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부탁
화장실 근처에 이른 장목화가 성건우를 냅다 여자 화장실로 끌고 갔다.
“느꼈어?”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 송하균은 친구를 만드는 데 아주 능하던데요.”
성건우가 답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방금 내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봤는데, 처음엔 그자를 경계하다가 이후 너무 빠르게 친근감과 신뢰감을 느끼게 되었더라고. 내가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건, 송하균이 친근하고 믿음직스러운 친구로 느껴져서가 아니었어. 그냥 내 개인적인 일 처리 스타일이 그래. 개인적인 신조 때문에 한 약속인 셈이지.”
“당시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요.”
성건우가 덧붙였다.
장목화가 그를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저 사람은 각성자예요.”
성건우의 답에, 장목화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친근하게 느껴지게 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이게 하고, 남들이 그의 말을 듣고 싶게 만드는 게 능력 중 하나겠지. 그래, 그자는 우리에게 부탁할 때야 그 능력을 발휘했어.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언어를 통한 유도도 필요치 않은 것 같아. 정말로 전도에 알맞은 능력이네.”
그녀는 송하균이 자신에게 능력을 썼다는 사실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수십 정의 총으로 자신을 겨누며 설득하는 것에 비하면, 그런 정중한 부탁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심지어 일종의 보험 조치라고 수긍할 수도 있었다.
레나토의 일을 비밀에 부치고 싶어하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됐다. 원래 그러려던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전혀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대가는 뭐였을까요?”
성건우의 말을 듣고, 장목화는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주교가 되지 않으려는 것과 연관 있지 않을까?”
“전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모습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성건우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장목화는 살짝 핀잔을 주었다.
“그게 무슨 대가냐? 그런 대가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차라리 다른 능력들의 결과로 보는 게 더 알맞을 것 같아. 경계 교파에 숨은 인재들이 많나 봐. 레드스톤 마켓에만 해도 벌써 각성자가 두 명이나 있잖아. 다른 각성자가 또 있을지도 모르고.”
송하균의 말에 따르면, 주교 한 사람 밑에 경고자가 여럿 있는 듯했다.
“성찬이 없는 게 비용 절감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성건우도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곧 각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레나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장목화와 성건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하균이 제일 먼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버즈의 일은 이미 들었어요. 교회당 경비를 시켜 앙헤바스를 데려올 겁니다. 다들 얼굴을 마주하고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제일 좋으니까요. 두 분은 목격자로 상황을 지켜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버즈는 혹시 전하얀 팀에게 보호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곁에 남아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장목화의 대답이 훨씬 빨랐다.
장목화는 송하균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지켜봐야죠. 저희 임무와도 어느 정도 관련된 일이니까요.”
* * *
앙헤바스를 찾으러 갔던 교회당 경비는 송하균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다. 도중에 앙헤바스의 유능한 경호원 로페즈를 만난 덕분이었다. 아침에 버즈를 죽일 뻔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키가 거의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로페즈는 애쉬랜드 사람 대부분을 내려다봤다. 유전자 개량을 받은 성건우도 그보다는 키가 살짝 작았다.
로페즈는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덩치도 컸다. 그래서 그가 앞에 서기만 해도 상대는 묵직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로페즈는 경계 교파의 신도가 아니라 가면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살짝 헝클어진 엷은 금빛 머리칼도, 옅은 파란색 눈동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얼굴은 선이 굵고 단단해 조금 거친 느낌을 풍겼다. 거기에 카무플라주 패턴이 들어간 녹색 옷, 허리춤에 찬 연합 202 권총 두 자루, 끝에 쇠못이 박힌 가죽 부츠 역시 강한 인상을 자아내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레드리버인이라기 보다는 빙원인에 가까워 보이는데. 음, 어쩌면 얄가이 사람일 수도 있고.”
버즈의 옆에 선 장목화가 레드리버어로 중얼거렸다.
애쉬랜드 최북단에 자리한 빙원은 굉장히 넓은 지역인지라, 오늘날의 레드리버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빙원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구세계 한 자료에 따르면, 오래전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남하한 빙원인들은 레드리버 유역에 진입해 당시의 토호 부락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얄가이인은 세월이 흐르며 그 레드리버인에서 파생된 갈래였다.
애쉬랜드인 중에도 금발과 흰 피부, 큰 키를 가진 분파가 있었다. 다만 이들은 발전과 변화를 거치면서 천천히 사라져갔다.
장목화의 혼잣말을 듣고, 로페즈가 고개를 힐긋 돌렸다. 어쩐지 그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장목화의 말이 정확했다. 그는 정말로 얄가이인이었다.
구세계 파괴 이후 인종은 재난, 전쟁, 이주 등으로 새롭게 뒤섞였다. 거기에 각종 자료도 소실이 되어, 얄가이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그 인종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얄가이인은 그저 레드리버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빠르게 시선을 거둔 로페즈는 홀 깊은 곳에 자리한 거대한 상징을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는 에이돌른의 신도는 아니었지만, 경계 교회당에 들어온 만큼 감히 버릇없게 굴 수 없었다.
