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위협
장목화는 뒤쪽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옅은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스톤 마켓은 디마르코 가문이 외부와 물자를 거래하면서 형성된 시장 마을이잖아. 구성원은 사방팔방에서 온 사람들로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풍속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양해. 그러니 작은 집단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당시 무역의 근원은 하나뿐이어서 이런 소규모 집단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어. 서로 간의 경쟁이 심해지다 보면 결국은 내가 남을 몰래 죽이게 되고, 남이 나를 몰래 죽이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지.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런 경향은 서서히 위드 시티 같은 형태로 변형되기 마련이야. 하지만 그 타이밍에 경계 교파가 이곳에 도착한 거야. 개인 간의 신뢰가 극도로 희박한 이곳만큼 그들의 교리가 잘 어울리는 곳도 없었겠지.
경계 교파의 교리를 따르면 생존율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갖고 있던 불신이 합리화되고, 신성화되고, 유화돼. 이에 따라 레드스톤 마켓도 차차 안정을 찾아간 거야.”
그때, 백새벽이 한 가지 사실을 짚었다.
“가우디는 혼혈이었어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단이 아무리 서로 적대시해도, 그 사이엔 애정과 중도파가 생길 수밖에 없어. 가우디는 레드스톤 마켓 내 제3의 단체, 융합파의 대표인 거야.”
대화를 나누며 구조팀은 다시 차에 올랐다.
이후, 그들은 레드스톤 마켓을 떠나 여관 구역으로 돌아갔다.
* * *
127호는 반대편 끝, 구세계 공원 내의 호수 근처에 자리해 있었다.
굉장히 튼실한 체격의 두 남자가 간이 건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서 완전무장을 한 그들은 말수도 적고, 웃음기도 없었다.
이 두 사람 모두 레드리버인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제일 먼저 다가가 최대한 상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유적 사냥꾼이야. 무기 강도 사건 때문에 리만을 조사하러 왔다.”
그가 나선 건 상대를 친구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장목화는 127호 근처에 자리한 간이 건물 여러 채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리만의 수하들이 상당히 많네.’
이윽고 한 경호원이 문을 두드리더니 127호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 보고를 끝낸 경호원이 다시 나와 성건우에게 다가왔다.
“리만 씨가 전하신 말이다. 첫째, 당시 우리는 이미 떠난 상태라 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둘째, 지금 너희들이 넷뿐이라면 빨리 이 사건에서 손 떼고, 보다 안전한 임무를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리만의 경고에 성건우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분노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한 얼굴로 제안을 했다.
“너희들도 가담한다면 네 명 이상인데.”
동시에 성건우는 매우 의욕적으로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친구로 삼을지 결정해달라는 뜻이었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곧이어 구조팀은 리만과 수하들이 묵는 지역을 벗어나 다음 목적지로 향할 준비를 했다. 폐허 도시 중, 호수에 붙은 단층 빌딩 구역이었다.
그곳은 헬빅의 심복 중 하나인 버즈가 사는 곳이었다. 그는 무기 강도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겪은 사람이기도 했다.
* * *
여관 구역을 떠나기 전,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성건우 때문에 구조팀은 다시 한번 05, 06호에 들렀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장목화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엔 애쉬랜드 문자로 짤막한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너희들 일에나 신경 써!」
“틀린 글자는 없네요.”
성건우는 약간 놀란 얼굴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반 지성교 교도인 건 아니니까.”
다시 종이를 건네받은 장목화는 겨울 햇빛 아래 종이를 몇 번 더 비춰보았다.
마침 백새벽과 용여홍도 개인 용무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장목화는 두 사람에게도 종이를 건네며 빙그레 웃음을 그렸다.
“어때?”
팀장의 지시에 따라, 용여홍이 하나씩 분석을 시작했다.
“헬빅의 사인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막는 걸까요, 아니면 빼앗긴 무기를 되찾지 못하도록 막는 걸까요?
만약 후자라면 강도들은 레드스톤 마켓 내부인일 가능성이 커요. 아니면 일찍이 다른 곳으로 떠버린 후 한두 사람만 상인인 척 보내도 됐을 테니까요. 그럼 굳이 우리를 위협할 필요도 없잖아요.
전자라면 너무 빨리 경고한 게 아닐까요? 우린 아직 아무 단서도 못 찾았는데. 차라리 우리보단 치안소에 있는 한명호를 위협하는 게 나았을 텐데요.”
짝! 짝! 짝!
화장실에서 나온 성건우가 열정적으로 손뼉을 치며 용여홍을 칭찬했다.
그 박수 소리를 듣자 용여홍은 참 기쁘기도 하고 몹시 어색하기도 했다.
“훌륭해, 이제야 드디어 문제를 분석할 줄 알게 됐네.”
장목화도 웃으며 그를 칭찬한 뒤,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너는?”
백새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 세수를 하고 와서 아직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너무 일러요. 아직 이럴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
백새벽이 보기에 아직 자신들은 누군가로부터 경고를 받을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에 장목화가 웃었다.
“그렇지. 우린 겨우 넷뿐이야. 그중 중급 사냥꾼은 하나뿐인 데다 아직 유용한 단서는 찾지도 못했어. 근데 왜 굳이 이렇게 급하게 우리한테 협박장을 보낸 걸까? 방금 그 무기상 리만도 그랬잖아. 이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된다면 얼른 이 임무를 그만두고 다른 임무를 알아보라고.”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알겠다!”
“뭘?”
