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괴력
비쩍 마른 식물로 뒤덮인 데다 온전한 유리창도 몇 개 없는 이 고층 빌딩이 레드스톤 마켓 주민의 거주지일 리 없었다. 한 마디로 전기가 들어올 리 없으니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용여홍은 개인용 바주카포 사신과 그에 대응하는 탄약까지 가지고 가야 했다. 다행히 이 건물은 20층 높이로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곧이어 옥상에 도착한 용여홍은 숨이 좀 차고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을 뿐 그 외의 다른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이내 백새벽, 용여홍은 새똥이 널린 빌딩 옥상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오렌지 소총과 사신 바주카포를 난간에 걸쳐놓은 다음, 교회당 주위 구역이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오도록 조정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다. 백새벽은 무전기를 들었다.
“출발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대기 중인 장목화도 무전기를 거둬 넣은 뒤, 지프에서 내렸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유탄발사기와 돌격소총을 챙기진 않았다. 레나토를 만나러 가는 데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신 각자의 권총에 예비용 연합202 한 자루씩만 더 챙겼다. 덕분에 움직임은 더 민첩해졌다.
두 사람과 버즈는 함께 허리를 굽힌 채 이동했다. 그렇게 버려진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를 하나하나 지나치며, 경계 교회당 쪽으로 다가갔다.
부러진 시멘트 기둥, 구리 선이 없어진 전선의 피복, 흙바닥에 꽂힌 유리 파편, 한데 쌓인 콘크리트 블록……. 참 다양한 광경이 이들을 스쳐 갔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이동했을 무렵, 드디어 그 보루와도 같은 교회당에 도착한 세 사람은 즉각 2층 건물 뒤쪽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기습은 없었네⋯⋯.”
안정적인 자세로 착지한 장목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한동안 존재하지 않는 적과 싸운 듯한 느낌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버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앙헤바스가 벌써 포기한 건가? 주교의 진노가 두렵지도 않나?’
“우리가 잘 숨었다는 뜻이죠.”
역시 성건우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때, 장목화가 갑자기 앞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검은색 나무 문 하나를 열어젖혔다. 문 뒤쪽에는 짙은 색 가운을 걸친 경계 교파 경비 하나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역시 그도 돌격 소총을 쥐고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레나토 주교는?”
장목화가 레드리버어로 물었다.
경비는 문밖의 복도를 가리켰다.
“방에 계셔. 홀 쪽으로 나가서 달지기 성휘 뒤쪽 방으로 가면 돼.”
“그래?”
장목화가 버즈를 돌아보며 답을 구했다.
“맞아.”
버즈의 확인까지 끝나자, 세 사람은 곧장 레나토 주교의 침실로 향했다.
* * *
복도를 지나 교회당 홀로 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홀 옆쪽 구역에 달지기 성휘가 그려진 벽이 보였다.
장목화도 경비의 설명을 따라 어렵지 않게 레나토의 방을 알아보았다.
성휘의 요소에 대응하듯 희게 칠해진 문손잡이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동시에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똑똑똑-
버즈가 먼저 문을 두드린 뒤 큰 소리로 말했다.
“주교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방 안에선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버즈는 두 번 더 말을 반복하다가 의아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나?”
동시에 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려 방문을 열었다. 다른 곳이라면 상당히 예의 없는 행동일 수 있겠지만, 알아서 사람을 찾아야 하는 레드스톤 마켓에서 이 같은 상황은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흰 나무 문이 활짝 입을 벌린 순간, 장목화는 돌연 눈앞이 아득해졌다. 방 안을 잠식한 캄캄한 어둠이 복도에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끝없는 어둠 속, 문 뒤에 자리한 여자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장목화는 그 사람이 매우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멀리 있다고 느껴졌다. 가깝게 느껴질 때는 지척에 있는 것 같았고, 멀게 느껴질 때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상대의 시선에, 장목화는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싸늘해졌다. 밀려드는 한기에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늪 1호 폐허를, 신비로운 실험실 안의 그 괴물을 떠올렸다. 괴물의 비명은 멀리 있는 사람까지 전전긍긍하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 괴물과는 달랐다. 여자의 시선은 괴물의 비명과 달리 공허하고, 막연하고, 위엄이 있었다. 그 앞에서 반항할 엄두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모든 느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곧 아득한 어둠도 햇빛에 다 녹아버렸다.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장목화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이마가 보였다.
버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떨고만 있었다.
장목화는 성건우와 무슨 얘기를 나눌 새도 없이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꽤 널찍한 방 안에는 큰 침대와 옷장, 책상, 소파 등이 놓여 있었다. 짙은 갈색의 두꺼운 카펫도 깔려 있어, 척 보기만 해도 방 주인이 상당히 지체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이 방의 뒤쪽에 에이돌른의 성휘가 걸린 그 벽이 자리한 탓에 창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복도 쪽의 창문 역시 상당히 묵직한 옅은 색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장목화는 문으로 흘러드는 야트막한 빛에 기대 어렴풋하게나마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치로 보나, 가구의 형태로 보나 레드리버 구역다운 느낌이 짙게 풍겼다.
그러다 순간, 뭔가를 느낀 그녀가 오른팔을 들어 방어에 나섰다.