레드스톤 마켓의 주민 대부분은 신실한 신도였으며, 그를 따르고 있는 뒤쪽의 수하 몇몇도 그런 신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그가 달지기를 모독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 뒤쪽 수하들이 바로 총을 겨눌 테니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는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경계 교회당 내부는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신성함을 의미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안에 들어서니 로페즈도 절로 경계심을 드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내 송하균이 거대한 에이돌른의 상징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버즈를 찾으러 왔다고요?”
그는 레드리버어로 물었다.
로페즈는 그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나토 주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송하균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주교는 지금 다른 일로 바쁘십니다. 그래서 제가 주교의 전권을 대행 중입니다.”
로페즈도 거친 언사를 보이는 대신 우호적인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경고자, 버즈는 헬빅의 죽음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헬빅과 사업 파트너이자 좋은 친구셨던 제 보스 앙헤바스께선 어제부터 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거짓말!”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버즈가 언성을 높였다.
소리 내 웃던 로페즈는 가면을 쓴 수하들부터 돌아본 뒤 버즈에게 말했다.
“자신의 짓이라고 직접 인정하는 범인이 어디 있답니까.”
순간,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있어. 범인이라도 자랑을 위해, 혹은 또 다른 일을 숨기기 위해 범죄 사실을 인정하곤 하니까.”
이전에 본 신부가 바로 그 예였다.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던 로페즈는 헛소리하는 구경꾼은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한 듯 다시 송하균을 돌아보며 웃었다.
“경고자, 버즈가 범인이 아니라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몇 초간 침묵하던 송하균이 말했다.
“그럴 순 없겠죠. 철저한 조사 끝에 모든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어느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버즈도 앙헤바스 씨가 범인이라고 지목하더군요. 거기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유까지 댔습니다.
여러분은 무기 강도 사건을 조작했어요.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리고 무기들을 산에 보내기 위해서요. 동시에 애쉬랜더와 지하 방주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죠. 앙헤바스 씨에겐 그 무기를 모두 독점하려 했다는 살인 동기가 있는 겁니다.”
헬빅이든 앙헤바스든 대놓고 무기를 아류인에게 팔 엄두를 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은 레드스톤 마켓의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여태까지도 그들이 무기를 아류인에게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했다. 버즈 역시 헬빅의 심복이 아니었더라면 이 비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로페즈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제가 올해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웃긴 이야기군요!”
광활하고 고요한 교회당 안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송하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결국 참다못한 송하균이 경고했다.
“교회당 안에서는 목소리를 줄이세요.”
실제로 품은 마음이 어떻든, 감히 이곳에서 경솔하게 굴 수 없었던 로페즈는 순순히 웃음을 거두고 혀를 쯧쯧 찼다.
“경고자, 버즈에게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녀석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앙헤바스 씨를 모함한 거라고요.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앙헤바스 씨는 언제나 레드스톤 마켓이 아류인에 저항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심지어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군용 외골격 장치도 한 대 들여왔어요. 그런 분이 대체 왜 산 요괴에게 무기를 팔려 하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려거든 증거가 있어야죠!”
버즈가 곧장 대꾸했다.
“나 말고 마크와 카스티야도 알아! 다 증언해줄 수 있어!”
“너희들이 그 무기를 꿀꺽하려고 합심해서 헬빅을 죽이고, 그 죄를 앙헤바스 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고?”
로페즈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러자 송하균이 오른손을 들어 두 사람의 언쟁을 저지했다.
“지금으로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죠. 경고자인 전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일이 달지기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장목화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사이, 송하균의 말이 이어졌다.
“버즈를 심문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심문은 반드시 교회당 안에서, 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앙헤바스 역시 직접 교회당으로 와서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니, 돌아가서 앙헤바스에게 전하세요.”
일순 로페즈는 말문이 막혔다.
장목화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앙헤바스가 오면 능력을 써서 그가 우호적으로 굴 수 있게 한 다음, 솔직히 털어놓도록 만들려나? 그럼 우리 임무도 완수된 건가?’
이때 할 말을 잃은 로페즈는 장목화, 성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 무기 강도 사건을 맡은 그 외부 사냥꾼이지?”
그렇다고 답하자, 로페즈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
“심문만으로 일을 진전시키기는 어렵지. 제삼자인 너희가 최대한 빨리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 결과를 내길 바란다.”
그는 장목화와 성건우가 착용한 가면을 살펴보다가, 두 사람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교회당 문으로 향했다. 그의 수하들은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리고 한발 뒤로 물러나는 예를 갖추고서야 로페즈를 따라갔다.
떠나는 그들을 보던 송하균이 다시 버즈를 돌아보았다.
“진실은 거짓이 되지 못하고, 거짓은 진실이 되지 못해. 넌 당분간 교회당에 있어라. 마침 비엘도 이곳에 있으니 숨는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거다.”
“예, 경고자님.”
버즈는 교파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일단락된 것을 확인한 장목화는 버즈를 일단 한쪽으로 끌고 갔다.
이윽고 장목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앙헤바스가 그 무기들을 어디에 숨겼을 것 같아? 그것들만 찾아도 진상이 밝혀질 텐데.”
버즈가 괴롭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몰라. 당시 앙헤바스가 보낸 건 용병 수하들이었거든. 전부 외지 망명자인 그 사람들을 이끈 건 로페즈였고.”
장목화는 더 이상의 질문을 이어나가는 대신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다시 나가 돌아보면서 단서가 있는지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