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진심 어린 제안
기암괴석으로만 이루어진 섬 옆, 미약한 빛으로 일렁이는 허상의 바다에 성건우의 인영이 나타났다.
성건우는 곧장 섬에 도전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허상의 물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았다. 물 위로 넘실넘실 흐르는 그의 얼굴과 눈동자가 점차 짙어져 갔다.
“난 반고 바이오 사람이야. 반고 바이오 주체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성건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곧 반고 바이오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후 그는 빠르게 섬 위로 올랐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기암괴석 사이에서 인영 하나하나가 나타났다. 하얀 침대보를 둘러쓴 이들의 얼굴과 몸은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가 꽤 많네. 근데 나도 그래. 왜냐하면 난 반고 바이오거든.”
이내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수없이 많은 인영으로 나뉘었다.
그중 일부는 기묘하게 한데 어우러지며 건물 한 채가 되었다. 그 위에는 병원이라는 글자도 붙어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성건우들 중 일부는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일부는 들것을 들고 있었다.
이윽고 성건우들은 흰색 침대보를 둘러쓴 인파를 향해 돌진하면서 그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이송한 뒤 주사를 놓았다.
병원은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그 사이 흰색 침대보를 둘러쓴, 질병을 상징하는 인영들은 흠칫 놀란 듯했다.
이후, 의사 성건우들도 질병을 피하지 못하고 큰 병을 앓기도 했다.
성건우는 끊임없이 분화되는 한편, 계속해서 새로운 의사와 약, 병동을 만들어내며 손실된 역량을 보충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격전이 이어졌으나, 결국 정신력이 바닥나버린 성건우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 * *
잠에서 깨어난 성건우가 거친 숨을 헐떡였다.
“어때?”
침대 옆 스툴에 앉아있던 장목화가 물어왔다.
“졌어요. 근데 방향은 옳았어요. 조금 더 모색해볼 가치가 있겠네요.”
성건우의 눈은 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장목화도 약간 위안을 느끼고,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떻게 했어?”
성건우는 자신을 어떻게 반고 바이오로 삼았는지, 어떻게 병원을 건립하고, 대량의 병동과 의사, 약물 등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그 생생한 설명에 장목화는 광경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각의 범위가 넓구나.”
성건우가 설명한 광경을 재차 떠올려본 그녀는 우습고도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 숨겨진 광기도 느껴졌다. 그저 상상일 뿐일지라도 실제로 그런 상황을 목격한다면 정신이 오염돼 버릴 것 같았다.
“그 환자들한테 의식이 있었다면 아마 네 대처에 깜짝 놀랐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나직이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못 참겠다는 듯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팀장님이 그랬잖아요. 회사처럼 강력한 전체를 이루고 각 방면에서 서로 협조해야 한다고. 심령 세계는 꿈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스스로 의지로 얼마든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죠. 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심령 세계가 조금 판타지스러운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장목화는 곧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건, 너한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어서야. 나중에 회사로 돌아가면 너한테 병원이나 실험실, 제약 공장들을 돌아다녀 보라고 제안할 생각이었어.
거기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보고, 질병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확인하는 거지. 치료가 되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보면서, 치료가 되지 않는 이유가 뭔지 확인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질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관련 영역에서 인류가 진행 중인 작업과 설립한 메커니즘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 병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거라 생각했어. 본래 두려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서 시작되잖아.”
하지만 성건우는 뜻밖에도 스스로 회사가 되어 병원을 건립하고, 스스로를 증식해 의사와 약물 역할을 부여한 뒤 질병과 패싸움을 했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어요. 적어도 전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니까요.”
성건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도해볼 생각인 듯했다. 그러자 장목화는 더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두 방법 다 써보자, 두 방법 다.”
말을 마친 그녀가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살폈다. 지금은 정오를 막 넘긴 때였다.
“우리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도서관이나 다녀오자. 가서 질병에 관한 책을 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그녀는 지금 바로 회사에 심문 결과를 보고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허양원이 상호 이익 관계 제안에 대한 답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백새벽이 이미 직접 조립식 무선 통신기를 예약해뒀기 때문이었다.
이제 2~3일만 더 기다리면 굳이 진병욱에게 찾아가지 않고도 그 무선 통신기로 보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일부 자원은 현지 정보 요원인 진병욱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었다.
* * *
본래 위드 시티 주민도 아니고 중급 이상의 사냥꾼도 아니면 책을 빌릴 수 없지만, 장목화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바로 동료 성건우가 성주 허양원과 의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미 특별 시민과 다를 바 없는 특권이었다.
위드 시티는 여전히 공공 도서관을 중시하는 듯했다. 지난 번 폭발로 인해 깨진 유리창은 전부 새것으로 교체돼 있었고, 까맣게 그을린 표면은 전부 깔끔한 흰색 페인트가 덧발라져 있었다. 부서진 벽도 멀쩡히 수리된 상태였다.
시청은 이런 작업을 수행하고자 사냥꾼 길드에 직접 임무를 발표했다. 임무를 접수한 유적 사냥꾼들은 전문적인 실력을 갖추었으며 일도 잘하는 편이었다.
