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안면 마비
문 뒤의 브랜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헬빅이 죽었다고? 유암자가 됐다는 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네. 안 그랬다면 퍼스트 시티의 좋은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축하했을 텐데,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 용여홍은 혀를 내둘렀다.
‘헬빅을 그렇게 싫어하나?’
금세 웃음을 거둔 브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에 들어온 이래, 난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이 점에 대해서는 송 경고자님이 증언해주실 수 있어.”
그러자 송하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암자가 되기로 맹세했다는 건, 속세에서 벗어나 어둠으로 귀의하겠다는 뜻입니다. 달지기 앞에서 한 약속이죠. 이를 어긴다는 건 신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 브랜드가 그러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제 방이 바로 이 앞에 있어요. 그러나 브랜드가 나가는 걸 발견했거나 본 적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용을 걸고 이 사실을 보증하고 있었다. 실제로 송하균은 이 레드스톤 마켓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질문은 없다.”
한명호도 이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도제훈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곧이어 문 뒤의 브랜드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헬빅을 증오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아. 그들 중 한 명이 우연히 각성자가 됐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또한 지하의 디마르코 역시 혐의가 있고. 이만 가봐. 더는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도제훈을 힐긋 보던 한명호는 그가 반대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홀로 돌아가자.”
송하균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브랜드가 고행 중인 방으로부터 멀어졌다.
장목화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암적색 나무 문을 바라보았다. 적막한 그곳에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
홀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버즈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사건이 브랜드가 저지른 짓이었을 줄이야. 각성자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헬빅의 심복이었던 만큼 그는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적잖이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심층적으로 파악한 건 처음이었다.
송하균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계속해서 비엘을 찾도록 해.”
눈치 빠른 버즈는 송하균이 자리를 좀 피해달라는 말을 에둘러 한다는 것을 알고, 성건우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비엘을 이기고 말겠어.”
말을 마치고, 그는 재빨리 얼굴에 철 가면을 썼다.
“화이팅!”
성건우는 그를 보며 힘차게 응원했다. 그는 몹시도 저 대결에 끼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곧 버즈가 홀을 떠나자, 송하균은 도제훈을 보며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언제든 찾아와 브랜드에게 복수해도 좋습니다. 그 전에 제게 알려주기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경고자님. 일단 돌아가 상의부터 해보겠습니다.”
도제훈이 냉정하게 답했다.
“언제 각성한 겁니까?”
송하균이 물었다.
“1년여 전에요.”
도제훈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때,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치른 대가가 감정인가요?”
역시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곧장 질책했다.
“말했지, 각성자에게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묻지 말라고! 아까 브랜드를 마주했을 때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잖아!”
‘팀장님, 누가 봐도 건우한테 장단을 맞춰주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틀자, 백새벽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잠시 조용히 고민하던 도제훈이 입을 열었다.
“내 대가는 누군가에게 노려질 약점이 아니라 마음대로 토론해도 돼. 내가 잃은 건 표정을 짓는 능력이야.”
“어쩐지⋯⋯.”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뒤이어 그는 열의 넘치는 모습으로 상대를 위해 제안했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 가면들을 가지고 다니다가 웃어야 할 때는 웃는 가면을, 울어야 할 때는 우는 가면을 쓰면 되겠네.”
레드스톤 마켓의 풍습에 기반해 고안한 방법이었다.
장목화는 순간 구세계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모티콘. 실제 정의와 성건우가 설명한 상황은 꽤 차이가 났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신적인 질병이 있는 건 아니거든.”
도제훈은 완곡하게 성건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역시 도발에 뛰어나!”
이내 그는 눈빛을 반짝이는 성건우를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냥 시선을 회피하며 더 이상 성건우와 말을 섞지 않았다.
장목화는 들은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주는, 상당히 우호적인 이 애쉬랜더에게 한마디 일러주었다.
“듣기로 각성자 능력이 강해질 때 치른 대가도 가중된다던데. 표정을 지을 수 없다는 거, 지금은 별 방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나중에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몰라.”
경고자 송하균도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교회당에 나와 주교의 설교를 들었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각성자에 관한 상식도 많이 알게 됐을 테고, 불필요한 위험을 피할 수도 있었겠죠. 혼자서만 독단적으로 모색하다간 문제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도제훈 역시 송하균의 친절함을 느낀 듯했다.
“전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레드리버인을 감싸주는 교회에 제 비밀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송하균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에게 두려움 방면의 능력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헬빅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왜죠?”
성건우의 호기심이 어린 표정은 원숭이 가면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송하균은 그를 힐긋 바라보더니 웃기만 할 뿐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장목화는 성건우를 질책하는 대신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경계 교파에서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지식인가 보네. 도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도의 두려움 능력을 갖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상응하는 대가를 근거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결과인 건가?’
송하균은 다시 도제훈을 돌아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각성자가 됐으니 교파의 성직자가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교의 설교를 듣고 관련된 지식을 파악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성건우는 곧 손을 번쩍 들었다가 조금 머뭇거리며 다시 내렸다.
그 사이 몇 초간 고민하던 도제훈이 답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도제훈의 일이 마무리되자, 송하균은 이번에 한명호를 바라보았다.
“어인과 산 요괴 쪽에 무슨 움직임이 있습니까?”
