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수려한 공략
나팔 위주로 이루어진 음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성을 꿰뚫고 뒤덮으며 테크놀로지 빌딩 뒤쪽 전체로 울려 퍼졌다.
이때 덩치 큰 어인은 두꺼운 장갑으로 뒤덮인 차를 몰아, 콘크리트 더미 뒤쪽에 숨은 성건우를 향해 미친 듯 돌진하는 중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성건우는 몸을 훌쩍 날린 후, 손과 발로 콘크리트 더미를 가볍게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광!
두꺼운 장갑으로 싸인 차가 콘크리트 더미와 충돌하며 온 땅이 진동하고,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마터면 그 건장한 어인이 차 앞 유리를 뚫고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억지쟁이 능력에 이성을 잃기 전, 안전띠를 매는 걸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월계관 어인은 터진 에어백에 가슴을 압박당하며 숨이 약간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저깟 적 한 명을 죽이겠다고 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다니! 어떤 능력에 영향을 받은 거지? 저 사람은 설마 각성자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월계관 어인은 재차 자동차를 몰았다. 방향을 틀어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굉장히 튼튼한 그의 자동차는 콘크리트 더미와 충돌했는데도 멀쩡했다. 엔진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었다.
그때, 이 덩치 큰 어인의 눈앞에 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누군가 차의 보닛 위로 떨어진 것이다. 그를 받아낸 차체도 미미한 진동을 일으켰다.
상대는 입이 뾰족하고 의기양양해 보이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인의 질주를 막은 건 바로 성건우였다.
이곳으로 달려와 몸을 날려 차 보닛 위에 착지한 그는 허리에 권총 두 자루를 차고, 가지고 있던 모든 수류탄을 꺼내 차 유리 앞에 쌓았다.
그러나 이 차는 단순한 장갑차가 아닌, 방탄유리까지 더한 대배기량 자동차였다. 성건우도 딱히 방탄유리를 날리려는 목적으로 수류탄을 쌓는 건 아니었다. 그저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건우가 수류탄의 위력을 확신하지 못하듯, 월계관 어인도 방탄유리의 위력을 확신하진 못했다.
성능시험을 할 때 이렇게 여러 수류탄을 동시에 폭발시키면서까지 과장된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설령 차량 개조 기술자가 이깟 수류탄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한들 실제 상황에서 그런 말을 믿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흑녹색 수류탄이 하나하나 유리창 앞쪽으로 천천히 굴러오는 것을 바라보던 월계관 어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는 하마터면 질식 능력을 유지하는 것도 잊을 뻔했다.
그다음 순간, 차량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성건우는 입꼬리를 씩 말아올렸다. 어인은 당연히 가면에 가려진 그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동시에 한 수류탄 핀을 뽑은 성건우는 자동차 유리창 앞에 수류탄을 놓아둔 뒤, 월계관 어인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바리케이드 뒤쪽으로 몸을 굴렸다.
월계관 어인은 성건우가 수류탄의 핀을 뽑자마자 곧장 차 문을 열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 손 모두 그의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양손 동작 불능 능력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딱히 제약은 없었다. 갑자기 운전석 문이 알아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어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황급히 차에서 뛰어내린 어인은 동그랗게 굴러가, 방금 충돌로 반쯤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 뒤쪽에 몸을 숨겼다.
콰광! 콰광!
차 앞 유리에 잔뜩 쌓여있던 수류탄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하늘을 꿰뚫을 듯한 화염이 피어오르며 장갑차 앞 유리는 소리 없이 깨져버렸다.
폭발이 차차 사그라들 무렵, 다시 소도회 서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악에 힘을 받은 듯 숨어있던 곳에서 두 팔을 흔들며 나온 성건우는 곧장 월계관 어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이미 질식의 효과는 사라진 뒤였다. 성건우는 골인 지점을 코앞에 둔 달리기 선수처럼 힘차게 뛰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심장 박동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그러자 성건우는 속도를 늦추고 허리를 살짝 굽혔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뒤쪽에서 다시 월계관 어인이 일어났다. 그가 입은 짙은 파란색 망토는 곳곳이 다 해져 있었고, 흑회색 비늘은 아예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는 질식 능력을 포기하고 심장 박동 가속 능력을 발휘해 성건우에 대적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근처에 있었지만, 그는 최대한 빨리 적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경계심을 높였다.
* * *
엘 마트와 6일 쇼핑몰 일대의 레드스톤 마켓 방어선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곳곳에서는 이미 코앞에 접근한 산 요괴와 교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때, 산소 부족으로 멍해진 용여홍의 머리가 돌연 맑아지기 시작했다. 평소엔 소중함을 느낄 수도 없었던 귀한 공기가 자유롭게 코끝을 드나들었다. 공기 중엔 초연의 냄새도 섞여 있었지만, 그마저도 달콤했다.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신 용여홍은 유탄발사기를 쥔 채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무너진 건물 위로 기어오른 산 요괴들과 그들이 던지는 수류탄 폭격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젠장!’
용여홍은 달빛 아래 드러난 파란 피부들을 보며 욕설을 뱉었다.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양발을 구르며 방 반대편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백새벽 역시 비슷하게 몸을 날리고 굴리면서 미리 준비해 둔 두 번째 바리케이드 뒤쪽에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콰당!
착지하자마자 유탄발사기를 내버린 용여홍은 바닥을 기어 벽 뒤로 돌아가 쌓아둔 모래주머니 뒤에 몸을 숨겼다.
콰광! 콰광! 콰광!
수류탄으로 일어난 거친 충격은 원래의 방어선을 거칠게 헤집었다. 양쪽 벽은 결국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경비대원 몇몇은 이 공격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 버렸다.
