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유유히
황토색 ATV 속, 로페즈의 머릿속도 웅웅 울렸다. 그도 앙헤바스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이라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린 로페즈는 경기관총을 든 채 다른 외지 망명자들과 함께 확성기가 자리한 곳으로 돌진했다.
이들에게 지금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첫 번째는 매복자를 처리하고, 그들을 교회 무장 세력으로 위장한 애쉬랜더로 모는 것.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를 통해 시간만 끌 수 있으면 됐다.
둘째는 곧장 포위망을 뚫고 차를 탄 채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사이, 로페즈는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경고자라고 나섰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역설적으로 실제 경고자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결국 로페즈는 첫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 * *
그 단층 건물 별관에 숨은 용여홍은 거인 같은 로페즈를 지켜보았다.
경기관총을 쥔 채 노란 탄띠를 메고, 완전 무장을 한 외지 망명자들과 총을 쏘며 정문으로 달려드는 남자에게선 엄청난 위암감이 느껴졌다.
자리에 반쯤 쪼그려 앉아 어깨에 사신 바주카포를 지고 숨을 들이마시던 용여홍은 장목화의 분부에 따라 이쪽으로 달려오는 이들의 측면을 향해 포탄 한 발을 쐈다.
그의 목적은 대규모 살상이 아니었다. 저들과 그 정도로 깊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않은가. 팀장이 용여홍에게 맡긴 임무는 바로 저들에게 겁을 주어 사방팔방으로 흩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장목화는 상황이 긴박할 때는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므로, 그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콰릉!
붉은 불빛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충격파에, 외지 망명자들은 속속들이 몸을 숨길 엄폐물을 찾았다.
용여홍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장전한 뒤 다시 그 구역을 겨냥했다.
요란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백새벽은 연이어 여유롭게 방아쇠를 몇 번 더 당겼다.
그녀가 쏜 총알은 황토색 ATV 운전석 차창을 명중했다. 안에 있던 기사는 재빨리 몸을 숙이고 반대편 문으로 기어 나가 타이어 뒤에 웅크렸다. 그리고 기사는 백새벽이 소형 트럭으로 목표를 바꾼 틈을 타 얼른 위치를 바꿨다.
잠시 후, 두 대의 차량 주위에서 사람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졌다. 다들 반격을 시도한다거나 할 새도 없이 어둠 속 어딘가로 다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 * *
같은 시각, 호숫가 주차장.
이곳엔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있었다. 풍성하게 수염을 기른 얼굴은 꼭 가면을 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바로 앙헤바스였다.
앙헤바스 역시 확성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미 바깥에 사달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는 본능적으로 부인하며 몇몇 심복들을 내보내려 했다. 로페즈를 도와 습격자들을 물리치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앙헤바스의 머릿속에 확성기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앙헤바스는 외지 망명자에게 속아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눈을 번득이던 그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 * *
이때, 사신 바주카포가 점령한 구역 안의 로페즈는 날렵한 몸과 강한 용기로 무장해 결국 화력 범위를 벗어나 단층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는 교회의 경고자입니다. 앙헤바스와 산 요괴의 결탁과 관련한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확성기를 장악한 상대는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로페즈는 경기관총을 들고 음성을 따라 돌진했다.
그에게 상대는 단순히 증오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로페즈는 반드시 상대를 제거하고 그 대신 확성기를 장악해 제대로 변명해야만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벽 하나를 우회한 순간,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정작 로페즈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너진 벽돌 더미 위에는 소형 스피커만 하나 얌전히 놓여 있었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 저는 경고자입니다⋯⋯.
이를 확인한 로페즈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등의 솜털까지 바짝 섰다. 그의 머릿속에선 단 하나의 단어만 맴돌고 있었다.
‘함정이다!’
함정은 종종 무시무시한 매복과 연결되곤 했다.
손에 쥔 경기관총을 들어 올릴 새도 없이 옆쪽으로 몸을 날린 로페즈는 연달아 몇 바퀴를 굴러가 스피커가 자리한 구역에서 벗어났다. 그러는 동안 계속 기관총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총도 과감하게 내던져버렸다.
홀로 돌아왔지만, 예상했던 총성이나 폭발음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혼란에 휩싸인 로페즈는 한 엄폐물 뒤쪽에 웅크린 채, 허리춤에서 연합 202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도망친 곳을 한번 돌아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지면에 굉장히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자는 파란 린넨 바지와 짙은 파란색 다운재킷을 입고서, 얼굴에는 의기양양해 보이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원숭이 가면?’
원숭이 가면을 쓴 상대는 곧 로페즈가 숨어있는 곳을 정확히 가리키며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보였다.
“아직도 옛날 격투 결과에 꽁해 있는 거야? 내가 기습했기 때문에 이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자, 기회를 줄게. 네 입장을 증명해봐.”
‘미친놈!’
로페즈는 우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우스운 이유는 상대가 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높은 곳에 숨어있었다. 그곳에서라면 스피커에 놀라 잠시 멍해진 로페즈를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습 대신, 공평하게 격투를 하려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로페즈는 그만큼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는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내 손에 들린 총이 장난감으로 보이나? 내가 그 미친 장단에 맞춰줄 것 같아?’
두말하지 않고 양손을 든 로페즈는 원숭이 가면을 쓴 상대를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그의 손이 올라가던 동시에, 성건우는 옆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탕탕탕!
성건우의 뒤로 계속 총알이 날아들었지만, 로페즈는 결국 그를 따라잡지는 못하고 한쪽 벽에 가로막힌 신세가 됐다.
