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91화 (191/649)

191화. 태업 (2)

품이 넉넉한 솜옷을 입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남자의 얼굴엔 구세계의 어느 극에서나 썼을 법한, 흰색 바탕에 눈썹이 굵은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씻고 난 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잠든 듯,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삐죽삐죽 뻗쳐 있었다.

찬장에서 나온 남자가 애쉬랜드어로 중얼거렸다.

“음식은 냉동고에 있으니 직접 해도 되고, 나한테 해달라고 해도 돼요.”

장목화는 성건우가 기발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먼저 나섰다.

“뭐로 교환하면 되죠?”

그녀도 이번엔 애쉬랜드어를 썼다.

주방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식량은 차고 넘쳐요. 퍼스트 시티 금화나 은화, 아니면 무기도 괜찮아요.”

“무기로 할게요.”

방탄 SUV와 교환하고 받은 물자 중에는 휴대하기 편한 총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어떤 음식을 먹을지부터 골라요.”

주방장은 냉동고 앞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냉동고에 든 식자재의 양은 상당했지만,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육류는 돼지, 소, 양, 닭, 오리, 생선 정도, 채소는 배추, 당근 정도가 전부였다.

“진짜 많은데?”

하지만 장목화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애쉬랜드에서는 이만해도 충분한 편이었다. 물론 식당엔 당연히 모든 식자재가 갖춰져 있어야 하지만, 이만한 재고를 보유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주방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가게 주업이 식자재 판매거든요. 식당은 겸사겸사 연 거고.”

‘대단해, 식량이랑 육류 밀수업자였네? 과연 레드스톤 마켓다워.’

장목화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돼지갈비 1인분, 양념으로. 닭 한 마리, 감자랑 같이 구워주세요. 소스는 알아서 해주시고요.”

하나하나 재료를 고르던 장목화는 배를 문지르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음식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

주문을 다 마치고, 장목화가 주방장에게 물었다.

“여기 레드스톤 마켓엔 어떤 음식이 유명하죠? 아, 참. 성함이?”

주방장이 답했다.

“그냥 진 씨라고 불러요. 여기서 유명한 음식이라면 대개 레드리버 요리를 융합한 거죠. 예를 들면 스테이크? 삶거나 끓이는 음식은 만드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요. 그리고 개량된 완두콩이 들어간 양고기 스튜는 국물이 더 많아서 밥이랑 같이 먹기 참 좋죠.”

“그것도 1인분 주세요. 음식값으로 뭘 원하시나요?”

장목화가 호기롭게 말했다.

잠시 또 진 씨의 고민이 이어졌다.

“연합202 한 자루, 다른 권총도 괜찮아요. 총알도 한 서른 발 줬으면 하네요.”

“좋아요.”

장목화는 곧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지프에서 해당 무기와 총알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 씨는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장목화는 매우 여유롭게 운을 뗐다.

“헬빅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잠시 움찔하던 진 씨가 답했다.

“들었죠! 하, 악행을 많이 저지르면 결국엔 화를 당하게 된다니까?”

‘많은 악행을 저지르면 결국엔 화를 당하게 된다고?’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못된 일을 많이 저지른 모양이네요?”

진 씨가 고개 숙인 채 재료를 손질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무기 사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는 장목화가 주방 문 앞에 서서 요리 중인 자신을 지켜봐도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경계심을 유지하고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 것, 경계 교파의 교리에 매우 잘 부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내 배로 들어갈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행여 주방장이 장난칠 틈도 주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한담을 나누는 와중 진 씨는 요리를 하나씩 뚝딱 만들어냈다. 그런 뒤, 구조팀이 모두 보는 가운데 음식 전부를 한 젓가락씩 집어 먹었다.

“이래야 손님들도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겠어요?”

“예.”

성건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는 이미 곁에다 플라스틱병 여러 개를 꺼내두고 있었다. 바이오 클렌징 캡슐, 중화제 등 전부 구급상자에 들어 있던 약들이었다.

원숭이 가면을 쓴 손님의 당당한 태도에 진 씨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성건우는 다행히 금세 알아서 화제를 바꿨다.

“그건 위에 좋지 않아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진 씨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자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며 친절하게 그 뜻을 풀이해줬다.

“손님이 올 때마다 한 젓가락씩 맛보면 배가 어설프게 불러서 정작 끼니 챙기는 걸 놓치잖아요. 그런 습관이 위에 별로 좋지 않다는 뜻이에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뚱뚱해진 것 같아요?”

진 씨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본래 이 애쉬랜드에서 뚱뚱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구조팀은 이번 식사에 상당히 만족했다. 진씨의 솜씨는 평범했고 향신료를 남발하기까지 하는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통조림,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로 연명해온 그들로선 어느 정도 수준만 되면 뭐든 호화롭게 느껴졌다.

“이 완두콩 양고기 스튜, 훌륭하네요. 애쉬랜드 음식과 레드리버 음식의 특징을 모두 겸비했어요. 밥이랑 곁들여 먹기에도 딱이고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장목화가 웃으며 칭찬했다.

“우리 집만의 비밀 레시피로 만들어서 그래요.”

진 씨가 뿌듯하다는 듯 대꾸했다.

맛을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국물도 넉넉하게, 또 적당히 걸쭉하게 만드는 건 그가 천천히 연구해낸 덕에 얻어낸 레시피였다.

* * *

무독 식당을 나온 구조팀은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치안소로 향했다. 한명호도 이미 애쉬랜더들이 숨어있는 구역에서 돌아와 있었다.

