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숨기의 정수
이곳은 거주 구역으로 계획된 곳인 듯, 크기가 일정한 방들이 아주 많았다. 각 방에는 오래된 싱글 침대, 더블 침대, 벙커 침대와 각종 수납장, 의자가 놓여 있었다.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은 이미 다 찾아봤어요. 미사를 드릴 때는 엘리베이터와 계단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도 따로 뒀었거든요.”
레나토가 구조팀을 안내하며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을 겁니다!”
성건우는 마침내 오랫동안 입에 담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레나토의 말문은 잠시 그대로 막혀버렸다.
이때, 임시로 주도자 역할을 하게 된 백새벽이 애써 공백을 깨고 나섰다.
“전에 찾아본 곳이라고 해도 우린 참고로 삼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만 믿는다면 판단에 오히려 방해가 돼서 중요한 곳을 빼놓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레나토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칭찬했다.
“아주 전문적이군요.”
그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미간을 구긴 장목화가 복도 끝의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계속 앞으로 가보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성건우와 레나토는 동시에 전방 모퉁이 위로 시선을 던졌다. 시선이 모인 곳은 바로 천장이었다.
“누가 위에 있나?”
레나토는 조금 더 빨리 걸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천장의 통풍구 철책이 옆으로 옮겨지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15~6살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에, 흐느적거리는 듯한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녹색 눈동자에는 즐거운 빛이 어려 있었다.
소년은 레나토를 보며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주교님.”
소년은 레드리버어를 사용했다.
레나토 역시 레드리버어로 답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한층 커져 있었다.
“비엘! 여태까지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냐?”
‘비엘?’
장목화는 멍한 눈으로 팀원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성건우는 오른손을 주먹 쥐고 왼손바닥을 내리치며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직 능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목표가 제 발로 나타나 버린 것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구조팀은 모두 레드리버어를 알고 있었다. 백새벽도 환경적인 압박 때문에 그 언어를 어느 정도 익힌 상태였다. 각자의 수준은 달랐지만 적어도 기본적으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비엘은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통풍관 안에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숨기의 정수를 모르는지 한 번 선택한 장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데요? 하지만 전 상황에 따라 위치를 옮겼어요. 다른 사람이 오면 다른 곳으로 피하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고 하는 식으로요!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빙 둘러 우회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제가 통풍관 안을 기어 다니는 동안 소리를 내면 안 되니까요.”
레나토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흘 내내 굶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구나.”
“미리 먹을 걸 준비해왔거든요. 사람들에게서 제일 먼 곳으로 돌아간 뒤, 화장실로 기어가서 물도 마시고, 볼일도 봤어요. 이거야말로 진정한 숨기죠! 우린 분명 한 공간에 있었지만,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있는 것 같았잖아요!”
비엘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때,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역시 레드리버어를 쓰고 있었다.
“가면은 안 썼네.”
자그마한 비엘은 키 큰 원숭이, 아니, 성건우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난 모든 위장 기술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나중에 다시 나를 마주친다 해도 절대 못 알아볼 걸?”
“하지만 특징이 워낙 또렷하잖아.”
성건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순간 웃음기가 싹 가신 비엘은 몇 초 후에야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보완 못 하는 건 없어.”
“있어. 난 키가 작은 사람으로 위장할 수 없는데?”
성건우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비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었다.
“다리를 부러뜨리면 되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여홍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꼭 꼬맹이 둘의 입씨름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장목화 역시 저렇게 계속 싸우도록 둘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백새벽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팀장의 생각을 명확히 알아챈 백새벽이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 레나토에게 말했다.
“비엘을 찾았으니 우리의 임무는 끝난 거겠죠?”
그녀는 비엘이 나타났다는 말 대신 일부러 찾았다는 말을 택했다. 어쨌건 그들이 임무를 맡은 후에 나타난 결과니, 공로는 인정해줘야 했다.
또 생각해 보면, 레나토가 비엘이 숨어있던 며칠간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로 조사를 부탁할지도 몰랐다.
레나토는 손을 들어 얼굴에 착용한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임무는 완수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많은 보수를 줄 수가 없네요.”
이번엔 장목화가 나섰다.
“상관없어요. 전에 약속했던 것만 지켜줘도 됩니다. 잔금은 디마르코 가문의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대신하죠.”
장목화는 이야기를 듣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는 듯한 분위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렇게 경계 교파와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건 레드스톤 마켓에서 지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백새벽도 동료들 뜻이 곧 자기 생각과도 같다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정말 성실하고 공정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분들이네요. 제2의 한 대장 같아요.”
