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심야
홀 옆문에 서 있던 용여홍은 심복들과 멀어지는 앙헤바스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성건우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같이 화장실 가자며?”
성건우가 웃으며 답했다.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
용여홍은 아무런 답 없이 성건우와 함께 교회당 공중화장실로 갔다.
성건우가 큰일을 본다기에 용여홍은 곧장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다.
복도 반대편에서 차가운 바람이 잔잔히 불어왔으며, 창밖으로 신물들이 보였다. 깊은 밤은 너무나 고요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그때, 용여홍은 돌연 느릿하게 열리는 창문과 그 창문을 통해 안쪽 복도로 몰래 넘어 들어오는 한 인영을 포착했다.
심장이 바짝 졸아든 용여홍이 얼른 아이스모스 권총을 뽑아 들었다.
뒤이어 밝은 달빛 아래 상대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노란색 머리칼, 맑은 녹색 눈동자,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그마한 소년, 바로 비엘이었다.
용여홍 역시 단박에 그 숨바꼭질 챔피언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비엘도 용여홍을 보며 순수한 웃음을 그렸다.
“너희 외부인들에게는 화장실 문 앞에서 자는 문화가 있는가 보지?”
소년은 분명히 비웃고 있었지만, 용여홍은 화를 잘 참는 편이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 원숭이 가면 쓴 애?”
비엘이 한 걸음, 한 걸음씩 공중화장실 쪽으로 걸어왔다.
“응.”
그러자 용여홍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엘은 그를 몇 초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또 불쑥 웃었다.
“걔 싫지 않아? 말도 못되게 하고, 키도 크잖아.”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한 용여홍이 우물쭈물하다가 대꾸했다.
“시,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야. 착해. 악의도 없어. 가끔 비웃긴 해도, 상대를 자극해서 더 분발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가끔 남의 단점을 지적하는 건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그러는 거고. 전부 다 남을 위한 행동인 거지. 그 애는 한 번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경시하거나 차별한 적이 없어. 아류인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이어나갈수록 그의 말은 더 유창해졌다.
비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화도 안 나?”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답했다.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모든 일에 화를 낼 순 없잖아. 난 지금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런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진작 말했을 거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자조하듯 웃었다.
“난 언제나 평범한 편이었어. 유⋯⋯, 음. 그걸 했는데도 키가 175센티미터밖에 안 돼서 우리 무리 남자들 평균 키에도 못 미치고, 머리가 그렇게 똑똑한 것도 아니라서 성적도 보통 수준이었지.
전에 난 약간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어. 늘 곁에 있는 사람보다 뒤떨어지고 심지어는 운도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주 슬프고 화도 났어.
근데 이제 난 한 가지 사실을 알아. 일단 지금은 내 자신이랑 나를 비교하려고 해. 어제의 나보다 강해졌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자랑스럽잖아.”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이 유전자 개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용여홍은 이성적으로 그 부분을 숨겼다.
비엘은 그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다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넌 진짜 순해 빠진 사람이구나.”
이내 비엘은 옆쪽으로 몇 걸음 옮겨선, 창틀에 도움닫기를 해 통풍구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용여홍은 소년에게 다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넌 안 자?”
비엘이 통풍구 안쪽에서 고개만 쏙, 내밀며 웃었다.
“이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이야. 너를 해치려는 사람투성이라고. 그러니까 어디에서 쉬는지 남들에게 알려선 안 돼. 이 통풍관은 또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어. 이 통로를 따라 다른 장소로 가고, 각각 방 안의 광경을 살피는 게 얼마나 재밌다고.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거잖아.”
자신의 노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뽐내듯 말하던 소년이 돌연 미간을 팩 구기며, 용여홍의 뒤쪽을 향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비엘이 통풍관을 통해 빠르게 사라진 뒤, 용여홍은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어느새 나온 원숭이가 공중화장실 바로 입구에 서 있었다.
“생각해봤는데. 저 애, 혹시 관음증이 아닐까?”
성건우는 진지하게 비엘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곱씹었다.
“너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용여홍은 흠칫 놀랐다.
성건우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진지하게 제안했다.
“넌 식사량을 좀 늘려도 되겠다.”
“왜?”
용여홍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래야 매일 몸무게가 더 늘어날 거잖아. 어제보다 더.”
‘……아이씨, 얘 어디부터 들은 거야?’
용여홍은 입꼬리를 살짝 뒤틀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성건우가 배를 문지르며 다시 거침없이 말했다.
“중간에 끊었어. 마저 하고 올게.”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던 용여홍은 순간 깨달았다.
‘누군가 밖에서 교회당에 들어온 걸 느끼자마자 곧바로 나온 거야? 나와서 나랑 같이 싸워주려고?’
용여홍도 친구의 행동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곧이어 볼일을 다 본 후, 두 친구는 구조팀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 순서대로 불침번을 서며 잠을 청했다.
* * *
폐허 도시 동남쪽 구역 가장자리 근처 고층 빌딩.
이 빌딩은 전선도 건재하고, 유지보수도 잘 되어서 불도 들어오는지라 엘리베이터도 무리 없이 운행되고 있었다. 이는 한명호가 치안관이 된 후 정성을 쏟아 건립한 감시탑 중 하나였다.
