은 이미 처리됐어.”
“해결됐다고?”
여자 대원이 놀란 듯 되물었다.
‘신 같기도, 악마 같기도 했던 괴물을 겨우 이 두 명이 처리했다고?’
그녀는 외골격 장치를 착용했지만, 그 괴물 앞에서 마치 신생아가 된 듯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맞아.”
장목화는 미끼로 썼던 외투를 챙기며, 남자 대원에게로 향하는 성건우를 한번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다 너희 덕분이야. 만약 너희가 어인의 주의를 돌리고 그놈들의 경호원 대부분을 처리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도 손쓸 틈이 없었을 거야. 자, 이제 일어나. 어서 떠나자. 곧 적들의 대형 부대가 이쪽으로 올 거야.”
원숭이 가면을 쓴 용병 덕분에 정신을 차리는 동료를 확인한 여자 대원이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고마워.”
“고마워할 것 없어. 너희를 깨운 건 미끼가 필요해서니까. 너희가 적들의 공격을 몰아주면 조금 더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은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으니 공격을 받더라도 별문제 없을 거 아냐.”
장목화는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모두 가면에 가려졌다.
여자 대원은 그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몇 초 후, 경비대원 둘은 테크놀로지 빌딩 뒤쪽 주차장에서 나와 엘 마트와 6일 쇼핑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어인과 산 요괴들의 포탄과 총구는 모두 그 두 사람에게 쏠렸다.
하지만 두 대원은 군용 외골격 장치의 도움 아래,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도약 몇 번으로 무너진 건물을 뛰어넘으며 적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의 엄호 아래 작게 우회하면서 순조롭게 이동한 성건우와 장목화는 적들의 진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물 잔해 옆쪽에 다다랐다.
그렇게 원래 바리케이드 근처에 이를 무렵, 성건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야, 우리!”
이는 오인 사격을 받지 않기 위함이자 엄호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무전기를 통해 이 사실을 알리려 했던 장목화는 냅다 소리를 질러대는 성건우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벨트로 뻗었던 손을 거뒀다.
두 사람은 이내 철저한 엄호 아래 백새벽, 용여홍이 있는 방에 당도했다.
시체와 피, 총알 자국과 폭발 흔적이 남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장목화가 용여홍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했어.”
수많은 적의 돌격 아래 살아남은 것만 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정말로.”
백새벽도 동조했다.
성건우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가면을 쓰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용여홍은 햇빛처럼 찬란한 친구의 웃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 다 힘을 합친 결과죠.”
용여홍은 기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겸손하게 답했다.
이때 한명호가 물었다.
“그쪽 상황은 어땠나?”
성건우와 장목화가 그 무시무시한 어인 각성자로부터 살아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는 이들의 실력에 전보다 더 높은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가 입을 열기 전, 성건우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음, 자장가는 못 틀어줬어. 스피커에 그 노래가 없어서.”
“⋯⋯.”
한명호는 상대의 답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 말을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늘 그랬듯 장목화가 나섰다.
“이미 해결됐어. 더는 갑작스레 질식당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
“해결했다고?”
놀란 한명호가 되물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마을 주민이라도 조금 전 일로 그 아류인 각성자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한지 체감할 수 있으니, 베테랑 사냥꾼인 한명호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자는 100미터 밖에서도 수백 명의 사람을 동시에 질식시킬 수 있었다. 마치 신령의 사자 같기도, 악마의 화신 같기도 한 존재였다. 이곳에 레나토가 있었더라도 그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류인 각성자가 훤칠한 키와 뛰어난 생김새를 제외하면 별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에게 패배했다니……!’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희들의 엄호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접근조차 못 했겠지만.”
솔직히 말해 군용 외골격 장치가 아류인 각성자의 시선을 끌어주지 않고, 그들이 경호원들을 처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당장 성건우에게 전기 충격을 가해서라도 끌고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어인 각성자는 건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강한 존재였다.
곧 침묵에 빠진 한명호의 시선이 빠르게 구조팀원들 사이를 오갔다.
그는 이제야 이 팀이라면 여러 대형 세력에서도 알아내지 못한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한명호의 마음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 * *
테크놀로지 빌딩 뒤쪽 주차장.
어인과 산 요괴로 이뤄진 팀이 이곳으로 지원을 왔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로 곳곳에 널린 시체였다. 그중 일부는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긴장으로 졸아드는 마음을 안은 채 얼른 주차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그들은 곧 덩치 큰 어인을 발견했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두 눈을 감은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엔 월계관이 여전히 똑바르게 씌워져 있었다.
“신사(神使)⋯⋯.”
무리를 이끄는 한 어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눈에 신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류였다. 만약 그가 강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산 요괴는 절대 이렇게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말을 잘 듣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신으로 변하기 시작하던 그는 죽어 있었다. 적들이 보낸 팀에게 완전히 숨통이 끊겨 버렸다.
형용할 수 없는 적막 속, 한 어인이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외쳤다.
“악마다! 그들이 보낸 건 악마야!”
곧이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세 번 울리고, 아류인들은 대포 등의 무기를 다 거둬들였다. 무리는 그대로 썰물처럼 폐허 도시를 떠나가고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마을 경비대원이 혹시 있을지 모를 아류인의 두 번째 공격에 마음을 졸이던 그때, 어인과 산 요괴들은 결국 이렇게 철수를 시작했다.
* * *
하늘이 점차 밝아오자 한명호는 무전기를 거둬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확실히 철수했어. 이제는 경계와 정탐을 담당할 이들만 남아있어도 될 것 같군.”
전쟁이 일단은 끝이 났다는 뜻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며 하품을 하던 장목화는 이내 사신 바주카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었다.
“그럼 우리 용병 계약도 이걸로 끝인가?”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렇지.”
한명호는 신중하게 답을 했다.
이때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도 다들 각자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장목화가 다시 웃었다.
“우린 레드스톤 마켓에 며칠 더 머무를 생각이야. 때맞춰 잔금 치르는 거 잊지 말라고.”
잔금은 군용 외골격 장치와 팀원 네 명이 먹을 일주일 치 식량이었다.
“그래.”
한명호도 시원하게 답했다. 그가 보기에 이 용병들이 없었다면 이번 전쟁으로 레드스톤 마켓은 멸망에 가까운 재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가장 위급한 순간이라 경계 교파에서도 힘을 쓰지 못했을 경우에 한한 일이겠지만.
장목화는 곧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다가 다시 한명호를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게. 어, 포로들 몇 명이 정신을 차리거든 우리한테 알려줘. 묻고 싶은 게 좀 있거든.”
소수의 부상자가 있었지만, 쓰러진 곳이 레드스톤 마켓 방어선 안이라 아류인 연합군은 결국 그들을 두고 떠나야 했다.
“그래.”
한명호에게도 그만한 힘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