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81화 (181/649)

181화. 경계는 신의 힌트

건물로 들어간 장목화와 성건우는 빠른 속도로 홀 가장자리에 붙은 방 하나에 집중했다. 걸음은 살짝 늦추고, 조심조심 회백색 돌조각과 유리 파편이 널린 구역을 건넌 두 사람은 머지않아 목적지에 이르렀다.

조금 뒤, 성건우는 장목화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조용히 반 바퀴를 돌아 방의 또 다른 출구를 지켰다.

그가 자리를 잡자, 장목화는 그제야 방 안의 사람도 총을 쏠 수 없을 만한 곳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와, 우리는 이미 너를 발견했다.”

나무 문이 굳게 닫힌 방은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그렇게 10여 초 후, 성건우가 지키고 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고양이처럼 등을 굽히고 그 안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다소 좀 촌스러운 인상의 20대 남자였다.

남자는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하고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남자의 시야에 햇살처럼 찬란히 웃는 누군가의 얼굴이 담겼다.

“찾았다!”

성건우는 남자의 이마에 대고 아이스모스를 정조준했다.

그러자 남자는 곧장 두 손을 쳐들며 순종적인 자세를 취해 보였다.

“내가 졌어.”

그 말에 성건우는 오히려 의아해했다.

“왜 졌다고 그러는 거지? 우리는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이마에 닿은 차가운 총구를 느끼며 솔직하게 답했다.

“그게 우리 레드스톤 마켓의 규칙이야. 우리 교파의 교리이기도 하고.”

성건우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교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바꼭질을 하는 게 너희 교리냐?”

남자는 몇 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내다가 다시 답했다.

“아니, 언제나 경계심을 드높이고 숨어 사는 게 우리 교리야.”

잠시 생각하던 성건우가 반문했다.

“그게 내가 말한 거랑 뭐가 다른데?”

성건우가 총으로 겨누고 있는 이 남자는 애쉬랜드와 레드리버 사람 사이에서 나온 혼혈인 듯했다. 머리도 검고, 눈동자도 갈색이었지만 콧대가 상당히 높고 아이홀도 깊었다.

한편 남자가 입은 회색 옷은 주위 환경과 상당히 비슷한 색이라 언제라도 그 배경에 녹아들 것만 같았다.

이내 남자는 약간 화가 난 듯 강조했다.

“이 세상은 굉장히 위험해. 일찍이 강력했던 인류 문명도 버티지 못했는데 지금의 우리라고 무사할 수가 있겠어? 높은 경계심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언제든 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절멸했을 거야.”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장목화가 상대와 말싸움을 이어나가려 하는 성건우를 저지하며 물었다.

“레드스톤 마켓 사람이야?”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날 맹목적으로 믿지는 마. 언제든 충분한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해.”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라, 장목화는 살짝 웃음이 났다.

“그래, 우린 언제나 경계심을 잃지 않아. 아, 레드스톤 마켓은 어디야?”

“이 폐허 어딘가. 너희들이 이미 날 찾았고, 난 너희들 눈을 피해 숨는 데 실패했으니 거기로 데려다줄게.”

남자는 건물의 홀 쪽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름이 뭐지?”

강하고 능력도 넘치는 장목화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주저하지 않았다.

“가우디. 하지만 이 이름도 가명일 수 있으니 맹목적으로 믿지는 말고.”

남자가 답했다.

성건우는 곁에서 상대에게 한 수 배웠다는 듯 약간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곧바로 아이스모스를 거둔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장서. 레드스톤 마켓에 도착하면 그때 놓아줄게. 이 말도 거짓일 수 있으니 맹목적으로 믿지는 말라고.”

가우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뒤 홀 쪽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그래, 서로 거리 두는 것만큼 좋은 친구는 없지.”

* * *

빌딩을 나온 성건우는 차 뒷좌석에 가우디를 앉히고 길 안내를 맡겼다.

이번에 운전대를 잡은 것은 백새벽이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목화는 가우디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가 믿는 건 어느 교파야?”