이곳에 한 레드리버인이 있었다. 금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셸러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나이는 20대로 어린 편이지만, 그는 세상 물정에 무딘 청년이 아니라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현재 셸러는 자동소총 한 정을 쥐고, 야간 투시 기능이 있는 망원경으로 구역 밖에 오랫동안 버려진 논밭과 더 먼 곳의 언덕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호수와 접하고 있는 레드스톤 마켓은 어인의 습격을 받기 쉬워, 제일 첫 번째 방어선도 그쪽에 구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한명호가 다른 구역을 등한시하는 건 아니었다. 북쪽에 자리한 경계 교회당이 산 요괴에 대적할 방어선이라면, 폐허 도시 내 다른 구역의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진 감시탑들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분노의 호수는 굉장히 넓었고, 어인은 특성상 서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뭍으로 올라와 도시를 빙 둘러 우회해 다른 곳에서 습격해올 수도 있었다.
관찰을 이어가던 셸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동료를 돌아보았다. 저 두 사람 역시 마을 경비대 일원이었다.
한 사람은 애쉬랜더 도정은, 다른 한 사람은 혼혈인 가우디였다.
이들도 야간 투시 기능이 있는 망원경으로 각기 다른 곳을 살피고 있었다. 치안관 한명호가 내린 특별 지시 때문이었다.
한명호는 애쉬랜더, 레드리버인, 혼혈인을 각 팀에 균등하게 배정했다. 서로 힘을 합쳐 외적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친근감과 믿음을 쌓고, 동시에 어느 한쪽이 나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서로를 견제하란 의미도 있었다.
이내 높은 콧대 사이, 움푹 들어간 눈자위 속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가우디도 자신을 향한 셸러의 시선을 느낀 것이다.
가우디가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와 함께 가우디의 검은 머리칼이 잠시 찰랑이다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전에 마을에 데리고 들어왔던 그 유적 사냥꾼 팀, 말썽부리는 데 일가견이 있나 봐. 헬빅의 무기 강도 사건의 진상도 벌써 밝힌 것 같던데.”
그는 레드리버어를 사용했다.
“그건 버즈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잖아.”
셸러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송하균은 교회당 경비들에게 버즈가 고발했단 사실에 관해 발설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 이후 각자 숨었던 곳에서 나와 조직된 마을 경비대원들은 저녁 무렵, 무기 강도 사건의 진상을 대부분 다 알게 되었다.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도정은이 먼 곳을 보며 끼어들었다.
“헬빅과 앙헤바스가 어떤 사람인지 설마 모르는 거야?”
그는 의도적으로 애쉬랜드어를 사용했다. 셸러가 알아듣지 못하리란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에 혼혈인 가우디만 한숨을 내쉬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이때 셸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뭔가 이상해!”
가우디와 도정은은 금세 지금까지의 화제도 잊고, 야간 투시 망원경으로 셸러의 감시 담당 구역을 돌아보았다.
흐릿한 달빛 아래, 언덕과 논밭의 경계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한 무리가 있었다. 더러는 차를 타고, 더러는 차를 밀고, 더러는 걸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숫자는 꽤 많아 보였다.
달빛이 조금 더 밝아지자 셸러는 더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다리 달린 어류처럼 흑회색 비늘로 덮인 피부와 이상하리만치 툭 튀어나온 눈이 보이고, 남색 피부에 짐승 가죽을 두른 누군가도 보였다.
그들은 기관단총이나 돌격소총 등의 무기를 들거나, 대포, 받침대, 탄약 등을 짊어지고 있기도 했고, 포차를 밀거나, 장갑차 안에 앉아 있기도 했다.
흡사 어두운 밤 속에 떠오른 귀신 무리 같은 광경이었다. 저들은 바로 인간형 생물, 어인과 산 요괴들이었다.
이 광경을 확인한 가우디가 외쳤다.
“한 대장님께 알려!”
셸러와 도정은은 침묵을 지켰다. 이 구역을 감시하는 팀은 이들이 유일했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 적들은 이곳 위치를 단박에 파악할 것이었다.
그리고 몇 초 후, 셸러와 도정은이 동시에 답했다.
“그래!”
시선을 주고받던 그들은 가우디가 군용 사이렌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연합 공업에 예약해 구매한 기기였다.
왜앵!
왜앵!
왜앵!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빌딩 꼭대기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깊은 밤을 타고 돌진하던 어인과 산 요괴들도 동시에 멈춰 이쪽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한 무리가 빠르게 갈라져 나오더니, 포차를 밀며 앞쪽으로 나아가 경형 박격포를 설치했다.
경보를 울린 가우디, 셸러, 도정은은 바로 빌딩 꼭대기에서 철수했다.
콰광! 콰광!
대포 하나하나가 붉은 불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왜앵! 왜앵!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에 잠들어 있던 구조팀 세 팀원이 벌떡 일어났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백새벽이 냉정하게 말했다.
“동남쪽에서 울리는 소리예요. 적습일 거예요.”
“어인과 산 요괴가 공격을 시작한 건가?”
장목화는 머리를 굴리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구조팀 모두 처한 환경을 고려해 옷 입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방어선을 우회하기로 했나 봐요.”
백새벽이 확신 없이 답했다.
“팀장님, 이제 어쩌죠? 교회당에 남을까요, 여관으로 돌아갈까요?”
물론 용여홍은 대규모의 전투와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위드 시티에서의 혼란으로 어느 정도 단련이 된 상태였다.
장목화가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한 이때, 성건우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절반의 무기와 여태까지 모아왔던 물자를 마을 경비대에 팔기로 하지 않았어요? 지금이 적기입니다.”
‘뭐?’
용여홍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성건우를 보며 그와 10여 초 정도 눈을 맞췄다.
고요한 침묵 속, 이내 시선을 거둔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한 말이 있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일단 송 경고자에게 물어보자. 어디로 가야 한명호와 마을 경비대를 만날 수 있을지.”
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같은 방향으로부터 연이은 포성이 들려왔다.
콰광! 콰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