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풍속
테레사 부인은 숨지 않고 있었다. 두꺼운 검은색 옷을 입은 그녀는 거기에 검은색 긴 베일까지 달린 모자를 쓰고서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장목화는 베일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로 보아 상대가 레드리버인임을 알아챘다. 녹색 눈과 상당히 높은 콧대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장목화는 유창한 레드리버어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테레사 부인.”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테레사는 약간 거친 목소리로 호응하며 옆에 있는 의자들을 가리켰다. 그녀가 쓰는 언어는 예상했던 것처럼 레드리버어였다.
구조팀 네 사람이 앉자, 그녀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임무 하나를 더 부탁드리려고요. 남편의 진정한 사인을 밝혀주세요.”
“그건 치안관의 몫 아닌가요?”
장목화의 질문에, 테레사가 한층 커진 목소리로 답했다.
“한명호는 애쉬랜더라 분명 그쪽에 치우쳐져 있을 거예요!”
테레사는 한명호란 이름을 그저 흉내만 내는 수준으로 발음했다.
“애쉬랜더?”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마을 안에서 애쉬랜드어를 쓰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무기 거래를 독점한 우리 레드리버인을 질투해서 늘 우리를 적대시했어요. 한명호도 그들이 치안관으로 올려놓은 자예요. 하하, 겉보기엔 외부인인 것 같아도 어쨌든 애쉬랜더잖아요? 그 한명호가 헬빅의 사인은 쇼크사라고 했다고요!”
테레사가 말했다.
테레사가 설명을 마치자마자, 장목화 곁에 있던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면을 쓰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네.”
레드리버어로 한 말이었다.
사실 그는 레드리버어를 그다지 유창하게 하진 못했다. 하지만 구세계가 파괴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 레드리버어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며, 어느 정도 다 변해 있었다. 테레사의 레드리버어 악센트 역시도 위드 시티에서 유행하는 악센트와는 또 달랐다.
“뭐라고요?”
테레사는 멍한 얼굴로 장목화를 돌아보며 답을 구했다.
‘그러니까,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용하는 언어에만 근거해서 상대의 인종을 판단하는 당신이 우습다는 뜻이에요. 지금 당신의 앞에 자리한 우리 넷도 당신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애쉬랜더인데요⋯⋯.
모두가 위장해서 서로를 구분할 수 없게 되니 상황이 확실히 재밌어지네. 심리학상 페르소나의 개념이 그대로 드러나잖아.
하하, 애쉬랜더라도 레드리버어를 알고, 당신 같은 레드리버인도 애쉬랜드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이런 곳에서 대체 왜 적군과 아군을 가리고 연맹을 결성하려는 거지? 동물가면당과 인간가면당, 괴물가면당이라도 만들려고?’
장목화는 속으로 이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극히 짧은 대답을 건넸다.
“저 녀석, 이번에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놀아봐서 저래요.”
그녀는 테레사가 더 물을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치안소에서는 헬빅 씨가 쇼크로 죽었다고 말했다고요?”
테레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사람들은 일을 너무 건성으로 처리해요. 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정말로 놀라서 죽은 것일 수도 있잖아. 중요한 건 왜 놀랐냐는 건데.’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물었다.
“헬빅 씨에게 혹시 심장 쪽의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없었어요. 언제나 건강했어요. 달리기, 뛰기, 심지어 격투도 잘했어요.”
테레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장목화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물었다.
“달리기와 뛰기, 격투 실력만 말씀하셨네요. 다른 부분에서는요?”
테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그냥 간단한 예를 몇 가지 든 것뿐이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침대 위에서의 실력은 형편없었지만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목화는 침을 넘기다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곁에선 용여홍도 헛기침을 했지만, 오직 백새벽만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테레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는 우리 교파 내 모든 신도가 앓고 있는 고질병이기도 해요. 어느 때라도 방심해선 안 되니, ‘그 일’을 할 때도 주위 상황을 살피고 배우자가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을지 경계하니까 집중력이 분산되죠. 본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선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게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에요.”
짝! 짝! 짝!
이번엔 성건우 뿐만 아니라 장목화도 함께 손뼉을 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 역시도 경계심이 일상생활에까지 이토록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용여홍이 그들과 함께 손뼉을 치지 않은 건, 그저 넋이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백새벽 역시 호기심을 느낀 듯 물었다.
“부부는 함께 자나요?”
“아뇨. 거리 두기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죠. 관계를 맺고 싶어지면 사전에 약속을 잡아둬야 해요.”
테레사가 솔직하게 답했다.
“아이는요?”
장목화가 캐물었다.
“1살 전까지는 부모와 함께 자지만, 그 후로는 반드시 분리해야 해요. 근데 이런 질문들로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는 않네요.”
테레사는 결국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장목화도 그제야 이 레드마켓 풍속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사냥꾼으로의 본분을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성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아까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한 거야?”
“헬빅 씨가 숨을 잘 참는지요.”
성건우가 당당하게 답했다.
“숨 참기라⋯⋯. 헬빅은 수영을 할 줄 알았어요. 보통 수준 정도는 됐죠. 아무튼 그이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웰러도 다른 문제를 발견하진 못했다고 했고요.”
