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84화 (184/649)

184화. 위탁자

곧이어 사냥꾼 길드를 나오자마자, 장목화가 성건우를 째려보았다.

“뭐, 레드스톤 마켓에서는 레드스톤 마켓의 법칙을 따르겠다는 거냐?”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은 다음, 가면을 쓰고서 적에게 대적하는 거, 꽤 느낌 있지 않겠어요? 꼭 구세계 가장무도회 같은 느낌이겠는데⋯⋯.”

상상을 그대로 풀어놓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느낌이야 네가 어떤 노래를 틀고 어떤 가면을 쓰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성주 저택 귀족 의사당에서 열렸던 무도회로 인해, 장목화는 성건우의 스피커에 기괴한 노래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부터 그 안에 내장돼있던 건지, 무근자 상인단에서 받은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당시 광경을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 *

이야기를 나누며 일단 주차장으로 돌아간 구조팀은 물자가 든 종이상자 하나를 들고 4층으로 올라가 카샤 여관을 찾았다.

당연히 이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입구에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리 크지 않은 방 한쪽의 벽에는 창문처럼 보이는 금속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금속 문 양옆에 애쉬랜드어, 레드리버어로 된 알림이 적혀 있었다.

「노크하세요.」

성건우는 곧장 그곳으로 다가가 ‘문’이라고 칭한 금속 창을 두드렸다.

똑똑-

몇 초 후, 방 높은 곳에 달린 확성기에서 의도적으로 변조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몇 명? 방은 몇 개를 원하지? 며칠이나 묵을 건데?

“대단한데.”

성건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여관 주인이 이 벽 뒤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과 주인과의 사이엔 적어도 두꺼운 벽 세 개쯤은 있는 듯했다.

이는 즉, 각성자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짧은 시간 안에 여관 주인을 습격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 역시 일종의 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잡해. 머신헤븐에서 감시카메라를 얻어다 선을 더 연결하고, 레드스톤 마켓 밖에 숨어 원격 조종을 하는 게 훨씬 더 은밀하고 안전하지 않나?”

그 순간, 방 높은 곳에 달린 확성기가 재차 울렸다.

- 이봐, 그러려면 돈도 필요하고, 물자를 받고 전자 카드를 내어줄 로봇도 필요하잖아. 돈이 없으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장목화는 여관 주인이 반박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그저 웃으며 말했다.

“레드스톤 마켓은 암거래 중심이니 로봇이나 군용 외골격 장치, 지능 갑옷 같은 건 싼값에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다시 방 높은 곳에 달린 확성기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 그런 것들은 싼값에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굉장히 잘 팔리기도 하고. 나는 지금 이런 방식이 좋아. 물자를 대량으로 낭비할 필요도 없고, 얻기 어려운 인맥을 맺으려 허둥댈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군.”

장목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를 통해 얻은 수확이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에 군용 외골격 장치를 구할 기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굉장히 잘 팔리는 물건이라 어지간한 인맥과 충분한 물자가 갖춰지지 않으면 구매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장목화가 혼잣말을 그리 크게 한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성건우처럼 입이 가볍지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도 경계심이 상당한 여관 주인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대신, 조금 전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 방은 몇 개를 원하지? 며칠 묵을 예정인데?

“두 개. 침대가 두 개 있고, 화장실도 딸린 방으로. 일단은 일주일만 묵을 거야.”

장목화는 미리 준비한 대로 대답했다.

- 어떤 걸 내놓을 건데?

“군용 통조림.”

이번엔 성건우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위드 시티에서 남하하는 동안 구조팀은 다시 또 군용 통조림 지옥에 빠진 까닭에 더는 그것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 미개봉 통조림이어야 해.

여관 주인이 강조했다. 이미 개봉된 통조림이라면 혹여나 누군가가 독을 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 방 하나당 하룻밤 묵는데 통조림 하나니까, 총 열네 개 주면 돼. 벽에 있는 금속 문 열고, 거기로 통조림 집어넣고 문 닫아.

그러자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눈짓했다.

성건우가 문을 열자, 안쪽에는 텅 빈 공간이 마련돼 있었으며 그 공간 맞은편에는 이쪽에 붙은 것과 똑같은 금속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렇게 먼저 나서 확인 절차를 거친 성건우는 돌아서기 전 한 마디를 불쑥 꺼냈다.

“가면도 필요한데.”

- 가면 네 개는 서비스로 줄게.

여관 주인의 답에, 성건우가 기뻐하며 물었다.

“내가 묻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줬을까?”

- 아니.

여관 주인의 말투는 매우 침착했다.

성건우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데, 장목화의 눈짓을 받은 용여홍이 종이상자를 가득 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성건우는 조용히 물러났다.

곧 용여홍은 통조림 열네 개를 금속 문 안쪽 공간에 놓인 쟁반 위에 올려놓은 다음, 바깥쪽에 있는 금속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로 봐서는 이쪽 금속 문이 아예 잠긴 듯했다. 뒤이어 벽 너머에서 마찰음까지 들려오자, 성건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여관 주인이 통조림만 가지고 날라버리면 어떡하죠?”

“그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주카포를 가져와 이 벽을 부숴버려야지!”

장목화는 마치 악당처럼 웃었다.

그로부터 수십 초가 지났을 무렵, 방 높은 곳에 달린 확성기에서 다시 그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문 열고 전자 카드랑 가면 챙겨가면 돼.

줄곧 벽 앞을 지키고 있던 성건우는 신이 난 듯 금속 문을 열었다.