거의 동시에 방 안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170센티미터 정도에 검은 가운을 걸친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와 주먹을 매섭게 휘둘렀다.
이때, 성건우가 장목화보다 먼저 앞으로 나서 두 팔을 들었다.
쾅!
두 사람의 주먹이 충돌하자,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난 성건우는 하마터면 장목화와 부딪힐 뻔했다. 그는 든든한 하반신과 일반인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지만, 결국 상대의 주먹을 막아내지 못했다.
장목화는 그 점에 의문을 느꼈다. 일상 훈련에서 자신이 왼팔을 쓸 때도 성건우가 이렇게까지 밀린 적은 없었다. 성건우는 유전자 강화가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데다 평소에도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장목화는 비로소 습격자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나이는 30대 정도,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살짝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과 호박색 눈동자, 거기에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피부색은 매우 창백했다.
복도로 스며든 햇빛 아래, 호박색 눈동자가 진정으로 그 아성을 자랑했다. 붉게 충혈되고 매우 탁해진 눈빛과 야수처럼 험악해진 인상에선 더 이상 인간다운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무심병……!’
상대는 바로 무심자였다.
뒤로 밀려나던 성건우를 살짝 피한 뒤,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서며 왼팔을 휘둘러 주먹을 뻗었다. 그녀의 주먹은 소형 포탄처럼 공기를 가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본능만 남은 무심자는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 양팔을 교차시켜 앞쪽으로 쳐들었다.
쾅!
그는 결국 장목화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몸이 살짝 흔들리기만 했을 뿐 뒤로 밀려나지는 않았다. 무려 생체 공학 의수의 괴력을 실은 장목화의 주먹을 그대로 막아낸 것이었다.
이제 전투에 돌입한 장목화에게 놀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오른 주먹은 주로 박자를 조정했다. 어퍼컷, 훅, 후리기, 스트레이트 등의 공격으로 무심자를 더 자신 있는 왼쪽으로 모는 역할을 했다.
실제 공격은 모두 왼 주먹이 해결했다. 포탄 혹은 망치처럼 묵직하게 휘둘러지는 왼 주먹은 매섭고도 요란한 소리를 냈고, 그녀의 공격에 따라 무심자는 방 안쪽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주먹과 공기가 끊임없이 마찰하는 동안, 두 사람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소파가 엎어지고 의자가 부서지며 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자를 구석에 몰아넣은 장목화가 재차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왼 주먹을 포탄처럼 날렸다.
쾅!
무심자는 그 주먹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결국 뒤로 붕 떠올랐다가 벽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음?’
장목화는 조금 전에 비해 상당히 약해진 상대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지금의 상대는 심지어 용여홍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 무심자가 방금 선보인 괴력이 어떤 능력 때문에 발휘할 수 있었던 거라고 추정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도 지금 그런 걸 분석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격투 기술을 바꾸며 동시에 고압 전류를 흘려 무심자를 제압하고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돌연, 무심자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기 시작했다. 야수의 것 같은 호박색 눈동자 속에선 수많은 실핏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장목화도 어느새 상대를 따라 웃고 있었다. 마음속의 적의도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져버린 듯했다. 그녀는 심지어 저항도 다 포기하고 투항하려는 상대에게 더는 경계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퍽!
그 틈을 노린 무심자가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장목화의 귀 아래쪽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의 육신도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며 한 바퀴 구른 그녀는 무사히 무심자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이때, 문 앞을 막고 있던 성건우도 이 광경을 발견하고 두 걸음 앞으로 나가 적을 가로막았다. 무심자는 그를 향해서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흡사 식인 맹수 같은 웃음이었다.
성건우는 그 웃음에 흠칫 놀란 듯하면서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고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무심자는 그의 반응에 놀랐는지,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습 공격을 준비하고 있어선지 바로 몸을 웅크려 주먹을 피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오른 다리를 아래에서 위로 차올렸다.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그의 다리는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무심자는 이를 피하려 오른쪽 다리로 지면을 박찬 다음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바닥을 굴렀다. 성건우는 곧장 그와 뒤엉킨 채 바닥에서 난투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격투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성건우가 오직 본능에만 의지하고 있는 무심자보다 훨씬 유리했다.
결국 두세 차례 움직임 만에 상대의 관절을 움켜쥔 성건우가 몸으로 적을 단단히 옭아맸다. 거기서 한 번 더 몸을 굴려, 그는 무심자를 뒷짐 지워 엎어둔 채 무릎으로 등을 짓눌렀다. 끝내 무심자는 바닥에 얼굴까지 짓눌렸다.
“내가 이겼다!”
성건우가 기쁜 목소리로 선포하듯 외쳤다.
‘저 녀석, 처음부터 이 상황을 게임으로 여겼기 때문에 무심자의 웃는 얼굴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건가? 아냐, 웃는 얼굴을 목격하고 적의가 없어진 뒤에야 이 상황을 게임으로 여긴 거겠지. 승부욕이 경계심을 대체한 거야. 정신질환도 유용할 때가 있네.’
장목화는 이자가 고등 무심자란 걸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각성자인 상태에서 무심병을 앓게 된 건지, 아니면 무심자가 된 후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