테레사가 말했다.
장목화도 빠르게 본업에 집중했다.
“웰러의 부검 결과는 믿을만한가요?”
만약 사망자의 몸에 잠재된 문제가 없었던 거라면, 쇼크로 인한 죽음은 각성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장목화가 상식에 기대 생각하기로, 죽음을 일으킬 수 있는 각성자 능력은 실제적인 가위 말 꿈, 사명 영역에 속한 심장 통제 능력, 이 두 가지로 좁힐 수 있었다.
“웰러는 외부인이긴 한데 그래도 레드리버인이잖아요. 한쪽 편을 들 리가 없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의 실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원래 평범한 의사지, 전문 부검의는 아니잖아요.”
테레사는 자신의 모순된 생각을 밝히려 애썼다.
장목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성건우가 재차 물었다.
“왜 애쉬랜드인 대신 애쉬랜더라고 말하는 건가요?”
레드리버어를 쓸 땐 애쉬랜드인이란 표현이 더 발음하기 쉬웠다.
“애쉬랜드는 모두의 것이니까요.”
테레사의 답에, 장목화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만약 저희가 이 임무를 접수하겠다면 보수는 어떻게 계산하시겠어요?”
“길드에 가서 이 임무와 무기를 회수하는 임무를 합치도록 할게요. 그 무기의 절반을 보수로 드리도록 하죠.”
‘되게 짭짤한데? 이 임무를 완수한 뒤 여태 모아둔 물자를 더하면. 구식 군용 외골격 장치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뒤이어 그녀가 물었다.
“무기 강도 사건에 대해선 아시는 게 있나요? 그 강도들은 원래부터 이 주위 구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인가요, 아니면 갑자기 나타난 건가요?”
그러자 테레사가 격앙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분명 그 애쉬랜더들 짓일 거예요! 무기 거래를 탐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을 제외하면 레드스톤 마켓 주위에 그만한 화력을 자랑하는 강도단은 없다고요!”
감정이 좀 격해졌는지 히스테릭하게 말하던 테레사가 잠시 숨을 헐떡였다.
“헬빅은 생전에 저한테 좀처럼 그 일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냥 어마어마한 화력과 팀워크를 자랑하는 이들이라고만 말했죠. 전부 가면으로 위장을 하고 있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열 명 정도인데 어두운 곳에 숨은 이들도 있었다고 했어요.
더 많은 걸 알고 싶다면 여관 구역의 127호로 가서 리만을 찾아보세요. 리만은 연합 공업에서 온 밀수업자예요. 우리 남편의 사업 파트너였죠. 이번에 도둑맞은 무기들도 리만과 리만의 상인단이 가져온 거예요. 거래를 마치자마자 강도들에게 빼앗겨버렸지만요.”
“알겠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는 죽은 헬빅을 발견했던 통풍구를 가리키며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올라가 봐.”
그러자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테레사가 말했다.
“한명호가 이미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못 찾았어요. 뭔가를 찾았는데 일부러 없애버렸을지도 모르고요.”
“저희가 직접 검사를 해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장목화는 상대의 만류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곧장 테이블을 끌어온 성건우는 통풍구의 철책을 떼버리고 손전등으로 먼저 안쪽을 살핀 후 위로 기어 올라갔다.
통풍관 안은 수시로 누군가가 드나들었던 듯 그다지 더럽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흔적도 없었다.
성건우는 계속해서 통풍관을 따라 안으로 기어가 보았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통로는 점점 더 좁아졌다.
손전등을 비춰서 자세한 관찰을 끝낸 뒤, 성건우는 다시 밖으로 빠져나와 테이블 위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습니다.”
“알았어.”
답을 한 장목화가 테레사를 돌아보았다.
“치안관은 이 근처에 있나요?”
“애쉬랜더들이 종종 숨는 곳으로 갔어요. 어찌 됐든 따라야 할 절차는 따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테레사는 더 이상 한명호에게서 트집 잡을 것이 없다는 듯 답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단 리만 씨부터 찾아가야겠네요.”
“그래요, 최대한 빨리요. 언제 또 연합 공업으로 돌아갈지 모르거든요.”
테레사가 재촉했다.
구조팀 네 사람과 테레사는 곧바로 건파이어를 빠져나왔다.
그때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있나요?”
“있죠. 둘이에요. 그건 왜요?”
테레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신체 기능은 정상이네요.”
성건우는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또 한 번 테레사의 머리에 쥐가 났음을 파악한 장목화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물었다.
“자녀분들 나이는요?”
“큰 애는 열다섯 살, 작은 애는 열두 살이에요. 둘째를 낳은 후로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관계할 때 연합 공업에서 생산된 제품을 사용했어요.”
테레사는 숨김없이 답했다.
곧이어 장목화는 테레사와 안녕을 고하고, 팀원들과 발길을 돌렸다.
* * *
구조팀은 5층으로 돌아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던 그때, 장목화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레드스톤 마켓을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는 경계 교파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
“왜요?”
용여홍이 물었다.
그는 가우디의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아무리 경계 교파의 교리가 생존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도,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이 너무도 쉽게 그 교파에 가입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경계 교파에 가입하지 않았어도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한다면 스스로를 아예 숨길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