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경고자
그때, 무심자가 갑자기 성건우를 위협하려는 듯 낮게 포효했다. 그러자 성건우도 함께 으르렁거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반응이었다.
무심자는 곧장 조용해졌다. 성건우의 반응을 보고 혼란에 빠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장목화는 입꼬리를 살짝 뒤틀며 문밖의 버즈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 누군지 알아?”
이미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그에게 더 확실한 답을 얻고 싶었다.
버즈도 이젠 두려움에서 겨우 벗어나, 방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살짝 쪼그린 상태로 무심자를 살피던 그가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즉각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주교님! 주교님이야!”
버즈가 겁에 잔뜩 질려 외쳤다.
“레나토 주교?”
장목화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각종 특징을 종합해 이 무심자가 레나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었지만, 버즈에게 확답을 듣는 순간 충격은 배가 됐다.
‘달지기의 비호를 받는 주교도 무심병에 걸릴 수 있다고?’
버즈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맞아! 저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저런 호박색 눈을 가진 사람은 마을을 통틀어 단 한 명밖에 없어! 주, 주교님이 무심병에 걸리다니⋯⋯.”
공황 상태에 빠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장목화는 그에게 조금 더 신중하게 물었다.
“레나토 주교의 얼굴을 본 적은 없어?”
“응, 내가 본 주교님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계셨어.”
버즈의 답에,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교회당 안의 다른 사람들 좀 찾아와줘. 모두한테 물어보게.”
넋이 나가 있던 버즈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이 분부를 따랐다.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간 그가 복도를 달리며 크게 외쳤다.
“누구 없어? 주교님이 무심병에 걸렸어! 주교님이 무심병에 걸렸다고!”
장목화는 멀어지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레나토 주교를 잡고 있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무심병에 걸려 있어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레나토 주교를 죽인 범인으로 몰릴 뻔했어.”
독살당한 것도, 어떤 병에 전염된 것도 아닌 무심병에 걸린 걸 남의 탓으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불길한 말을 하시네요.”
성건우가 곧장 대꾸했다.
이내 장목화는 좀 더 신중한 눈빛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버즈가 문을 열었을 때, 혹시 누군가가 아주 먼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네, 그랬어요.”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때 굉장히 무섭고, 소름 끼치긴 했지만 반항할 엄두는 안 났지? 꼭, 진짜 신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장목화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 느낌이었죠.”
성건우는 이번에도 솔직한 답을 내놨다.
장목화는 느릿하게 숨을 토해내며 이상하리만치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무심병에 걸린 주교가 에이돌른의 눈길을 끈 거 아닐까?”
그 말에 성건우가 고개를 홱 틀어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우린 조금 전에 달지기를 만난 건지도 몰라⋯⋯.”
달지기는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장목화의 말에 침묵하던 성건우가 몇 초 후, 불쑥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를 구원하지도 않네요.”
흠칫 놀라던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러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 네가 수시로 트는 그 노래처럼.”
장목화는 늪 1호 폐허 실험실의 괴물보다, 조금 전 마주했던 상황이 훨씬 더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한동안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여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을 더 신뢰했다. 세상 모든 일은 분석하고, 이해하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고, 파악하고,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소위 신령과 달지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설령 존재한다고 한들 그냥 무척 강대한 돌연변이 생물 정도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방금 있었던 일이 그녀의 세계관을 뒤엎고 말았다.
장목화는 성건우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기운을 차렸다.
‘정말 달지기가, 신이 있다 한들 그들이 인류를 구하려는 걸 본 적은 없어. 그런 존재들이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겠어? 게다가 달지기를 대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고, 파악하지 못할 것도 없지.’
장목화는 이런 생각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란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문밖에서 조금씩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버즈가 검은 가운을 걸친 남자와 함께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무기를 쥔 교회당 경비들도 복도에 흩어져 이곳을 봉쇄했다.
검은 가운을 걸친 중년 남자는 성건우에게 제압당한 레나토를 힐긋 쳐다보곤 먼저 자기소개부터 했다.
“전 경고자 송하균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애쉬랜드인이었다. 레드스톤 마켓에서는 가면을 쓰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그는 드물게도 위장 없이 다녔다.
조금 성긴 눈썹에 귀밑머리도 약간 희끗희끗했으나, 얼굴에 주름이라고는 없어서 구체적인 나이를 파악하기가 좀 어려웠다.
장목화는 그를 본 순간, 말끔히 면도한 각진 얼굴이 참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선 정의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경고자?”
장목화가 의혹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경계 교파 내부의 한 직급처럼 느껴지는 명칭이었다.
“주교 직속의 성직자죠. 일상적인 전도와 포교를 담당합니다.”
송하균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장목화도 더는 질문을 잇진 않았다.
“네, 이 사람이 레나토 주교가 맞는지 좀 확인해주세요.”
버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 대화는 레드리버어로 이루어졌다. 혹여나 애쉬랜드어로 말했다간 비밀 얘기를 한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송하균은 성건우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성건우에게 제압당한 무심자는 한창 고개를 들어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를 본 송하균의 표정이 점점ㅈ 무겁게 가라앉더니, 결국 그가 나직한 한숨으로 제 마음을 대신했다.