한명호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내 정찰해보니 둘이 연합하려는 기미가 보였습니다. 교회당에 오기 전 이미 마을 경비대에 두 번째 방어선까지 구축해뒀고요.”
송하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폐허 도시도 크고 개간을 기다리는 논밭도 많으니, 여러 아류인 집단을 수용한다 해도 마을 주민들의 생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겁니다. 둘 사이의 원한이 이미 응어리져 있는 데다가 그간 흘린 피로 인해 그 응어리가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그러다 송하균은 구조팀의 시선을 느끼고 자조하듯 웃었다.
“달지기 앞에서 모든 생명은 평등합니다. 에이돌른의 성직자로서 어인과 산 요괴 역시 제게는 교파가 품을만한 신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워낙 겁이 많은 탓에 저 혼자서는 아류인 거점에 들어가 전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군요.”
잠시 침묵하던 한명호가 말했다.
“경고자님이 레드스톤 마켓에 처음 오셨을 당시엔 매일 총격전이 몇 차례나 벌어질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던데요. 그런데 겁이 많으시다니, 믿기 어렵네요.”
송하균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는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또 막 에이돌른을 믿기 시작했을 때라 스스로의 신실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간에는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담이 쪼그라든다고요.”
아류인에 관한 대화는 이쯤에서 갈무리되었다. 한명호와 도제훈은 먼저 작별을 고한 뒤 교회당을 떠났다.
그러자 구조팀 역시 뒤따라 밖으로 이동하는데, 성건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 비엘은 왜 아직 교회당에 있는 겁니까?”
그는 그 숨바꼭질 챔피언에게 관심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송하균도 이들이 외부 유적 사냥꾼임을 알고 있어서인지, 이 질문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건 매번 미사 의식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입니다. 그들은 교회당 안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신의 은혜를 담뿍 받고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우아한 중 가면 속 장목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반면, 성건우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후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서 경계 교회당 밖으로 나갔다.
* * *
“우리는 애쉬랜더 쪽에 가볼 생각이야. 너희는?”
자신의 낡아빠진 SUV 앞에 서 있던 한명호가 구조팀에게 물었다. 그 옆에 선 도제훈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헬빅의 죽음을 조사하려고.”
장목화의 답변에, 한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해. 어인과 산 요괴는 언제든 마을을 기습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
장목화가 예의 있게 답했다.
한명호와 도제훈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구조팀도 지프에 올랐다.
* * *
다시 운전대는 백새벽이 잡고, 장목화는 조수석, 그리고 성건우와 용여홍은 뒷좌석에 탑승했다.
곧이어 장목화는 백새벽에게 차를 몰라고 지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앙헤바스가 헬빅을 죽었을 가능성도 크지 않은 것 같아.”
용여홍은 그 이유를 냅다 묻는 대신 그녀의 생각을 이해해보려 했다.
“앙헤바스가 버즈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아서요?”
장목화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약 정말 앙헤바스가 헬빅을 죽인 거라면, 그자는 버즈를 비롯한 이들을 반드시 죽여서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버즈를 데리고 교회당으로 가는 동안 예상했던 저격은 없었고, 로페즈 일당은 그 후에야 느릿느릿 나타났어.
이건 앙헤바스가 헬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불안해했다는 뜻이야. 그래서 수하들을 시켜 버즈를 포함한 헬빅의 심복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묻게 한 거지.”
운전 중인 백새벽이 전방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이제 보니 브랜드가 말한 것처럼 헬빅의 원수, 혹은 디마르코 쪽의 사람이 한 짓인 것 같아요.”
장목화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현재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이게 아니니까.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그 무기들을 어떻게 하느냐야. 만약 앙헤바스가 그것들을 마을 경비대에 기부한다면 우리의 임무도 완수된 거라 볼 수 있을까?”
용여홍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아닐 것 같은데요.”
“앙헤바스가 그 무기는 헬빅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한다면,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죠.”
백새벽도 단호하게 답을 했다. 앙헤바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일단 그 무기들부터 찾고 임무를 완수하는 걸 생각해봐야 하나?”
용여홍이 다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레드스톤 마켓 마을 경비대한텐 무기가 절실할 텐데요.”
곧이어 장목화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문제없어. 우리가 보수로 받을 무기 절반이랑 여태 모아둔 물자들을 마을 경비대에 기부하고, 초장에 어인과 산 요괴 문제를 해결한다면 군용 외골격 장치를 한 대 달라고 협상해볼 수도 있잖아.
아류인이 중상을 입고 물러나면 레드스톤 마켓도 한동안 외적을 걱정할 필요 없고. 연합 공업으로부터 새로운 군용 외골격 장치를 받을 시간도 충분히 생길 거야. 말하자면 이건 앙헤바스에게 속죄할 기회가 되는 거지.”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네요. 앙헤바스 역시 그 무기를 기부하려 할 테니까요. 마을 경비대에 기부하나, 우리에게 기부하나 별반 차이도 없죠.”
“게다가 앙헤바스는 마을 경비대에 기부하려 하지 않을지도 몰라. 다른 해결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자, 호숫가 별장으로 가자. 임무를 완수해야지!”
장목화도 두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답했다.
“가자! 가자!”
성건우는 상당히 흥분한 듯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