레나토는 보수에 집착하지 않는 구조팀의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
“한 대장? 치안소에 있는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장목화가 호기심을 표하자, 레나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대장은 구세계 기사 같은 미덕을 갖추고 있죠. 안 그랬다면 한 대장을 치안관으로 초빙하는 데 모든 주민이 동의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베테랑 사냥꾼에, 우리 주님을 믿지도 않아 좀처럼 숨지도 않는 사람이잖아요.”
“말도 안 돼!”
성건우가 외쳤다.
용여홍은 그가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세계 기사는 자고로 겸손, 연민, 공정, 성실, 영웅심 등 온갖 미덕을 다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야유랑자 출신 베테랑 유적 사냥꾼이 구세계 기사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니?
이건 기계 승려들이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세상 무엇보다 사랑을 우선시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황야유랑자 출신 유적 사냥꾼 백새벽도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같은 집단 안에서 도덕적 관념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했지만, 그런 미덕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했다.
백새벽은 특정 대상에만 연민을 느꼈으며, 영웅심 역시 갖은 노력을 들여야만 겨우 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레나토는 이 문제로 논쟁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죠. 한명호의 그런 모습이 위장에 불과하다 한들, 계속해서 그런 위장을 이어간다면 진정한 기사인 겁니다.”
“맞아요.”
장목화도 그 말에 동조했다.
사실 그녀가 더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이곳 주민 태반이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음에도, 외려 레드리버 문화에 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구세계가 파괴되고 인구가 대량 이동하면서 두 문화는 거의 파편만 남다시피 한데다, 이미 여러 지역에서 뒤섞인 상태이긴 했다.
곧이어 레나토가 키 작은 비엘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미사는 주님의 제단 앞에서 기도드리면서 마치도록 해.”
“예, 주교님.”
비엘은 출구 쪽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그러다 성건우를 스쳐 갈 무렵,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린 비엘은 그를 놀리듯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멀어지는 소년을 보던 성건우는 다시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을 쳤다.
“아깝다⋯⋯.”
장목화는 조용히 눈동자를 위쪽으로 굴렸다. 성건우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뻔했다. 지금 가면을 쓰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응수하지 못한 것을 아까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레나토가 전방을 가리키며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가장 큰 무기상은 저기에 있습니다.”
“디마르코 선생인가요?”
장목화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만 주어진다면, 구세계 파괴에 관한 질문도 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레나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실제 업무는 카를 선생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집사 중 한 사람이죠. 여러분께 소개해드릴게요.”
“좋아요, 좋아요!”
분명 장목화의 목소리인데, 용여홍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성건우가 몰래 용여홍에게 속삭였다.
“팀장님 말이야,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그냥 조금 흥분한 거다!”
어김없이 장목화가 성건우를 살짝 흘겨보았다.
이들의 대화에 레나토는 잠시 백새벽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왠지 이렇게 유치한 팀원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백새벽은 어쩐지 민망해져서 저 사람이 바로 이 팀을 이끄는 팀장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건우를 고칠 수 없다면, 그에게 동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신질환이라는 것 또한 쉽사리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었다.
* * *
머물던 복도를 나가 몇 번 더 우회하니, 또 다른 엘리베이터 홀이 나왔다.
이곳에는 굉장히 묵직해 보이는 흑회색 엘리베이터가 총 세 대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크지 않은 액정 화면 두 개가 박혀 있었다.
레나토는 앞으로 몇 발 나가 버튼 하나를 누르고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좌측 액정 패널이 일렁이더니 남자 한 명이 떠올랐다.
장년의 남자는 구세계의 검은색 수트 차림에 멋스러운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뒤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모습이었다.
눈동자가 옅은 파란색인, 전형적인 레드리버인이었다. 생김새는 좀 평범했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귀족 같고 우아하다 볼 순 없지만 일행은 그를 보니 지하 방주의 주인 디마르코는 어떨지 기대감이 커졌다.
본래 액정 패널에 사람이 떠오르면 카를 선생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려던 레나토는 오늘 당직이 바로 자신이 찾던 사람인 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번에 그는 레드리버어로 패널 속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마침 잘됐네요. 카를 선생, 선생과 사업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카를은 카메라를 통해 레나토 뒤의 가면 쓴 네 사람을 확인했다.
- 내일 아침 9~10시 사이에 제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전해주세요. 오늘은 주인님께서 맡기신 일로 바빠서 시간이 안 됩니다.
백새벽은 장목화와 눈빛을 주고받곤 레나토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레나토가 카를에게 대답했다.
“네, 그러죠.”
이윽고 카를이 물었다.
- 이번 미사는 끝났겠지요?
“끝났습니다.”
레나토의 말투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 경계하는 마음은 영구히 존재하리라. 내일 뵙겠습니다.
카를은 교차시킨 양팔을 가슴팍 앞으로 들어 보이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액정 패널에 떠오른 화면이 꺼지자, 예의 있는 그 남자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