가우디는 유창한 애쉬랜드어로 답했다.

“경계 교파. 하지만 이것도⋯⋯.”

“알았어! 알았어. 다 알고 있어. 그래, 그 교파는 어느 달지기를 믿는데? 교리는 뭐야? 좀 흥미로워서 말이야.”

계속 반복되는 가우디의 말을 끊은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옆에 있던 성건우도 덧붙였다.

“성찬은?”

가우디의 표정이 사뭇 신실해졌다.

“우리가 믿는 건 10월의 달지기, 에이돌른이야. 구세계 파괴전부터 그분은 이미 어느 지역 민간인들 사이에서 널리 믿음의 대상이었어.

우리가 경계 교파라고 불리는 건 에이돌른이 우리에게 세계는 위험하며 경계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본능임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야. 경계심이 없는 사람은 구세계 파괴 이후 시작된 각종 재난으로부터 신세계가 강림하기까지 살아남긴 매우 어렵지. 경계는 신의 힌트야.”

이 대목에서 가우디는 두 팔을 들어 가슴팍 앞에 교차시키면서 매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

성건우의 재촉에, 가우디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 성찬은 없어. 자신이 직접 준비하지 않은 물이나 음식을 감히 어떻게 먹어? 우리는 미사나 다른 의식에 참여할 때도 본인이 직접 끓인 물과 직접 만든 음식을 챙겨서 가.”

“경계 교파답네.”

장목화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소하다는 듯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역시 성건우는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보네.”

가우디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이, 장목화는 화제를 돌렸다.

“너희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은 전부 경계 교파 사람이야?”

“거의 그래. 몇몇 소수랑 너희 같은 외부인만 빼고. 레드스톤 마켓은 건립된 이래 수시로 공격을 받았어. 매번 사상자도 적잖이 나왔지. 당시 여러 교파 사람들이 찾아와 전도해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수도 늘어났어.

하지만 우리는 점차 경계 교파의 교리와 이념이 가장 유용하다는 걸, 에이돌른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을 가장 가련하게 여기는 달지기란 걸 깨달았어. 그 후 모두 자발적으로 경계 교파에 들어왔고, 공격을 받는 횟수도 극명하게 줄어들었어. 사상자도 마찬가지고.”

가우디의 말엔 상당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애쉬랜드의 질서가 회복되고 정세가 안정되니까, 연합 공업에는 드러내놓고 하기 불편한 일들을 처리할 밀수와 암거래의 장이 필요해진 거겠지.’

그래도 그녀는 성건우가 아니라서 낯선 환경에 처한 지금, 가우디에게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마구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 * *

가우디의 안내를 따라, 지프는 심각하게 파괴된 거리를 우회해 좀 넓은 지대에 진입했다. 상록수도 적잖게 심긴 곳이었다.

“구세계에 있던 공원인가?”

장목화는 알고 있는 지식에 기반한 추측을 내놓았다.

“아마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가우디가 이 역시 거짓일 수 있으니 맹목적으로 믿지는 말라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지프가 마침 갈림길 앞에 이르렀다. 결국 가우디도 하려던 말은 뒤로한 채 길을 안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으로, 끝까지 들어가.”

지프는 금세 한 조그만 언덕 앞에 다다랐다. 언덕엔 큼지막한 동굴이 하나 나 있었는데, 입구도 차 네 대는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매우 컸다. 거기에 온전하게 보존된 지하 통로가 있었으며, 길도 굉장히 매끄러웠다.

용여홍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레드스톤 마켓은 지하에 있었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굴 입구 양옆 절벽 구멍에서 총구가 쑥 빠져나왔다. 동굴 안쪽 깊은 곳에는 바깥을 겨냥한 대포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내려서 인사할게.”

가우디가 말했다.

장목화는 백새벽에게 지프를 살짝 뒤로 물러 대포의 포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뒤, 가우디가 내릴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어주었다.

“훌륭한데, 아주 경계심 있는 행동이야.”

가우디가 칭찬했다.