“주교가 맞습니다. 무심병에 걸렸네요.”
그는 곧장 문밖의 교회당 경비들에게 수갑과 올가미 등을 가져오라고 명한 다음, 사력을 다한 끝에 무심자 레나토를 단단히 속박했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돌아선 송하균이 성건우와 장목화를 향해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일단 주교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해야 해서요.”
“네.”
장목화가 답했다.
이윽고 송하균은 문 쪽으로 다가가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여기 남아있어. 누구도 자리를 이탈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교의 상태를 알리면 안 된다.”
“예, 경고자님.”
교회당의 경비들은 굉장히 공손하게 답했다.
떠나는 송하균을 바라보던 장목화가 버즈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송 경고자를 상당히 신뢰하나 봐?”
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드스톤 마켓에 맨 처음으로 포교한 경고자 중에 한 분이시거든.”
“몇 살이야?”
장목화는 순간적으로 한 가지 문제점을 파악했다. 겉보기에 송하균은 쉰 살도 채 넘지 않아 보였다.
‘그런 사람이 레드스톤 마켓에서 제일 처음으로 포교를 했다고? 신력 초기, 혹은 혼란의 시대 말엽에 말이야? 설마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때문에 고작 몇 살밖에 안 됐을 때부터 경고자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버즈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잘 몰라.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랑 거의 비슷할걸. 일흔은 안 됐어도 거의 그쯤 됐을 거야.”
“그렇다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던데.”
장목화는 아직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맞아. 저분은 늙지를 않아. 달지기의 은혜라고 하시던데.”
버즈가 동조했다.
이때 성건우가 매우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쩌면 몇 번째의 송하균일지도 모르지. 송하균이 늙기 시작하면, 새로운 송하균이 와서 그를 대체하는 거야.”
“⋯⋯.”
버즈는 평소 오락 프로그램을 듣거나 하지 않아서, 이 말을 좀체 이해할 순 없어도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다시 장목화가 나섰다.
“쟤 말은 듣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애야. 그럼 그 사람은 왜 주교가 되지는 않은 건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경고자로 살았다면 세운 공로가 없더라도 고생은 했을 터였다. 설마 경계 교파에는 달지기의 은혜를 받아 능력을 각성한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라도 한 걸까?
“경고자님 본인이 거절했어. 항상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받아 매우 만족한다고, 여기에서 주교까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일 뿐이라 이 이상 에이돌른의 보살핌을 받을 순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지.”
버즈는 송하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결박된 레나토가 다시 속박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입이 틀어막힌 터라 그 야수 같은 소리는 내지 못하고 몸부림만 거세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가운 차림의 경고자 송하균이 돌아왔다.
“공포 주교단에서는 곧 새로운 주교를 파견하고 레나토의 일을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레드스톤 마켓의 교회 일은 제가 맡을 겁니다.”
말을 마친 그가 양팔을 교차시켜 가슴팍을 막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경계는 신의 힌트.”
예를 갖춘 송하균은 장목화와 성건우를 향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겸손한 자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곧이어 장목화가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레나토 주교가 무심병에 걸렸다는 걸 함구해주세요.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 알아내기 전까진 이런 소문이 돌면 교회 명성에 해가 될 테니까요.”
송하균은 꽤 솔직하게 자신의 걱정을 밝혔다.
“이해합니다. 이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장목화도 그런 송하균에게서 상당한 친근감을 느꼈다.
신의 은혜를 받은 주교가 무심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달지기의 이미지와 교파의 위엄에 상당한 타격감을 줄 테고, 신도들도 달지기가 과연 자신을 비호 해줄지 의심할 것이었다.
‘조사의 끝에서 레나토는 신을 모독했다는 등의 죄명을 얻게 되겠지.’
장목화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경계 교파에 대해 악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 처리 방식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사이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봤다고 우정이래? 우정을 혼자서도 키울 수 있는 거냐?’
장목화는 속으로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송하균은 성건우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버즈에게도 같은 당부를 한 송하균은 교회당의 경비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의 모습에선 상당한 위엄과 신뢰감이 물씬 묻어났다.
일사불란하게 각종 일을 처리하는 송하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장목화는 낮은 소리로 감탄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이 레나토보다 더 주교 같은데. 그 자리에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하고.”
버즈도 동조했다.
“맞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시잖아. 저분이 주교였다면 레드스톤 마켓 내부도 지금처럼 결렬되지는 않았을걸?”
그때, 송하균이 버즈를 불러 몇 가지 일을 맡겼다. 장목화는 계속 방에 가만히 서서 복도에 있는 그들을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장목화의 미간이 구겨졌다.
“화장실에 좀 가고 싶은데요.”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송하균이 오른편을 가리키며 답했다.
“네, 저쪽 끝에 있습니다.”
그는 뭔 일이 일어날까 불안하지 않은 듯, 장목화를 저지하지 않고 보내줬다.
“저도 갈래요.”
성건우도 장목화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