장목화는 한 차례 질문을 통해, 이 도서관 보수에 참석한 이들이 한 미장공 무리임을 확인했다. 평소 모험이나 탐색 임무는 받지 않고 오직 도시 내의 활동에만 참여하는 이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장목화는 위드 시티의 시민문화가 다른 곳과는 참 다르단 생각을 했다. 이 도시는 이미 사냥꾼 길드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또한 이 사냥꾼 길드엔 모험가, 골동품 학자, 연구원, 대형 세력의 조사원, 정보상, 황야 강도, 넝마주이, 용병뿐만 아니라 미장공, 청소부, 삼류 탐정, 배달원, 임시 교사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내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그야말로 만상을 망라하고 있는 거네. 위드 시티 사냥꾼 길드는 구세계에 있던 인재 시장, 직업소개소랑 다를 바가 없어. 경매 구조를 첨가했을 뿐이지.”
그 사이 인류의 질병 대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뽑아 든 그녀는 뜻밖에도 서가 맞은편에서 지인을 발견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검은 트위드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 고급 사냥꾼 우딕이었다.
성건우는 곧장 서가를 돌아 그에게 다가가며 열정적으로 인사했다. 우딕도 이젠 그의 의형제가 됐다.
“책 빌리러 온 거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우딕은 성건우 뒤로 보이는 장목화를 보며 말했다.
“응, 최근에 내가 파악하고 있는 지식이 너무 얕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코는 지금도 약간 붉었다. 장목화는 잠시 갇혀 있는 가짜 신부 곽정수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이잖아. 반 지성 교육은 사람을 안으로만 파고들게 하니까.”
반 지성교가 언급되자, 성건우가 더 관심 어린 투로 물었다.
“아직도 재채기가 안 멈춘 거야?”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대가에 우딕은 약간 난감한 빛을 보였다. 말이 좋아 대가지,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런데 순간 더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장목화가 성건우의 어깨를 툭, 때리며 혼을 내는 것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짓이야! 각성자 앞에서 지불한 대가를 언급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잖아! 우딕이야 좋은 사람이니까 다행이지, 다른 각성자 앞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넌 벌써 이 사람의 암살 대상에 올랐을 거야.”
‘그런 말로 내 살의를 억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장목화가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인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린 형젠데요. 형제에게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고 싶어 그런 거죠.”
성건우가 강조했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대꾸하던 장목화가 잠시 우딕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몇 마디 말로 네 살의를 억누르려고 그러는 것 같아? 아니, 난 이 화제를 유도하고 있는 거야!’
몇 초간 침묵 끝에, 결국 우딕이 먼저 물었다.
“방법이 뭔데?”
“각성자가 지불한 대가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후각을 잃고 어떠한 냄새도 못 맡게 되더라도, 상응하는 기체가 체내에 흡수되면 마찬가지로 심각한 반응을 일으킬 거야.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영향을 줄이는 방법이 있어. 예를 들면,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거야.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거기 달린 방독 마스크를 쓴 후, 기계가 만들어 주는 산소에 의지해 호흡한다면 강한 냄새를 풍기는 평범한 기체는 물론이고 독가스라도 너를 해하지는 못한다는 거지.”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우딕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이러한 방안을 생각해봤었던 모양이었다.
장목화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래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지. 네가 언제나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건 매우 간단해. 코를 바꾸는 거야. 기계 코로. 굳이 주요 기능을 강화할 필요도 없어. 기체가 코를 통해 체내로 흡수될 때 여과만 되면 되는 거잖아.
뭐, 인맥이 있다면 더 높은 급의 기계 코를 주문 제작해도 될 테고. 그럼 스마트 식별 기능도 더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목표는 산(酸)과 관련된 기체 분자를 차단하는 거야. 본질적으로 보면 이것도 물리적인 격리의 일종이야. 다만 효과는 방독 마스크만 못하겠지. 게다가 네 외형적인 이미지에도 적잖은 손상이 생길 테고.”
우딕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장목화는 인체 개조에 대해 어떤 거부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 이 혼란스러운 애쉬랜드에서도 퍽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우딕은 지금 꼭 눈앞에 구세계 전설 속 프랑켄슈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역시 동류네요.”
성건우가 장목화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장목화는 그를 살짝 노려보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과학기술의 힘이지. 네 대가는 그래도 피하기 쉬운 편이야. 이런 방법을 쓰면 영향을 줄일 수 있잖아. 어떤 대가는 손쓸 수도 없는데.”
이 대목에서 그녀가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우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고민해볼게.”
대답은 이렇게 했어도, 사실 그의 마음은 이미 동한 상태였다. 우딕은 전에도 신 냄새 때문에 미친 듯 재채기를 하느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남들에게 대가를 들킬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딕은 그 무시무시한 강제 입면 능력 덕에 여태 그렇게까지 심각한 곤경에 빠진 적은 없었다. 인체를 개조해가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것 역시 이처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딕은 실제로 가짜 신부의 지향적인 공격에 현장에서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했다. 그 이후로 그는 대가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최대한 빨리 줄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었다.