가장 안쪽 책상 앞, 등불 아래 서류를 뒤적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용여홍은 만약 가로세로로 난 저 깊은 흉터와 멋대로 난 눈썹만 아니었다면 그에게서 반고 바이오 내 부모님의 상관 같은 분위기가 풍겼을 거라 생각했다.

“안녕.”

장목화가 먼저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한명호도 고개를 들고 일행을 힐끗 바라보았다.

“앉아.”

성건우는 조금도 사양치 않고 곧장 다른 곳에서 의자 몇 개를 가져왔다. 본래 한명호의 책상 앞에는 의자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한명호가 장목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오늘 오전에 조사한 상황에 대해 알고 싶은 거지?”

이는 가면을 쓰기 전, 한명호를 만났을 때 구조팀이 이미 장목화가 팀의 수장임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명호는 성건우의 지위가 좀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가 보인 모습 때문에 다른 생각은 금세 불식되었다.

“맞아,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이내 한명호는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 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본적으론 아무 수확도 없었어. 인정하는 사람도 없었고, 단서도 없었거든. 내가 애쉬랜더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쫓겨났을지도 몰라.”

그가 레드스톤 마켓 내부의 갈등을 은근히 드러냈다.

“넌 졌어.”

갑자기 불쑥 끼어든 성건우를 보고, 한명호가 미간을 팩 구겼다.

“뭐?”

성건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스스로 애쉬랜더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진 거야. 우리 모두 다 같은 사람이야.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한명호는 장목화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아주 가볍게 이 화제를 건너뛰어 버렸다.

“자료를 좀 봐도 될까?”

순간 한명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떤 자료?”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과거 몇 년 동안 발생했던, 쇼크로 인한 사망 사건과 관련한 자료.”

각성자가 있는지, 혹은 사람을 쇼크사 당하게 할 수 있는 범인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한명호는 가면을 쓴 네 사람을 하나하나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똑똑해. 그래서 좀 이해가 안 돼. 똑똑한 너희들이 왜 도둑맞은 무기 회수 임무를 맡은 거지? 설마 그 안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아니면, 본인들의 실력을 그렇게나 자신하고 있어서?”

‘그쪽도 꽤 똑똑하네.’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지 않겠어?”

장목화가 영리하게 답했다.

이 틈을 타 성건우도 합세했다.

“빌런이 이깟 위험을 두려워할 리 없잖아?”

‘이 자식,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이 팀이 도둑맞은 무기 회수 임무를 맡은 건 다 정신이 희한해서 그런 건가? 그래, 어디서 미칠수록 똑똑해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네.’

한명호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맞은편 네 사람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가 험악한 남자 가면을 쓴 백새벽을 보며 이야기했다.

“이상한 점은 너희 팀 중 중급 사냥꾼이 너 한 명뿐이라는 거야.”

“우리가 얘를 납치했어.”

백새벽은 성건우의 이런 농담이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성격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용여홍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친구를 비웃었다.

“조금 더 합리적인 이야기를 대지 그래?”

짝짝짝!

성건우는 자신에게 협조해준 용여홍을 칭찬하듯 손뼉을 쳤다.

용여홍이 흠칫 놀라자, 성건우가 씩 웃으며 입을 뗐다.

“우정과 믿음으로 납치했지.”

“풉⋯⋯!”

결국 장목화는 웃음이 터졌고, 백새벽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명호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어지는 이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앞에 쌓인 문서들을 가리켰다.

“이게 바로 너희들이 원하는 자료야. 지난 2년간 치안소에 그런 사건이 접수된 적이 없어. 누가 쇼크로 인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고. 하지만 1년 더 전으로 돌아가 본다면⋯⋯. 무려 4건이나 돼.”

한명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가면?”

장목화가 묻자, 한명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년 전까지 치안소는 엉망으로 관리되고 있었어. 기록조차 없는 사건이 한둘이 아니고, 수많은 자료가 유실됐지.”

그 말에 장목화는 일순 뭔가를 깨달았다.

“아, 넌 3년 전에 초빙되었다고 했지?”

한명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근데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3년 전에도 그런 사건이 분명 있기는 했대. 구체적으로 몇 건인지는 불확실한데, 레드스톤 마켓을 공격했던 이들 중에 비슷한 이유로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장목화는 고개를 돌려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질문 있어?”

성건우가 행여 허튼소리를 할까 봐, 백새벽이 바로 나섰다.

“2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 네 개가 헬빅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한명호가 들고 있던 자료를 건넸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이 이거야. 이 4건 다 공통점이 있어. 사망자는 모두 애쉬랜더고, 레드리버인을 대상으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든가, 특정 사업을 점거해 레드리버인을 압박했었대. 헬빅 사건과 공통점은 없고.”

장목화는 자료를 받아들고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보헌, 사망 당시 27세. 애쉬랜더 급진주의자. 일찍이 몇 차례 충돌에서 레드리버인 세 명을 사냥함. 그후 오랫동안 숨어지내던 지하실 안에서 사망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에야 아내 양현지가 발견. 쇼크사. 조사 상황은⋯⋯.

뒤쪽에 주석이 많이 달렸네? 너 아직 이 사건들을 조사하고 있는 거야?”

자료를 읽던 장목화가 잠시 고개를 들고 한명호를 바라보았다.

한명호는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범인을 잡는 건 레드스톤 마켓의 치안관인 내가 할 일이야. 어떤 배경이 있든, 어떤 능력이 있든, 이 일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든 그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 2년이 넘도록 난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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