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나침반
다음 날, 공짜 음식과 음료를 얻어먹기 위해 성주 저택을 찾은 성건우는 다시 한번 허양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허양원은 좌우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고 정념 선사만 곁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성건우 옆에 선 장목화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민해봤는데, 위드 시티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그쪽과 합작 관계가 필수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어떤 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을 거야. 중요한 건 진심이니까.”
허양원은 상대가 자신과 한 계약 내용을 누설하면서 퍼스트 시티가 간섭할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반고 바이오에서 해당 계약을 빌미로 그를 위협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어요.”
장목화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 협상에선 사실상 그녀가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이내 허양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언제 시작하지?”
장목화는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지금 바로 회사에 보고해 생체 의수를 이식할 사람이 파견된다고 해도 당장 수술하진 않으실 거잖아요. 저희를 그렇게나 믿으십니까?”
허양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실제로 반고 바이오를 그렇게까지 믿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다시 전보의 내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기본적인 합작을 시작하며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시죠. 저희는 일단 유전자 개량 원액을 제공할 겁니다. 성주님께서는 그 대가로 등가의 금속 광물을 준비해 주세요. 어떤 광물이든 상관없습니다.
성주님께서는 일찍이 유전자 개량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나이를 넘겨버렸지만, 아무 준비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죠. 어쨌든 이러한 조치로 안전성은 더 높아질 테니까요. 음, 가문의 후대를 위한 준비까지 해두셔도 좋고요.”
잠시 고민하던 허양원이 답했다.
“그러지.”
* * *
장목화 팀은 새로 사들인 무선 통신기로 반 지성교와 허양원에 관한 일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무렵, 회신이 도착했다.
「알겠다. 후속 사무를 처리할 인원을 보내겠다. 너희 구조팀은 이제 머신헤븐의 단서를 쫓아 구세계 파괴 원인을 심도 있게 조사하도록.」
* * *
달리는 차 왼편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바람에 일렁였다. 그 옆으로 구세계 건물들이 있었지만, 그중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더러는 이미 무너졌고, 더러는 이상하리만치 망가져 있었으며, 더러는 노랗게 말라버린 식물에 죄다 뒤덮여 있기도 했다. 그 시든 잎사귀들도 수시로 바람결에 하나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가 레드스톤 마켓인가요?”
운전 중인 용여홍이 물었다.
위드 시티를 떠난 구조팀은 한동안 남쪽으로 달리기만 했다. 그래도 손영배와 플린이 가르쳐준 대략적인 위치와 도중에 마주친 유적 사냥꾼 몇몇 팀이 알려준 길을 따라, 겨우 분노의 호수를 찾아서 범위를 대강 확정 지었다. 그 후로 사람이 활동한 흔적을 따라 호수 옆 폐허 도시에 이른 것이었다.
위성을 통해 위치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내비게이션도 없는 상황에서는 이렇게 서툰 방법으로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백새벽도 레드스톤 마켓에 대해 알고만 있었을 뿐, 실제로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일찍이 활동했던 구역은 반고 바이오와 퍼스트 시티, 그리고 화이트 기사단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는 유적 사냥꾼, 황야유랑자 대부분이 그랬다. 정해진 집이 없는 그들은 어디로든 가서 살 수 있었지만, 정보와 물자, 인맥, 용기, 경험 등의 제한이 있어 대개 특정 구역에만 머무르는 편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백새벽이 잘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긴 버려진 지 꽤 된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 똥들 봤어? 이 주위에 사람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는 증거지. 이곳이 레드스톤 마켓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레드스톤 마켓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뒷좌석에 있던 성건우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발견한 흔적을 보고 사람이 있으리란 걸 상당히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위드 시티에서 출발할 당시, 군용 외골격 장치를 구입할 물자를 모으기 위해 장목화는 여분의 차량을 무근자 상인단에 팔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성건우가 지프차를 끌어안고 동료나 다름없는 이 차를 팔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구조팀은 허양원으로부터 받은 방탄 SUV를 파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장목화는 지프의 생존 능력을 높이고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자의 반을 팔아, 플린에게 방탄유리와 두꺼운 장갑을 더 하고 전기 엔진을 개조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여정에 필요한 식량과 탄약은 직접 구할 필요가 없었다. 구조팀은 회사에 보고한 뒤 진병욱을 통해 대량의 물자를 마련했다. 본디 공식적인 업무는 공정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뒤이어 장목화가 손을 들어 코 밑을 쓸었다.
“폐허 내부를 한 번 돌면서 뭘 발견할 수 있을지 보자.”
그리고 그녀는 성건우가 든 책을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책은 어때?”
출발 전 그녀는 성건우의 특권을 이용해, 위드 시티 공공 도서관에서 비교적 인기가 없는 질병과 관련된 서적들을 빌렸다.
성건우는 폐허 도시 내로 차를 보는 용여홍을 한번 보다가 답했다.
“알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음?”
장목화는 단순한 콧소리로 호기심을 표했다.
“의학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인류를 구할 수 없어요.”
성건우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뜻밖의 답에 장목화가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뜻인데?”
“가장 중요한 건 유효한 조직, 탐색 정신, 실험하려는 용기, 과학적인 방법, 지식의 전승이에요. 의학을 배우는 건 그중 한 부분에 불과하죠.”
성건우는 당당하고도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질병 섬에 대적할 새로운 방법을 찾은 거야?”
장목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난 번에 성건우는 그녀와 질병 섬에 관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상의했었다. 그래서 장목화도 같은 팀원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그 문제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엄숙하게 답했다.
“아뇨. 지금으로서는 여태껏 했던 대로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죠.”
“그래, 좋아. 그런 칠전팔기의 정신을 계속해서 유지하라고.”