곧이어 그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손을 흔들자, 쑥 빠져나왔던 총구와 일행을 겨누던 포구가 거두어졌다.

백새벽은 그제야 지프를 앞으로 몰아 가우디를 태운 뒤,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지프는 계속 축축한 길을 따라 빙글빙글 선회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이 나타났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대.”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지형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그래, 다들 그런 곳에 차를 세우더라고.”

가우디도 경계 교파의 사람들 역시 전부 그렇게 생각한다며 말을 보탰다. 이는 언제든 레드스톤 마켓에서 튀어 나가 차를 타고 달아날 수 있게 준비를 해두는 것이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지. 그럼 그냥 이 근처에서 빈자리를 찾아야겠다.”

이내 구조팀은 한 차례 탐색 끝에 차를 세웠다.

* * *

나무 문 두 개를 지나자, 구조팀은 드디어 레드스톤 마켓을 마주했다.

꼭 바깥의 건물 배치를 그대로 복사해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지하에 자리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맨 아래에 자리한 광장은 현재 구조팀이 있는 꼭대기 층에서 바로 내려다보였다. 광장 주위로 각 층계가 하나하나, 원을 그리듯 쌓아 올려져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곳은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환하게 밝혀진 각 층 점포엔 다양한 간판들이 걸려 있었다.

[무기 거래] [해상 석유회사 주 레드스톤 마켓 사무소]…….

용여홍은 이 광경을 보자마자 이곳에서는 팔지 않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간판을 봤을 때 이곳은 위드 시티 지하 시장보다 숨기는 것 없이 더 투명하게 모든 걸 드러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 점포에는 진열된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점포 안에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과 의자, 수납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급기야는 사람도 하나 보이질 않았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거래하려면 일단 숨어있는 사장부터 찾아야 해.”

가우디가 이야기하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천으로 만든 가면을 꺼내 썼다. 그는 갑자기 상당히 거칠고 흉악한 인상으로 변해버렸다.

“재미있네.”

이상하리만치 밝은 눈빛을 번득이던 성건우는 장목화가 막기도 전에 제일 부근에 있는 점포로 달려갔다. 골드리버 찻잎을 파는 상점이었다.

쿵쿵쿵-

“찾았다!”

문 앞의 나무 장을 몇 번 두드린 그는 곧장 장목화의 곁으로 돌아왔다.

몇 초 후, 느릿하게 열린 문 안쪽에서 기껏 해봐야 16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중년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아래턱에 검은 수염을 기른 남자는 멍한 얼굴로 가게를 한 번 둘러보았지만, 자신을 찾아낸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웃으며 시선을 거둔 장목화가 가우디에게 말했다.

“이게 레드스톤 마켓의 방식이야? 일단 우리 사냥꾼 길드로 좀 데려다줘.”

“거긴 맨 아래층에 있어.”

가우디는 솔선해서 옆쪽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장목화가 물었다.

“여기에서는 뭐로 발전을 해?”

“디젤 발전기, 태양열 충전판, 수력 발전 장치, 전부 쓰지.”

가우디가 답했다.

“미사는 어떤 식으로 해? 누가 더 잘 숨는지 시합이라도 하나?”

갑자기 성건우가 매우 신난 듯 끼어들었다.

“그것도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야. 이전 미사에서 난 10등이었어.”

가우디의 답을 듣고,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숨바꼭질교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네.’

“그럼 누가 1등이었는데?”

성건우의 질문이 이어졌다.

“비엘. 그 사람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어.”

가우디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어려 있었다.

“⋯⋯그 미사는 언제 거행됐는데?”

흠칫 놀란 장목화가 물었다.

“사흘 전.”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가우디를 보고, 장목화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행이네.”

조금 더 오래전에 생긴 일이었다면 그 비엘이라는 사람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장목화는 구세계 서적을 탐독한 연구원이라 사악한 의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달지기의 은혜를 받아 신세계에 들어갈 최후의 1인이 될 수 있게 꼭꼭 숨으라는 미사라니. 자칫하다간 인신공희로 변질되기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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