뒤이어 산 요괴들 일고여덟이 기관단총과 돌격소총을 쥐고 반쯤 무너져 내린 창틀을 뛰어넘으며 방어선에 진입했다.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일단 사방을 향해 다짜고짜 난사부터 했다.
밀집된 총성 속, 반격하려던 몇몇 경비대원이 다시 총탄에 난자당했다.
이제 이 방어선에 남은 건 용여홍과 백새벽, 그리고 한명호를 비롯한 소수의 몇 명뿐이었다.
남은 이들은 적들이 가까워지고 있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각자의 엄폐물에 모습을 숨긴 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잠시 후, 산 요괴의 난사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때였다. 백새벽이 갑자기 오렌지 소총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더니, 위를 향해 외투를 던져올리며 바리케이드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다다!
그녀가 던진 외투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날린 그녀는 일찍이 뽑아둔 아이스모스와 연합 202를 쥔 채 방 안으로 침투한 몇몇 산 요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백새벽이 쏜 총알은 모두 명중했다. 다만 그중 몇 명만 치명상을 입고, 나머지는 손과 발 등에만 타격을 입었을 뿐이었다.
다친 산 요괴들이 내지른 비명을 듣고, 용여홍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메고 있던 베르세르크 돌격소총을 받쳐 들며 반쯤 쪼그려 앉았다. 그 후, 모래주머니 뒤쪽에 몸을 숨기곤 산 요괴들을 향해 난사를 시작했다.
정확하게 겨냥하는 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의 역할은 그저 그들을 제압해 사격을 마친 백새벽이 숨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이는 구조팀이 했던 훈련 중 하나였다. 물론 실전에 적용할 기회는 없었지만, 용여홍은 이제 이론보다 강한 경험을 숱하게 쌓은 상태였다.
그는 더 이상 위험한 상황 앞에 예전처럼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감정을 가라앉히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변화로 이렇게 배운 내용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위드 시티에서 백새벽과 거의 내내 붙어 있었던지라, 지금은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제법 손발이 맞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난사하던 와중 용여홍은 한쪽에 숨어 있다가 이 기회를 이용해 반격에 나서는 한명호를 보았다. 정확한 사격 실력을 자랑하는 저 남자는 단 한 발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이러한 반격으로 방어선에 침투했던 일고여덟 명의 산 요괴 중 절반은 이미 다 쓰러졌다. 겨우 남은 세 명은 엄폐물 뒤에 숨어 대치 중이었다.
확실히 사람 쪽이 우세했지만, 산 요괴들은 계속 밖에서 밀려들고 있었다.
또한 용여홍이 제일 우려하는 건 다시 질식 능력의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다시 또 숨통이 막혀온다면 이 방어선은 1~2분 안에 모든 전투력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 * *
테크놀로지 빌딩 뒤쪽 주차장.
월계관 어인은 성건우의 각성자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 반대편으로 일정 거리를 이동했다.
성건우는 그에게 접근하거나 총을 뽑아 방아쇠라도 당기고 싶었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심장 박동 때문에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한계에 봉착했으나 뼛속 깊은 곳에 자리한 집요함으로 느릿하게나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탕! 탕!
갑자기 어디선가 웬 총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화단 쪽에서 나고 있었다.
그 화단에 어느샌가 벌떡 일어난 장목화가 서 있었다.
탕! 탕!
그녀는 한 손에 아이스모스, 한 손엔 연합 202를 쥐고 월계관을 쓴 어인만 쳐다보며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사실 장목화는 일찍부터 깨어나 있었다. 화단을 방패 삼아 적절한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며, 내내 혼수상태에 빠진 척했을 뿐이었다.
조금 전 분명히 의식을 살짝 잃은 건 맞지만, 생체 공학 의수 내 보조 칩이 장목화의 신체 상태가 비정상적인 것을 감지하고, 응급조치 기능을 활성화해 전류로 그녀를 깨워줬다.
장목화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 월계관 어인의 눈빛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분분히 날아올라 그와 장목화 사이를 가로막으며 틈이 많은 벽을 세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이 벽들을 촘촘히 메워 올리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탕! 탕!
결국 장목화가 쏜 총 두 발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가로막혀 목표 명중에 실패했다. 하지만 장목화의 공격 덕분에 성건우의 심장 박동은 원상태로 돌아왔고, 강력한 신체 기능을 가진 다른 부분들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쿵, 쿵, 쿵!
성건우는 단 몇 걸음 만에 덩치 큰 어인의 앞으로 달려가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월계관을 쓴 어인은 그 주먹을 막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성건우의 주먹은 콘크리트 덩어리 틈을 관통했다. 여러 악기의 박자감 넘치는 소리가 번지는 와중에, 성건우의 주먹은 어인의 옆얼굴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월계관을 쓴 어인의 이가 후두둑 빠졌다. 몸도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그의 주위로 떠올랐던 콘크리트 덩어리들도 쿵,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성건우는 곧장 왼 주먹을 휘둘러 반대편 옆얼굴도 때렸다. 그러자 왼편으로 기울던 어인의 몸이 다시 중심을 찾았다.
그 후 성건우는 자연스레 아래로 손을 휘두르며 적의 어깨를 움켜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성건우의 무릎이 위쪽으로 홱 치솟아 올랐다.
퍽!
덩치 큰 어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지만 성건우는 멈추지 않았다. 팔을 높이 쳐들어 두 손을 모아 깍지까지 낀 뒤, 마치 방망이를 휘두르듯 상대의 목을 매섭게 후렸다.
퍽!
월계관을 쓴 덩치 큰 어인은 끝끝내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