이것은 함정이며, 경계 교파에는 그를 비롯한 외지 망명자들에게 맞설 생각이 없음을 알아챈 로페즈는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틈을 노려 돌아선 그는 즉각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가 다른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습격자들이 철수한 후 앙헤바스에게 설명을 할 작정이었다.
로페즈는 그전까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앙헤바스의 수하인 레드스톤 주민들에게서 믿음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습격자의 신분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을 것이었다.
‘빌어먹을 풍습 같으니!’
로페즈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건장한 몸을 한껏 숙인 채 엄폐물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 * *
로페즈가 막 출구에 이른 순간이었다. 갑자기 또 2층에서 누군가 그의 앞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역시 그 주인공은 털이 부숭부숭하고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이었다.
이에 로페즈가 권총 두 자루를 들려는데, 상대는 이미 허리를 돌리며 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의 다리에선 거의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퍽!
로페즈에게는 방아쇠를 당길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얼른 두 팔을 들어 날아드는 상대의 다리를 막아야만 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연합 202 두 자루는 상대의 발길질에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총의 주인 로페즈 또한 옆쪽으로 휘청거리며 몇 걸음을 밀려났다.
성건우는 조금 전 총격을 피한 뒤, 벽을 우회해 2층으로 올라가 잠복해 있다가 감지되는 상대의 의식에 근거해 때맞춰 로페즈를 막아선 것이었다.
이후로도 성건우는 멈추지 않았다. 로페즈의 앞으로 달려들어 훅,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고, 때로는 망치처럼, 채찍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로페즈도 끝내 지치고 말았다. 흔들리는 그의 시야는 의기양양한 원숭이 가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그때 그는 마침내 상대의 공격이 어느 정도 약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원숭이는 약간 한계에 부딪힌 듯 보였다.
여태 수세에 몰려 있던 로페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친 듯 주먹을 뻗자, 원숭이도 계속 뒤로 밀려났다. 로페즈의 기세는 더욱 매서워졌다.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역시 체력의 한계에 부딪히는 바람에 동작이 살짝 느릿해졌다.
‘이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로페즈는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뭔가 조짐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물러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도 조급했다.
로페즈가 막 뒤로 물러난 순간, 이미 그의 앞으로 달려든 성건우는 두 팔을 뻗어 상대의 관절을 움켜쥔 뒤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쿵!
로페즈는 그대로 바닥에 메다 꽂혔다. 눈앞에서 별이 빙빙 도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빠르게 그의 위로 올라탄 성건우는 이 얄가인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넌 또 졌어.”
성건우가 웃으며 선포했다.
다음 순간 귀 뒤쪽을 강하게 얻어맞은 로페즈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안타깝군.”
성건우의 한숨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로페즈는 완전히 기절했다.
* * *
단층 빌딩 밖, 돌격을 포기하고 곳곳으로 흩어지는 외지 망명자들을 보며 용여홍은 사신 바주카포를 쏘는 횟수를 차차 줄여갔다.
그러자 아직 남아있던 외지 망명자들 두세 명이 탄약이 바닥난 줄 알고 과감하게 엄폐물 뒤쪽에서 튀어나와 단층 빌딩으로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긴장하던 용여홍은 곧 피식 웃더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사신 바주카포를 내려놓고서 베르세르크 돌격소총으로 그쪽을 향해 난사했다.
다다다-
연발하는 총소리에 돌진하던 외지 망명자들은 마침내 현실을 깨달은 듯 그대로 돌아서 먼 곳으로 달아났다.
용여홍은 공격을 중단하는 대신 아무도 없는 구역을 향해 드문드문 방아쇠를 당겼다. 이따금 바주카포를 발사하기도 했다.
그 소리에 호숫가 주차장 안의 앙헤바스 수하들은 전투가 아직 진행 중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런 사실에 아무 의문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허리를 굽힌 채 단층 빌딩 측면 상록수 숲 뒤쪽에서 황토색 ATV 옆쪽으로 달려갔다. 남회색 옷차림을 하고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장목화였다.
깨진 유리창을 통해 유유히 차 문을 열고 올라탄 장목화는 기사가 남긴 열쇠로 시동까지 걸고선 소형 트럭 뒤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트럭 자체를 방어막으로 삼은 뒤 ATV에서 내린 그녀는 왼팔의 어마어마한 힘을 이용해, 무기가 가득 담긴 갈색 나무 상자들을 트럭에서 ATV로 옮기기 시작했다.
조수석에까지 상자 세 개를 쌓아 실으며 무기 대부분을 ATV로 옮기다보니, 이제 트럭에 남은 무기는 가치 없는 것들밖에 없었다.
곧이어 물건을 다 옮긴 장목화는 호숫가 주차장을 돌아보며 웃다가,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 황토색 ATV를 끌고 유유자적 전쟁터를 떠났다.
사실 트럭을 그대로 끌고 가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목화가 걱정한 것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자극을 받은 기사가 트럭을 가지고 그대로 도망쳐 버릴 가능성이었다. 백새벽에게 일단 트럭의 타이어를 터뜨리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야간 투시경을 통해 이 광경을 확인한 백새벽은 곧장 오렌지 소총을 거두었다. 뒤이어 무전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 그녀가 말했다.
“철수.”
곧 호숫가 주차장의 총성과 폭발음, 방송 소리는 모조리 잠잠해졌다.
앙헤바스와 그의 수하들은 그때까지도 경계 교파의 무장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비로소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