쟁반 위 통조림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곳에 흰색 플라스틱 각 안에 담긴 전자 카드 두 장과 다양한 종류의 천 가면들이 한데 쌓여 있었다.

성건우는 전자 카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천 가면부터 챙겨 진지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우아해 보이는 중 가면, 털이 부숭부숭하고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 마늘이라도 끼울 수 있을 정도로 콧구멍이 큰 돼지 가면, 수염이 북슬북슬 난 험악한 인상의 남자 가면……. 참 종류도 다양했다.

“재미없고, 재미없고⋯⋯.”

성건우는 일단 중과 남자부터 배제했다. 그 둘은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비교하던 그는 결국 의기양양하게 원숭이 가면을 택했다.

냅다 가면을 쓰는 그를 보고, 장목화는 이제 습관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넌 진짜 원숭이를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흉내 낼 수 없어.”

“맞아요.”

뒤이어 다가간 장목화는 가장 먼저 돼지 가면부터 배제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우아한 중 가면이었다.

이내 용여홍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백새벽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네가 먼저 골라.”

백새벽은 사양하지 않고 험악한 남자 가면을 골랐다.

결국 용여홍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결과를 받아들였다.

전자 카드 두 장에는 각각 태그가 붙어있었다. 하나는 05, 다른 하나는 06이었다. 장목화는 전자 카드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이 가면들 보니까 구세계 얘기가 생각나네. 돌아가 짬이 나면 들려줄게.”

* * *

네 사람은 여관 주인의 안내에 따라 차를 타고 지하 레드스톤 마켓을 빠져나갔다. 언덕을 따라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이른 나무로 둘러싸인 평지에 수많은 흰색, 파란색 간이 가옥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하늘이 어둡게 물들고 있어서인지, 주변엔 아무도 없는 듯 적막하고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러나 장목화도, 백새벽도 부근의 은밀한 곳에 누군가가 숨어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언덕 근처에 자리한 05호, 06호 방은 비교적 넓었고, 싱글 침대 두 개와 테이블, 의자, 소파, 거기에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쉬면서 정리부터 한 다음에 밥 먹으러 가자.”

간이 여관에 상당히 만족한 장목화는 다시 또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가 숨어있는 식당 사장을 찾느라 용을 쓰고 싶지 않았다.

“예, 팀장님!”

용여홍, 백새벽은 금세 답했지만, 성건우는 상당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 * *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부터는 차가운 공기가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한창 장목화에게 구세계 얘기를 듣던 용여홍은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옷 한 벌 더 입고 올걸,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05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일찍이 상대의 존재를 감지했던 성건우는 어느새 원숭이 가면을 쓰고 문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끼끼끼?”

“⋯⋯.”

문밖의 사람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장목화는 역시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말로 해!”

성건우는 그제야 사람 말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전하얀 씨 계십니까?”

방문자는 남자였다. 그는 애쉬래드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가 칭한 전하얀은 백새벽이 사냥꾼 등록을 할 때 썼던 가명이었다.

백새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면을 착용했다.

“무슨 일이시죠?”

문밖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부탁할 의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왜 굳이 저한테……?”

백새벽이 물었다.

“중급 사냥꾼이니까요. 거기다 곧 베테랑 사냥꾼으로 승급할 것 같던데요.”

문밖의 남자가 간단히 설명했다.

장목화를 돌아본 백새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팀장의 모습을 보고, 다시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래, 문 열어봐.”

곧장 문을 연 성건우는 냅다 원숭이 가면을 쓴 얼굴을 내밀었다.

이들을 찾아온 남자는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흰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착용한 그는 흠칫 놀랄 법한 원숭이 가면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역시 이곳은 레드스톤 마켓이었다. 가면을 착용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예의로 여기는 이 마켓의 사람이 이런 가면을 처음 봤을 리 없었다.

남자는 곧 가슴팍 바로 앞에서 양팔을 교차한 다음 한발 뒤로 물러났다.

“경계하는 마음은 영구히 존재하리라.”

“경계 교파의 사람이신가요?”

백새벽이 대화를 주도하는 동안, 장목화는 흥미로운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

이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레드스톤 마켓 경계 교파의 주교, 레나토라고 합니다.”

“앉으세요.”

백새벽이 소파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 시각, 성건우는 경호원처럼 팔짱을 끼고 계속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레나토가 자리에 앉자, 백새벽이 물었다.

“레드스톤 마켓의 주요 교파 주교이니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왜 굳이 저랑 우리 동료들에게 부탁하러 온 거죠?”

잠시 침묵하던 레나토가 답했다.

“신도들에게 알리기에 불편한 일들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사냥꾼 길드를 통하지도 않은 거고요.”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라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백새벽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레나토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저도 이게 과연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간단하게라도 이야기해보시죠.”

레나토는 방에 자리한 다른 이들을 한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가우디가 우리 교파에 대해 해준 이야기는 이미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린 며칠 전 미사를 진행했습니다. 주제는 숨기였죠. 그걸 통해 신을, 우리가 믿는 달지기 에이돌른을 기쁘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시합 이후 여태까지 한 사람이 계속 보이질 않아요.”

“비엘!”

성건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자 레나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숨은 지 거의 사흘이 다 된 데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발견돼서, 저는 이만 미사를 끝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불러냈어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레나토의 어조에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가면을 쓴 까닭에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장목화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도? 꼭 다른 사람보다 신도들을 찾아내는 데 능한 것처럼 이야기하네? 각성자라서 의식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기라도 한 건가? 비엘은 이미 죽었거나 알아서 각성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을 숨길 수 있게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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