장목화는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우리 위장을 간파하고, 우리가 최후 빌런 반고 바이오에서 보낸 ‘세계 구원팀’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 실력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대놓고 맞서지는 못하고 이런 경고장만 날린 거죠.”
언제나처럼 진지한 대답에, 장목화는 긴 한숨과 함께 경어로 대꾸했다.
“예, 저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냥꾼 길드의 각 지점이 정기적으로 데이터를 교환한다 해도, 위드 시티에서 있었던 일이 이곳까지 전달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야. 게다가 위드 시티 내 성건우 형제회도 아직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잖아? 외부인들은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유전자 개조인 장목화는 05호, 06호 주위 구역에 도청 장치 같은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서슴없이 꺼냈다.
“최후 빌런과 세계 구원팀은 잘 어울리질 않는데⋯⋯.”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이내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투덜거렸다.
“정말, 너 때문에 하려던 말 다 까먹었잖아. 그래,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날린 경고는 사실 일종의 보호야.”
“보호라고요?”
용여홍의 물음에, 장목화가 웃으며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그들은 우릴 굉장히 약한 존재로 본 거야. 우리가 이 사건의 회오리에 휘말린다면 그 결과를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미리 이런 경고를 날린 거야. 우리를 문제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서.
음, 이것 말고 두 가지 가능성이 더 있어. 하나는 갈등이 이미 어느 정도 심화했을 가능성. 이런 상황에서 외부 세력이 가담하면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니까.
그러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하지만 테레사의 반응과 선택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이런 경고장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음해하려 할 가능성이야. 이게 사실이면 우리가 위협당했다고 외부에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누군가가 와서 조사하려 할 거야. 단서가 알아서 우리를 찾아온다는 거지.”
용여홍은 팀장의 깔끔한 설명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휴, 나는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키가 175센티미터밖에 안 되고, 생각하는 수준도 팀장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져. 아, 팀장은 유전자 개조까지 받았지. 애초부터 비교가 안 되는 거야⋯⋯.’
속으로 한참 감탄하던 용여홍은 다시 소리 내 직접 물었다.
“만약 첫 번째 가능성이라면 왜 우리를 보호하려 하는 거죠?”
그러자 성건우가 장목화보다 앞서 진지하게 답했다.
“왜냐면 난 키가 185센티미터인데다 잘생기기까지⋯⋯.”
“그만! 레드스톤 마켓에 막 진입한 터라 위장하지 않고 있었을 때 우리가 애쉬랜드인 아니, 애쉬랜더란 사실을 이미 알아차린 건지도 모르지.”
장목화가 성건우의 말을 억지로 끊고서 웃으며 설명했다.
이후 용여홍은 놀란 눈으로 들고 있던 경고장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적힌 것은 오직 애쉬랜드 문자뿐이었다. 레드리버 문자는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 * *
레드스톤 마켓이 자리한 폐허 도시의 단층 빌딩 구역은 정원과 담장이 딸린 3, 4층 건물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곳은 구세계 파괴 이전만 해도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모두에게서 잊힌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드스톤 마켓 전역을 통틀더라도 지하 방주 안의 디마르코나 그의 가문에 남은 기록만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구조팀은 테레사의 설명대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벼락을 적어도 두 번은 맞은 오래된 나무를 찾았다. 그 오래된 나무 뒤쪽으로 주변 건물들처럼 정원과 담장이 딸린 3, 4층짜리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장목화는 차에서 내려 그 건물 대문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거의 1분쯤 지났을까, 오래된 나무의 이미 죽어버린 듯한 가지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굴 찾아왔지?
장목화와 성건우는 그 전에 이미 눈빛 교환을 마친 상태였다.
운전석에서 오래된 나무를 정면으로 마주한 백새벽이 그 말에 대답했다.
“무기 강도 사건을 조사하러 온 유적 사냥꾼이다. 테레사 부인이 이곳으로 가보라고 하던데.”
잠시 침묵 끝에, 남자가 대꾸했다.
- 잠깐만 기다려.
2~3분 더 기다리는 와중, 장목화와 성건우는 정원과 담이 딸린 다른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때, 건물 담장의 나무판 하나가 위로 쑥 올라가면서 큰 구멍을 드러냈다. 구멍 뒤쪽으로 나타난 것은 화단이 아닌 깊은 통로였다.
다음 순간, 그 구멍 안에서 한 남자가 기어 나왔다. 린넨색 머리는 빗질한 지 한참 된 듯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엔 금속광택이 나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구멍에서 기어 나와 똑바로 선 남자는 그제야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를 발견했다.
성건우는 냅다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철 가면을 쓴 남자가 화들짝 놀라 옆쪽으로 저만치 물러났다.
“멈춰, 멈춰! 거리 두기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고!”
성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가면, 방탄이야?”
“아니.”
철 가면 남자가 멍하니 답했다.
“그렇군.”
성건우는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때, 이미 근처로 다가온 장목화가 말했다.
“당신이 버즈야?”
“그래.”
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우리랑 대화한 사람도 당신이고?”
계속 캐묻는 장목화를 보고, 버즈는 상대의 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며 답했다.
“맞아.”
그의 답에 장목화는 약간 흥분한 듯 질문을 이어갔다.
“땅굴 여러 개를 파서 이 부근에 있는 건물들을 하나로 연결한 거야?”
“응. 애쉬랜더에게 배운 기술이지. 곳곳에 땅굴과 출구가 있어.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심지어 난 적들의 등 뒤로 돌아가, 적들이 상상도 못 한 곳에서 총을 쏠 수도 있어.”
버즈는 상당히 뿌듯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