장목화가 격려했다.
그때 차창 너머에 있는, 시멘트가 갈라지고 철근이 드러난 폐허 건물을 바라보던 백새벽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했다.
“실제로 작은 병을 앓아본다면 질병의 진짜 모습을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근데 이 녀석이 황소처럼 굳센 까닭에 병 같은 걸 좀처럼 앓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야.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감염을 시키기에는 그 감염 정도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아. 휴, 정 안 되겠다면 회사로 돌아간 뒤에 다시 시도해 보는 수밖에.”
장목화도 전에 성건우가 말했던 이와 비슷한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했었지만, 사실 그러한 방향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내 용여홍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그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성건우였다.
“일단 여홍이를 감기에 걸리게 한 뒤에 제가 옮으면 되죠.”
“대체 뭐가 다른 건데? 됐고, 주위 관찰이나 해.”
장목화가 핀잔을 주었다.
* * *
오래되고 낡은 국방색 지프는 드디어 폐허 도시 초입에 막 진입했다.
구세계의 폐허가 대부분 그렇듯, 길고 긴 호숫가를 끼고 있는 이 도시 역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 또한 무근자 야영지 옆에 있던 그 폐허를 떠올리게 했다. 두 곳 모두 대량의 건물이 무너지고, 길바닥은 푹 꺼져있다는 게 매우 비슷했다. 가치 있는 물건이라곤 이미 다 사라졌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그저 황량하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적막밖에 남지 않은 공간이었다.
“구세계에서는 상당히 번화한 도시였겠는데⋯⋯.”
용여홍은 늪 1호 유적에서 본 광경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의 경관 역시 구세계 도시 실제 모습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광경일 것이다.
“인류 문명은 때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쇠퇴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견고하고 완강하기도 해.”
장목화는 폐하가 된 지 몇 년이 지났을지 모를 도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오래전에 파괴된 것 같아요. 최근에 발생한 일은 아니에요.”
주위를 자세히 관찰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그녀도 전문가는 아니라 구체적으로 몇 년이나 된 일인지까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럼 적어도 누군가 최근에 레드스톤 마켓을 파괴한 건 아니라는 말이네. 물론 여기가 레드스톤 마켓일 때의 이야기겠지만.”
장목화는 다시 회백색 콘크리트와 난잡하게 얽힌 철근, 잡초 안쪽의 유리 파편, 녹슬고 텅 빈 창틀 등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20분쯤 지났을까. 구조팀은 여태 이 적막한 폐허를 계속 돌아봤지만, 사람이 거주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운전 중인 용여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은데요? 레드스톤 마켓은 근처 다른 곳인가 봐요. 여긴 그냥 거대한 폐허 도시일 뿐, 시장 같진 않네요. 종종 있는 사람의 흔적은 가치 있는 물건을 찾고자 수시로 여기 들린 사람들 것인가 봐요.”
그러자 성건우가 이젠 확신한다는 듯 여기가 레드스톤 마켓이라고 말했다.
결국 용여홍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그도 친구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챈 것이었다.
장목화 역시 성건우의 추리 과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운이 나쁜 용여홍이 택한 길이 정답에서 비껴간 적이 더러 있었으니, 그가 이곳을 보고 레드스톤 마켓이 아니라고 하면 외려 레드스톤 마켓일 가능성이 크단 의미였다.
그러자 장목화가 용여홍의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몇 마디 하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뒤이어 기침까지 하던 그녀가 옆쪽의 고층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포격을 당한 듯 심각하게 파괴된 빌딩이었다.
“저 안에 누군가 있어.”
“맞아요!”
성건우도 이상하리만치 강하게 확신하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두 사람은 그 건물 안으로부터 사람의 전기 신호와 의식을 동시에 감지했다. 지금 이들과 건물 사이의 직선거리는 15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순간 용여홍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우연이야, 우연.”
장목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위로했다.
“그래, 일단 차 좀 세워봐. 건우랑 같이 저 사람한테 길 좀 묻고 올게.”
성건우 역시 용여홍을 위로하고 나섰다.
“난 이제 우리 팀에서 네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더 잘 알게 됐어. 넌 그야말로 북쪽을 가리키는 우리 나침반이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나침반이라면 당연히 남쪽을 가리켜야 하잖아.’
속으로 중얼거리던 용여홍이 제일 친한 친구의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한 나침반은 남쪽을 가리키니까,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잘못된 거잖아!’
느지막이 밀려드는 분노에 용여홍은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곧이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던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이야기했다.
“조심해라. 언젠가 여홍이가 네 뒤에서 총을 쏠지도 몰라.”
성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전석 앞으로 가서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이런 일로 농담하는 게 싫다면 확실하게 말해줘. 격투 훈련에서 날 한 번이라도 이기면 네 말에 따르도록 할게.”
말을 마친 그가 씩 웃었다.
장목화는 곁을 스쳐 지나가며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초등학생 수준의 자극 요법이네.”
이후 몇 초간 침묵하던 용여홍이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죽도록 노력할 거야.”
이전 격투 훈련에서도 용여홍은 늘 더 강해지고자 노력했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자아 인지에 사로잡혀 있어서 누군가를 이기고 말겠다는 승부욕이 없었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옆쪽 건물로 들어가는 성건우와 장목화를 눈으로 좇다가, 각자 무기를 꺼내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둘은 혹시 저격수가 있을지 모르는 빌딩 꼭대기를 포함해 주위 구역을 면밀히 감시했다.
잠시 후 서로 위치를 바꾸려는데, 백새벽이 돌연 조그맣게 말을 꺼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운이 나쁠 때가 있는 법이야.”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랐지만, 용여홍은 곧 연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